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교 신부 "하느님, 1퍼센트 잡것들이 99퍼센트 국민을 조롱하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립니까?"
상태바
임상교 신부 "하느님, 1퍼센트 잡것들이 99퍼센트 국민을 조롱하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립니까?"
  • 임상교 신부
  • 승인 2016.11.12 12:1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월 11일 대전 대흥동 성당 '헌정질서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미사' 강론
사진출처=오마이뉴스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주최로 11월 11일 오후 7시 30분 대전 대흥동 성당에서 '헌정질서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미사'가 봉헌되었다. 1200여 명이 참석한 이 미사에서 임상교 신부는 강론을 "1% 잡것들에게 99% 국민이 조롱당했다"고 개탄했다. 이 나라는 "알고 보니 이 나라는 최태민 일가를 위해 존재하는 나라였고, (국민은) 최태민 일가를 위한 종으로 살았다, 세금이 아닌 복채를 냈다"고 한탄하면서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해 행동할 것을 주문했다. ] 

“하느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조소와 멸시를 담은 소리입니다. 1퍼센트의 잡것들이 99퍼센트의 국민을 조롱하고 멸시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키득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말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습니다. “개, 돼지!!!” “국민은 개, 돼지와 같아서 적당히 먹을 것만 주면 된다.” 그때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개, 돼지로 보였구나.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을 개, 돼지로 여겼구나!

“개, 돼지인 민중”, 그래서 저들에게 대다수 시민들이 거리 위에서 목터지게 외친 정의와 평화의 소리는 밥을 좀더 달라는 돼지들의 떼창으로 들렸고, “함께 살자”고 외쳤던 가난한 노동자들의 몸부림은, ‘나는 개, 돼지가 아니’라는 선언으로 진압과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300여명의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은 이유. 그것은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개, 돼지였기 때문입니다. 시위대를 정조준하는 물대포와 쓰러진 백남기 어른과 유가족을 향한 그들만의 잔인한 게임을 시작한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개, 돼지’인 민중은 삶의 질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잉여존재들이었습니다. 그저 주인이 원하는 대로 밥을 주면 먹고, 밥을 주지 않으면 굶으며, 죽으라면 죽고 살으라면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다. “가만히 있으라!”

“세금인 줄 알았는데 복채를 내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 “청와대에서 나가라!” “하야 하라!” 촛불 시위에서 보고 들었던 그리고 함께 외쳤던 내용과 구호들입니다. 집회 도중 고등학교 여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투표권을 행사할 때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주세요.” 시위에 나온 중고등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운 마음에 내내 땅을 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조금만 더 행동하고 조금 더 목소리를 냈더라면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 부자가 되셨습니까? 
'나무자비조화불' 외우는 교주에게 사로잡힌 대통령 뽑고..

임상교 신부

지난 10년 동안 한국사회는 집단최면에 걸려 있었습니다. 집단최면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부자 되세요”라는 방송카피가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즈음,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구호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가격이 올려서 부자가 되게 해주고,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땅값을 올려서 갑부가 될 수 있게 해줄게’, 4인가족 평균 1억 6천만원의 수입과, 7%의 경제성장을 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셨습니까? 그의 집권 동안 강은 죽어갔고, 비정규직은 늘어났으며, 재벌의 곳간은 황금으로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파업을 이유로 폭행당하고, 재개발(삼성에 1조의 이득을 주기 위해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이 불에 타죽고 자신들의 삶터에서 쫓겨났습니다. 한국사회의 불평등은 심화되었습니다. 원없이 돈을 써봤다는 그들의 자랑질 뒤 한국사회는 헬조선의 상태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아버지를 잃은 불쌍한 사람, 반신반인이 되어야 하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에 사로잡힌 사람, 나무자비조화불을 외우면서 스스로를 미륵이며 원세경이라고 이름지은 교주에 사로잡힌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혼이 비정상인 사람들의 혼을 정상화시키기 위해서 국정교과서를 강제하고, 국립공원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려고 합니다. 비정상의 혼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제주 강정에 해군기지를 세우고 이제는 사드까지 그래서 평택과 제주 그리고 성주까지 한반도 전역을 전쟁 가능지역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갑자기 그녀가 대통령이 아니랍니다
최태민 일가를 위해 존재하는 나라...

지난 10년 동안의 집단최면에 걸린 한국사회의 오늘은 더욱 참담합니다. 지난 3년 10개월 동안 한국사회의 대통령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아니 저는 뉴스에 자주 보였던 한 여인이 대통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발표하는 내용과 정책에 대해서 토론과 고민을 나눴고, 광장에 가서 이것은 아니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대통령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들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대통령이 아니랍니다. 실질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따로 있었답니다. 힘이 빠지고 머리가 멍해집니다. 최순실 이름이 도처에 깔려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심지아 국방과 안보까지도 개입한 의혹이 듭니다.

자신의 기업에서 일하다가 죽어간 노동자에게 아까운 몇백 만 원, 그런데 최순실의 딸에게는 수십 억을 지원했습니다. 박정희의 정경유착이 그의 딸에게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꼬박꼬박 세금도 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금이 아니라 복채였습니다. 지금까지 국민들은 최태민 일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종이었고, 최태민의 일가를 위해 존재하는 나라였습니다.

언론은 오늘의 이 사태를 최은실 국정농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박근혜와 최은실은 한 몸입니다. 지난 3년 10개월 동안 한국사회는 주인이 없고, 관리자도 없었습니다. 사시와 행시에 합격한 소위 배운 놈들이라는 환관들을 자신의 분신 옆에 포진시키고, 대리청정하는 강남아주머니의 나라였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박근혜 혹은 최순실로 모양만 바꿨을 뿐, 그들은 한 몸통에 두 얼굴을 지닌 쌍두사였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니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이제 ‘그만 두라’고 해야 합니다. ‘물러나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진-=한상봉

나를 대신해서 싸워 주는 영웅은 없습니다
에드먼드 듀크,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악이 승리한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슈퍼맨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영웅을 기다리는 사회, 그래서 그 영웅이 악인들을 물리치고 사회에 평화를 선물해 주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영웅을 기다리는 사회에서 민중의 역할은 ‘순결한 피해자’입니다. 악인이 나타나서 도시로 상징되는 질서를 파괴하기 시작하면 도망치면서 외칩니다. ‘살려주세요’ 그리고 영웅이 나타날 때까지 타인의 고통과 불의에 침묵하면서 구획화를 시도합니다. “나의 책임이 아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나는 힘없는 서민일 뿐이다.” 영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영웅이 되어야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싸워 주는 영웅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인이 되기 위해서 악마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악의 경향성(원죄)은 스스로 악을 선택하게 합니다. 악을 선택함으로써 주어지는 달콤함은 현실적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선택하는 유혹은 매력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자기마음대로 휘저을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리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맹목적 헌신과 배운 놈들의 기회적 편승은 악을 확대시키고 재생산시킵니다.

악마는 40일 단식하신 예수를 유혹하려고 시도합니다. 빵과 굴종이 주는 권력, 그리고 권력이 주는 교만, 그러나 악마는 유혹에 실패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합니다.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예수에게서 떠나갔다.”

악은 포기를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악마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악마를 환영하거나 영합하지 않겠다는 선택은 자신의 몫입니다. 건강한 삶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악에 맞서 싸워야 하며, 선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서 선의 힘을 확장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에드먼드 듀크는 말합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듯, 불의 앞에 중립은 없다
"이제 멈추고 보았으니 선택하고 행동합시다"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합니다. 성경은 하느님 자비는 정의의 기초 위에서 선포되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정의가 실현되는 자비입니다. 오늘 교회는 자비를 살아가기 위해서 불의에 맞서야 하는 역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듯이 불의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교회는 중용을 지켜야 한다’고. 그런데 중용은 양다리를 걸친 상태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중용은 옳음을 실천하기 위한 바라봄이며 투신을 위한 잠시의 머무름입니다. “선택을 위한 멈춤” 그것을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그리고 제자들은 스승 예수 옆에서 머물렀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멈추고 보았으니 선택하고 행동합시다. 교회는 우주의 어느 공간이 아니라 인간 사이에 자신의 거처를 위치시킵니다. 그것은 교회가 걸어야 하는 길이 인간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상태에 교회는 예민해져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백성의 현실은 교회의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가 현존하는 그 시대 속에서, 몸과 정신 모든 것을 써서 살아야 하고, 그 시대의 필요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우리의 외침은 하느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한다거나 상대방을 단죄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에 기반한 하느님 자비를 선포함으로써, 악을 저지른 사람들에을 향한 회개를 위한 초대 즉 하느님을 향한 돌아섬을 위한 외침, 바로 애덕의 행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미사 중에 한국사회가 건강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는 길에 함께 동행합시다.
 

임상교 신부(대전교구 갈마동성당)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하베형나 2016-11-15 14:04:16
엘리비젤(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중립은 가해자에게만 이로울 뿐
희생자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침묵은 결국 괴롭히는 사람편에 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