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신심, 온유한 사랑의 혁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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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신심, 온유한 사랑의 혁명으로
  • 한상봉
  • 승인 2016.11.0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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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으로 시작되는 성모송을 자주 입술에 올려야 하는 묵주기도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대중적인 기도 양식이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이쿠! 어머니” 하듯이, 우리는 엄마이신 마리아에게 특별한 애정을 담아 기대고 싶어 한다. 아드님 예수와 우리들 사이에서 가장 친밀한 눈빛으로 우릴 받아들일 태세를 언제나 갖추고 계시는 분이 마리아라고 ‘정서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친밀감을 확인하기 위해서 몸을 만지고 싶어 한다. 영성작가인 헨리 나웬은 이러한 스킨십이 “그들의 사랑을 더 실제적이며 깊은 차원으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장 자주 어린 시절 아드님 예수의 몸을 어루만졌을 것이고, 아드님 예수의 기저귀를 갈아 주고 필요한 음식과 음료를 나누어 주셨을 것이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깊은 일치를 경험한 마리아와 예수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마리아께 공경을 드리는 것은 곧 예수께 드리는 사랑과 다르지 않다. 이분들은 서로 온전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아래서 마리아는 당신의 자식을 받아들이듯 요한을 제 자식으로 삼으셨고, 요한 또한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처럼 마리아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때로는 어린애처럼 이기적인 요구일지라도 받아 주시려 애쓰실 분이다.

사진=한상봉

복을 비는 마음, 이웃에게로

그래서 묵주기도는 대개 청원기도다. 무엇인가 바라는 바가 있어서 우리는 묵주알을 굴리며 간절하게 마리아께 매달리곤 한다. 우리가 주로 바치는 묵주기도의 ‘지향’은 무엇일까? 교회공동체 안에서 바치는 공동기도가 아니라면 대개 내 자식을 위하여, 내 가족을 위하여 모든 묵주기도를 바친다. 우리 가족들의 건강과 안전과 성공을 위하여 비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문제는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90퍼센트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를 두고 ‘개인 구복적 기도’라고 부른다.

복을 비는 것이야 종교생활에서 빠질 수 없지만, 개인의 복만 빌어서야 제대로 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빌어서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그 원망의 화살을 마리아께, 하느님께 돌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렇게 저렇게 간청했건만 소원을 들어 주시지 않는 야속한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는 푸념이 나올 수도 있다. 그것은 참 위태로운 신앙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부활의 기쁨만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은 “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의 종교”라고 말했던 시몬 베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노예들의 안위를 염려하는 종교가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여기서 예수가 남루한 마구간에서 노동자였던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비천한’ 여인의 몸을 빌려 태어나셨음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뭐든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뭐든 요구한다. 배고프면 밥 달라, 목마르면 물 달라 청한다. 엄마는 무조건 내 요청을 들어주려고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어른이 되면 엄마도 엄마 이전에 한 여자임을 깨닫게 된다. 한 여자로서,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한 사내의 아내로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힘든 날들이 많았을까, 생각하며 그분을 위로할 여지가 생긴다. 그리고 이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정말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헤아리게 된다. 성숙한 신앙이란 이제 내 사정에 얽매어 청하기 전에 그분 마리아가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진=한상봉

예수가 원한 것을 원하시는 엄마, 마리아

마리아는 메시아이신 예수가 원하던 것을 원했기에 ‘거룩한 엄마’, 성모聖母가 되신 분이다. 그분은 예수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던 바가 그대로 이뤄지기를 갈망했다. 그러면, 예수는 무엇을 갈망했을까? 마리아가 노래했던 마니피캇은 예수께서 공생활 벽두에 나자렛에서 선포한 ‘희년’ 선포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때마침 프란치스코 교종이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했다. 그리고 2015년 4월 11일에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입니다.”로 시작하는 교황칙서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을 발표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종의 특별한 관심을 알 수 있는데, 이 교황칙서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행동을 나타내는 핵심 단어”라면서 “우리는 점점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도록 요청받는다.”고 밝혔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에서’ 망설임 없이 자비를 행하라는 요청이다.

마리아가 아드님 예수의 희년선포와 같은 맥락에서 노래한 마니피캇은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 불리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내치셨다.”는 내용이다. 그런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세상이 평화를 되찾고 만인이 자매형제로 사랑을 나눈다.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이들을,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내 형제가족처럼 돌보게 된다. 그러므로 어른이 된 신앙인들의 기도는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 무엇을 좀 해 달라는 기도는 좀 접어 두고,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이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청해야 한다. 아픔일랑 제게 주시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오길 갈망하는 것이다. 내 고통(my pain)에서 벗어나 ‘세상의 고통(the pain)’을 없애기 위해 투신해야 한다.

온유한 사랑의 혁명을 믿는 자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마리아를 ‘복음화의 어머니’, ‘복음화의 별’로 표현하면서, 그분을 따라 걸어가라고 권했다. 만삭의 몸으로 발현한 멕시코의 과달루페의 성모처럼, 교종은 “마리아께서 탁월한 믿음으로 세상에 주님을 낳아 주셨고, 이제 ‘여인이 나머지 후손들, 곧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묵시 12,17)과도 동행해 주실 것”이라며, 성모 마리아처럼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낳는다.”고 선언했다.

교종이 말하는 ‘마리아 방식’의 신앙은 “온유한 사랑의 혁명이 지닌 힘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마리아가 “바로 정의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따스한 온기를 가져다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성모 마리아는 나자렛에서 기도하고 일하는 여성이며, “다른 이들을 돕고자 ‘서둘러’ 당신 마을을 떠나시는 도움의 성모”라고 교종은 말한다. 그러니 우리 신자들도 ‘안온한 교회 안에’만 머물지 말고 묵주를 손에 쥐고 ‘서둘러’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가까이 가야 한다. 그들 안에 머무시는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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