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교회비판...그러나 전례와 기도에 심취한 도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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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교회비판...그러나 전례와 기도에 심취한 도로시
  • 가톨릭일꾼
  • 승인 2016.11.0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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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교회가 소유한 부동산에 문제 제기하다 

어떤 사람들은 도로시가 때때로 교계에 대해 과장된 존경을 표현했던 증거를 보았다. 성 십자가 대학의 역사 교수인 데이비드 오브라이안은 교회 회칙인 <행동에 대한 부르심>에 관한 첫 번째 회의를 준비하는 주교들을 돕고 있었다:

❧ 그 회의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청문회를 열었는데, 그것은 뉴저지주의 뉴와크에서 열렸다. 20명 내지 25명의 주교들이 토론회에 참석하였고, 사람들이 사회정의, 세계평화 그리고 도시 문제들에 관한 질문들에 증언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나는 도로시에게 증언하도록 초대했으나, 그는 TV카메라가 설치된 무대에 이 모든 주교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몹시 긴장해서 그가 알고 있는 좋은 주교들에 관한 허물없는 얘기들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너무나 실망했다.

그런데 증언을 끝내기 바로 전에 도로시가 말했다, “한 가지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교회의 부에 관하여 또한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부동산 문제를 언급했다. 그리고 왜 교회들은 시내에서 무료 급식을 시작하지 못하는가? 또한 수도회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은 어떤가? 교회와 수도회의 땅은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원으로 적격이지 않는가? 이렇게 도로시는 마침내 교회의 재물에 도전을 제기했다.

이제 이 회의를 준비하고 있는 주교들과 함께 있으면서, 나는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도로시 데이를 경이롭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도로시는 우상같은 존재가 되었고 그가 했던 일을 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는 사람들로부터도 광범위한 감탄을 자아냈다.

선한 목자회의 데레사 머레이 수녀도 그 모임에 참석했고 그는 도로시가 방으로 들어 올 때, 주교들이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기억한다. 이 갈채는 그저 그에게서 침착함을 잃게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도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도로시가 어떤 형태로든지 개인에 대한 숭배를 혐오했던 것은 그 당시 자기의 위치를 실제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기에 티볼리에 있었을 때, 베스 로저스는 도로시가 뉴욕 대교구에서 편지한 통을 받았던 일을 기억한다.

❧ 도로시는 말했다, “아니! 지금 그들은 나에게서 어떤 잘못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편지를 열었는데, 내용은 교회법 수정 작업에 참가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물론 그는 참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교회법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적절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로시는 편지를 크게 읽었고, 아몬 헤네스가 그 내용을 듣고 말했다, “도로시, 당신은 실패했네요. 당신은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셈이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도로시가 미국 가톨릭인으로서 당시 사람들보다 앞서 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주로 피터 모린과 또한 그가 당대의 상황, 교종의 가르침들을 자크 마리탱, 에릭 길, 그리고 엠마누엘 무니에 등 유럽 지성인들의 사상과 연결시켰던 것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짐 오가라는 시카고의 초기 일꾼운동에 관여했고 후에 오랫동안 공동선의 편집자였는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통파 입장이면서 맹목적인 복종을 거부하다
신앙의 눈으로 정치를 행하다

❧ 도로시는 오늘날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보자면 급진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교종의 회칙들과 가톨릭의 사회사상에 관련된 문서들에 익숙지 않은 가톨릭인들이 보면 불편했을 뿐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을 읽었고, 그래서 정통적인 입장을 선호하였다. 그는 교종의 입장에 있었다. 그는 대다수의 미국 가톨릭인들과 달랐으나, 완전한 정통파였다.

캐시 템플은 도로시가 “교회를 자신의 해방에 한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해방의 원천으로 여겼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짐 훠레스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도로시가 우리에게도 하기를 원했던 것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전통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무슨 새로운 성사를 발명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지나간 가톨릭일꾼 신문들을 보면 교회의 가르침들이 많이 실려있다. 또한 자크 마리탱 같은 현대 신학자들의 사상도 실렸다. 도로시는 문화 속에 있는 것을 꺼내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맥쏠리 신부는 도로시의 이런 측면에 대해 말한다:

도로시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이미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교회의 대부분의 구조들보다도 교회에 더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의 모든 미묘한 문제들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50년 동안 그는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인종문제, 노동조합의 권리, 범교파주의, 평화문제에 관하여 가톨릭교회 안에서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 모든 큰 문제들에 관해서 그는 앞서 행동했고 그 모든 것들에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수반케 하였다. 사적인 가톨릭인들이 정치라고 보는 이 문제들을 그는 신앙으로 여겼고, 신앙으로부터 그 문제들에 접근하고 신앙으로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경계를 넘어서는 전례...미사 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전례에 대한 그의 태도는 때때로 양면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 자서전 <긴 외로움>을 보면 그가 얼마나 라틴어 미사를 사랑했으며, 때때로 동방의 예식과 러시아 정교 전례에 참석했던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개혁을 기대하기도 했다. 짐 훠레스트는 교회의 전례, 성사 생활이 도로시를 전율케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도로시는 후기에 가톨릭 일꾼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례, 성사생활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매우 상심했다고 한다.

도로시의 친구인 니나 폴린 무어는 말한다:

❧ 나는 도로시에게 새로 개혁된 전례들이 힘들었을 꺼라고 생각한다. 부엌의 식탁 주위에서 미사를 한다든가 제대로 미사제의를 갖춰 입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는 이런 변화가 자기에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았으나 받아들였다. 그것도 전혀 판단하지 않는 모습으로.

브라이안 테렐은 전례에 관한 도로시의 노년기 모습을 가장 균형있게 보고 있다. 먼저,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 도로시의 증손녀 샬로트 로즈가 티볼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 때 주례 사제는 뉴욕의 우드스톡에서 온 프란시스 대주교로, 그는 옛 가톨릭의 대주교였다(옛 가톨릭은 한 이단파로서, 티볼리의 젊은 친구들은 강을 건너 우드스톡에 가서 이 대주교의 미사에 참석하곤 했다. 이 젊은이들 중에는 도로시의 손녀인 수지가 있었는데, 수지는 티볼리의 잔디밭에서 자기의 딸에게 세례를 달라고 프란시스 대주교에게 부탁했다.) 프란시스 대주교는 신부 한 사람과 함께 와서 거창한 전례를 했다. 다니엘 베리간도 그곳에 있었다. 도로시는 대주교에게 예의를 갖췄다. 대주교는 가족의 오랜 친구였고 그날은 하루 종일 아름다운 날이었다.

이 대주교는 아마도 교회 분리주의자였건 것 같다. 규칙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대죄 중에 있었다. 그래서 도로시에게는 그것이 다른 신앙전통에 열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교회분리주의자 사제에게도 열리는 것이었다. 교회분리주의 전례에 참석하는 것은 개신교 교회에 가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었고, 도로시가 거기에 있는 것은 범교파 행동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런데 그날 도로시의 모습을 보면 증손녀 하나가 세례를 받아서 마냥 행복한 것 같았다(웃음).

그리고 나서 브라이언은 도로시의 전례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또다른 이야기를 말해준다:

❧ <세상에 보이는 장관>이라는 책을 보면, 도로시가 다니엘 베리간의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의 사진이 있다. 다니엘은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를 입고 짐승의 발톱으로 만든 십자가를 걸고 있다. 영대도 없고 장백의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도로시가 그곳에 앉아서 아무런 반대표현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다. 나는 그 사진이 찍힌 지 일이년 후에 가톨릭 일꾼에 왔지만, 그 후로도 다니엘이 미사책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다니엘의 미사는 모두 즉석에서 하는 미사였다. 뉴욕에 있는 처음 일년 동안 우리는 식당 방에서 매 월요일 밤 미사를 했다. 그 금속 식탁위에서, 어떤 신부들은 제의를 입고, 또 어떤 이들은 입지 않았으나, 도로시는 개의치 않았다. 미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 했다.

모든 힘을 기도생활에서 길어 올렸다

그렇다, 도로시는 전례에 관한 변화들에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고, 교회가 복음을 살지 못한다고 자주 비판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이 변질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강화됐다고, 쟈네뜨 노엘은 설명한다:

❧ 그는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비판으로 꽉 차 있을 때에도 여전히 매우, 매우 교회에 충실했다. 그는 교회를 떠나는 대신, 자신의 표양을 교회에 주었다. 그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교회가 받아들이도록 했으며 그것도 돌을 던지지 않고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리고 뉴욕의 수많은 교회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급식이나 숙박할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도로시와 가톨릭일꾼의 영향 때문이다.

보다시피, 도로시는 항상 하느님을 먼저 두었다. 그리고 기도 생활에 매우 충실했다. 매일미사 참여, 성무일도하기, 묵주신공하기 등. 그는 모든 힘을 기도생활에서 길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완전한 신뢰. 그는 어떻든지 하느님께서 그가 복음을 살아내도록 이끌 것이라고 완전하게 믿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렇게 했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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