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갇혀 사지 마십시오"
상태바
"과거에 갇혀 사지 마십시오"
  • 교종 프란치스코
  • 승인 2016.11.07 14: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11월6일 교도소 수감자위한 희년미사 강론
사진출처=L'Osservatore Romano

[프란치스코 교종은 11월6일 연중 32주일 미사를 수감자들을 위한 희년미사로 봉헌하고 희망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이를 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확실하게 희망에 관한 것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사형에 처한 일곱 형제 중 하나는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2 마카 7,14)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 순교자들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고문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보는 힘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신앙은 하느님 안에서 희망의 원천을 바라보는 가운데 새로운 생명에 도달하려는 열망을 보여주는 신앙입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가 들은 복음은 어떻게 예수님께서 단순하지만 완벽한 답변을 통해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 통속적인 예를 거부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분의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 38) 이것은 아버지의 참다운 얼굴을 보여주고 있으며 당신 자녀들의 생명을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희망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그 희망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는 그 모든 것입니다.

희망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청해야 합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주어집니다. 그것은 고통과 슬픔을 가져오는 많은 상황 속에서 자주 흔들리고 어둡게 지내게 되는 현재를 그분의 빛으로서 밝게 비추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희망의 뿌리를 보다 더 굳건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 뿌리들이 열매를 맺도록 말입니다. 

우선 하느님의 현존과 자비에 대한 확신성이 그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행했던 악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도달하지 못할 그런 우리의 마음은 없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있는 그곳에 아버지의 자비가 더 현존합니다. 이것은 통회와 용서 화해,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수감생활을 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을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자비의 희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날 필요가 있는 자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물론 이분들은 법을 준수하지 않은 이유로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은 보상적인 벌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희망이 감소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악 때문에 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에 대한 숨결, 그것은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질식시킬 수 없는 것도 존재합니다. 우리 마음은 항상 선을 희망합니다. 우리는 자비에 대한 채무자들입니다. 하느님은 그 자비를 통해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면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바오로 사도는 ‘희망의 하느님’(로마 15,13)으로서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도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희망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역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그분은 잘못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항상 희망하고 계십니다.(루카 15, 11-32. 참조) 

하느님에게는 잃어버린 양을 되찾기까지 휴식도 안식도 없습니다.(루카 15, 5. 참조) 하느님께서 만약 희망하고 계시다면 희망은 그 누구도 제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미래를 향한 이끌림, 내일을 향한 힘찬 출발인 것입니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그 사람은 새로운 길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하느님 자비의 내적 힘의 증거입니다. 그것은 앞을 바라보고 신앙과 그분께 의탁하면서 악과 죄에 대한 이끌림을 물리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수감자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의 희년입니다. 주님 앞에서 오늘 여러분의 희망이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희년은 그 본성상 해방을 선포합니다.(레위 25, 39-46. 참조) 그것을 허락하고 또 참된 자유에 대한 갈망을 여러분 각자 안에서 일으키는 것은 저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닌 교회가 포기할 수 없는 의무인 것입니다. 

많은 경우 어떤 위선은 여러분 안에서 단지 잘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 유일한 방법은 감옥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여러분에 말합니다. 저는 교도소를 방문할 때마다 저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그들은 여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잘못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가 말입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우리는 잘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위선인 것입니다. 재생되는 것, 사회에서 다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이들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합니다. 

자신의 편견에 갇혀 있거나 거짓으로 잘 지내는 상태라고 하는 우상의 노예가 될 때, 그리고 이념적인 논리에 의해 우리가 움직이거나 사람을 내모는 시장의 원칙을 절대화할 때 개인주의와 자족적인, 그러나 참된 자유를 생성시키는 진리가 결핍된 좁은 벽 안에 살아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 손가락질하는 것은 자신의 위선을 감추기 위한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누구도 의로운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로마 2, 1-11 참조) 또한 그 누구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성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통회한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천국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갔습니다.(루카 23, 43 참조)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그 누구도 과거에 갇혀 있지 마십시오! 지난 시간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도 다시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작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역사는 하느님의 은총과 여러분의 개인적 책임으로 아직 쓸 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에서 배우면서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갈 수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하는 유혹에 빠지지 맙시다.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 크든 작든 그 어떤 것이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십니다.”(1요한 3, 20) 

우리는 오직 그분의 자비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신앙이라도 산을 옮겨갈 수 있습니다.(마태 17, 20 참조) 얼마나 많이 신앙의 힘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용서라는 단어를 선포하고 있습니까! 폭력과 횡포 때문에 자신이나 그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산들을 상실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직 하느님의 힘, 그 자비만이 그런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폭력에 대해서 용서하는 곳에서 잘못한 사람들의 마음은 모든 형태의 악을 물리치는 사랑에 의해 지배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피해자들과 피의자들 사이에 하느님의 자비의 참된 증인과 협력자들을 일으키십니다. 오늘 우리는 잘려진 쇠사슬로 예수님을 안고 계신 어머니를 표현하는 성모상을 공경하고 있습니다. 이 쇠사슬은 노예와 감옥의 사슬입니다. 성모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그 사랑의 눈길을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생활을 위한 희망의 힘과 충만한 자유와 이웃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합당하게 살아가는 힘을 일으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종 프란치스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