제사장이 아니라 예언자가 필요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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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이 아니라 예언자가 필요한 시대
  • 김경집
  • 승인 2016.11.21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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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고 백남기 임마누엘 농민의 장례가 ‘드디어’ 치러졌다. 공권력의 의도적인 살인적 폭력으로 쓰러진 지 거의 1년 만이고 숨진 지 41일 만이다. 억울한 죽음이고 국가의 사과조차 없었다. 그런데 정부는 엉뚱하게 부검을 하겠다고 우겼다. 경찰의 폭력 인과를 제거하기 위함이고 공권력의 정당한 행사였다고 방어하기 위함인 걸 모르는 이 없었다. 다행히(?) 법원이 애매모호하게 영장을 발급해서 밀고 당기는 모습을 한 달 넘게 보였다.

그러다 청와대 발 국정농단이라는 초유의 경악스러운 사태가 터지면서 이 문제는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길게 끌면 오히려 정부의 부담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3일장인데 억울하게 국가권력의 폭력에 사망한 백남기 농민은 41일장을 치렀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스로 그분을 하느님께 돌려드렸다. 부끄러운 일이고 분노할 일이다.

사진 제공 = 백남기투쟁본부

예언자 아닌 제사장 몫만 택한 추기경

장례는 ‘민주사회장’이었지만, 장례미사는 명동에서 먼저 치렀다. 미사 집전은 염수정 추기경의 몫이었다. 그는 백 임마누엘의 용기와 사랑을 우리가 이어나가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고인의 정당한 외침이 살수대포에 무너질 정도로 부당했는지, 국가가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 반문했다. 그러나 염 추기경은 과연 그런 부당한 국가에 대해 무엇을 비판하고 항거했는지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고인의 삶을 기억하고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고 강론에서 말했던 염 추기경은 백남기 씨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병원을 찾아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는지 먼저 답해야 한다.

미사를 집전하면서 고인에게 주님의 자비와 안식을 청하는 것은 제사장으로서 마땅한 의무요 도리다. 하지만 장례미사의 집전보다 그런 죽음이 얼마나 극악하고 비민주적이며 반복음적인 것인지 매섭게 따졌어야 했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야 한다.

김희중 대주교가 미사 강론을 통해 고인이 누울 장소는 ‘침묵의 장소’인 이곳이 아니라 누렇게 익은 벼를 바라볼 수 있는 들녘이라고 말했을 때 그 ‘침묵의 장소’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미사에 참례했던 이들은 깊이 새겨들었을 것이다. ‘민주화와 농촌현실에 무관심했던 우리가 그를 떠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다고 말한 김 대주교의 고백은 사실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고백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직 공식적인 사과조차 없는 처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분이 책임지고 사태를 해결해 거리에서 권리 회복을 외치는 사람들이 하루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

이런 대주교의 촉구는 백남기 농민이 치료받고 있을 때 찾아와 주었고, 사망 이후에 병원을 찾아가 위로와 비판의 날을 세웠던 그이기에,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백남기 농민의 장례미사 후 시청 등에서 이어진 영결식은 수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애도 그리고 분노 속에서 치러졌고 마침내 그는 망월동에 묻혔다.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았다. 시청 앞에서 사회장과 노제 등이 끝난 후 남은 이들의 선택은 자연스럽게 12.5 시민궐기대회로 이어졌다. 어떤 셈과 정치공학도 없이 이루어진 민심의 표출이었다. 사회정의 회복을 위한 평화로운 시위였다. 촛불이 어둠을 걷어내는 장관이었다. 그 촛불이 미래의 등대이기를 바라면서... 그 등대가 바로 예언자 정신임을 교회가, 주교들이 알고 있을까.

정종휴 교수 교황청 대사 임명....문제 많다

그래도 가톨릭교회는 용산참사, 밀양, 강정 그리고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용감하게 동참했고 많은 사제들과 일부 주교들이 사회적 불의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했으며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했다. 그들의 행동은 많은 신자들에게 자각과 자부심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이 교회 내에 엄존한다는 사실 또한 뚜렷하다.

그 대표적 사례 가운데 하나가 신임 주 교황청대사의 임명일 것이다. 정종휴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학문적으로 존경 받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도 맡고 있는 보수 우파적 인물이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모임(일명 대수천)’의 멤버로 알려져 있다. 

누구나 생각과 판단의 자유를 갖는다. 대수천의 주장이라고 불편한 시선으로만 바라볼 까닭은 없다. 그런 식이라면 그들이 정의구현사제단을 고까운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탓할 자격도 없다. 하지만 교황청 주재 대사로 그런 특정한 성향의 인물을 뽑은 것은 다른 문제이다. 물론 임명권자는 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지만 적어도 교황청 대사를 고르는 데에는 교회의 추천에 의존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다. 교회의 수장이 어떠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에 우려의 시선을 거둘 수 없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두가이, 바리사이, 제사장, 율법학자 등의 면면은 어떠한 모습인가. 기성의 질서와 체제에 순응하고 그들로부터 안정적 지위를 보장 받으며 그 권한과 권력을 유지하는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배자들에 저항하면서도 짐짓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율법의 엄격성을 과시하고 위선과 겉모습의 과시로 존경을 얻으려 하는 세력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불안과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서로 갈등하거나 반목하는 처지이면서도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기꺼이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의 음모는 적어도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처형하는 데에는 성공한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 15)

누구나 명분이 있다. 보수든 진보든 나름대로 당위와 명분을 마련한다. 그것이 없다면 사적 이익 집단에 불과할 뿐이다. 교회에서도 그러한 흐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명백한 가치의 문제, 인간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정의의 문제, 복음적 가치와 예언자적 의연함은 그런 좁은 진영의 논리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런 점을 본다면 지금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비인격적이고 반지성적이며 반민주적인 불의의 만연에 대해 더 이상 외면하는 것은 그 어떠한 변명과 핑계로 막거나 감출 수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고 사회가 망가져서 교회가 장례미사나 부지런히 치러야 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면 더 이상 지체할 문제가 아니다. 예언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도 불행하지만 예언자가 서 있어야 할 곳과 환경에 예언자가 없는 것도 불행한 일고, 이런 분들을 겁박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예언자라고 해서 들판에 나가서 찬바람 맞고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라는 게 아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베옷 입고 메뚜기를 잡아먹는 이도 있지만, 이사야처럼 왕의 정신적 정치적 고문이었던 이도 있었다. 이사야는 3년 동안 ‘벌거벗은 채(나체라는 뜻이 아니라 행색이 초라했다는 의미)’ 지내야 했고 사악한 왕의 치세에 몸이 둘로 잘려 순교했지만 그건 그만큼 왕과 기득 세력들에게 입바른 말을 많이 해서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가 지근 거리에서 그러한 비판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수많은 예언자들이 거의 다 그랬다. 그런데 지금의 시대와 사회가 그 시절의 타락과 부조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진=한상봉

예언자가 필요한 시대, 지금은

대통령이 주도하여 사익을 탐하고 부적절하고 비헌법적인 비선 인물들과 야합하여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국가를 망가뜨리고 있으며, 정경유착의 노골적인 양태가 일상화되는 모습을 목도하면서도 교회가 침묵하거나 심지어 그 대열의 일부에 가담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을 배반하고 교회를 압살시키며 신자들을 절망에 빠뜨릴 뿐이다. 냉정한 이성과 뜨거운 감성 그리고 균형 잡힌 영성으로 이 시대를 지켜내야 하는 의무가 교회와 그 수장들에게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제사장의 역할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의연하게 예언자의 역할을 감내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의 예언자는 시대정신을 깊이 성찰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미래 의제를 꿰뚫어 봄으로써 미래 가치와 당위를 설정할 수 있도록 이끄는 존재다. 과연 지금 우리 교회의 수장들을 비롯해서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더 넓게는 신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엄준하게 살펴야 한다.

예언자를 외면하고 심지어 그를 십자가에 매다는 건 교회와 봉건적 수장들만의 탓은 아니다. 어리석은 신자들이 예언자를 끄집어내 고발하고 십자가형을 요구하는 탓도 크다. 예수님을 고발하여 십자가형을 요구했던 자들은 단순히 복음서에 기록된 과거의 일이 아니다.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진리와 복음의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지금의 시대는 제사장이 아니라 예언자를 요구하고 있다. 에파타(열려라)!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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