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 쇠렌 키르케고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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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쇠렌 키르케고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 로버트 엘스버그, 임선영 역
  • 승인 2016.11.0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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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사망: 철학자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물은 천재가 아니라 순교자이다.“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자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그리스도 교인이라고 부르는 일조차 꺼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란 끝없는 자선의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교회에서 말하는 의무들은 성스럽기만 하고 보람은 없으며 거짓이며 사기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간접적으로는 진리의 목격자가 되기를 원했다.

쇠렌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는 181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음울하고 금욕주의적인 사람으로 늘그막에 얻은 아들에게 우울한 성격을 물려주었다. 쇠렌은 어려서부터 노인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고 척추가 휘어지자 이런 기질은 더욱 심해졌다. 루터교 목자가 되고자 하였으나 몇몇 중요한 계기로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첫 번째 인생의 전환점은 레기네(Regine)라는 젊은 여성과의 파혼이었다. 사랑은 진실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세속적인 행복의 길은 소명이 아니라고 믿었다. 진정한 파혼의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에 비열한 인간이 되는 쪽을 택했다. 레기네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지만 이 사건으로 코펜하겐 사회에서 그의 명예는 실추되었다. 자신의 동기를 깊이 생각하고 정당화하는데 남은 생을 바쳤다.

쇠렌은 자기비판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이 결론 없이 반복되는 반성과 다른 점이다. 그는 "내적 성찰"을 선호했으나 치열한 결과물을 전제로 했다. 슬프게도 이러한 내적 성찰은 "현대 사회"에서는 점점 사라지는 능력이 되리라 믿었다.

신상품, 뉴스, 소문과 더불어 "현대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심하게 경멸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대중 사회의 얄팍함과 단순함의 전형이며 대중들은 간접적인 삶의 경험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는 싸구려 대중 잡지인 <코르세르>(Corsair)를 특히 경멸했다. 도덕적 봉기가 시작되기를 희망하며 잡지의 조롱감이 되기를 공개적으로 자처했다. 편집자는 그의 뜻을 받아들여 일 년 가까이 무자비하게 공격했으며 그 후로 오랫동안 "쇠렌"이란 이름은 "바보"와 동의어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비난받고 따돌림 받는 존재가 된지라 목사의 길은 쉽게 포기했다. 대신 적지 않은 유산을 바탕으로 저술에 힘쓰기로 결정하고 전념한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철학, 윤리학, 심리학 그리고 신학을 망라하는 전집을 낸다. 이 작업으로 서양 사상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명이라는 명성을 얻는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고 수 세대가 지나서야 이러한 칭송을 받을 수 있었다.

저술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공식적인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거주하는 상황에서는 아이러니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중요했다. 이제까지 교회는 사람들에게 믿게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란 그리스도교 국가에 태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교회의 관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라고 격려하지 않는다. 그 결과 전세계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세례 받은 이교도들이 탄생하였다. 훌륭한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해악은 교수들과 신학자들의 합작품으로,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체제의 이상에 끼워 맞추려고 한다고 쇠렌은 주장했다. 그리스도교는 사유의 대상으로 해석할 수 없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사실은 이성에 완전히 반대된다. 오직 믿음의 도약과 열정적인 헌신, 그리고 학문적인 연구에서는 대부분 무시되는 과감한 관심만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스도교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실증적(무엇이 그리스도교인가?)이 아니라 주체적(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이다.

그는 저술 활동을 통한 "간접적인 의사소통의 방식"을 취했으며 기발한 "필명"으로 종교적 발전의 다양한 단계를 성찰했다. 생애 후반기에는 직접적으로 의견을 말했으며 설교문과 숭고한 사랑에 대한 종교적인 글들을 썼다. 하지만 말년에는 가장 대담한 활동을 위한 투쟁의 장으로 되돌아갔다.

1854년 민스터(Mynster) 코펜하겐의 주교가 사망하자 유명한 신학자가 그를 "진실한 진리의 증인"으로 "열 두 사도의 시대까지 이어지는 증인들의 신성한 사슬"의 중 하나라고 기리자 행동을 시작했다. 주교는 선의를 가진 마음에 드는 동료였다. 하지만 증인이라고 부르거나 사도라고 언급하는 것은 신성모독이거나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키르케고르는 일련의 기고를 통해 대응했는데 모두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대한 논쟁의 핵심을 찌르는 내용들이었다. 신약의 정신과 비교하면서 국교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직업에 불과하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면 유다처럼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배신하는 일이라 주장했다.

키르케고르는 생의 마지막 1년 동안 이에 헌신했다. 기고문들로 인해 순교자들과 같은 박해를 받으리라 기대했다면 그는 실망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그의 주장을 무시했다. 하지만 최소한 "감시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스스로는 만족했다. (그는 "사도들은 진실을 선포하고 감시자들은 거짓을 찾아낼 의무가 있다." 썼다.)

1855년 10월 2일 키르케고르는 길에서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진 후 그곳에서 생의 남겨진 한 달을 마비 상태로 침상에서 보냈다. 병문안을 갔던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도 그가 고요하고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목사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지 않았다. "나는 선택을 하였다. 목사는 공무원이다. 그리고 공무원들은 그리스도교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11월 11일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문 출처: <모든 성인-우리시대를 위한 성인, 예언자, 증인들>(All Saints), Robert Ellsberg, crossroad, 1997, p489-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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