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복음적 삶이란 주일날 아침의 기분좋은 단조로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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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복음적 삶이란 주일날 아침의 기분좋은 단조로움 아니다
  • 머레이 보도
  • 승인 2016.10.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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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Francis of Assisi Receiving the Stigmata, Jan van Eyck, c. 1430–32

프란치스코의 회심과 주님 안에서의 초기 몇 년은 아시시 성밖에 사는 나환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보살피는 시기이다. 그리고 나머지 삶을 그는 권태의 안락한 벽뒤로부터 사람들을 끄집어내고 거부되고 멸시받은 사람들이 포옹 받고 귀속되며 아무도 그 안팎에 가두는 벽들이 없는 새로운 도시와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그들을 평원으로 이끄는데에 보낸다.

그리고 평원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소유물도 가지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프란치스꼬에게 있어 다른 이들을 내쫓고 해를 끼치는 폭력과 의도는 소유와 밀접하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형제들에게 만일 그들이 소유물을 갖게 된다면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무기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엄청난 단순함으로 프란치스코는 20세기 안으로 뛰어든다. 그 20세기는 소유물의 방어가 지키려고 하는 모든 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핵무기라는 마지막 광기에까지 이르렀다. 프란치스코는 금지되어야 할 것이 전쟁이라기 보다는 돈에 대한 사랑이며, 전쟁의 근원이 되고 우리를 그러한 재난으로 이끌어 가는 인간마음의 탐욕이라고 이해한다.

전쟁이 방어하는 것은 재산 이외엔 아무 것도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전쟁으로 파괴되는 것은 사람들이고 반면에 재산은 사람들을 파괴하는 수단들을 더 많이 생산함으로써 늘어나기 때문이다.

전쟁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해독제는 가난인데, 가난은 그와 그의 동료들을 자유롭게 하여 포옹하고 귀속시키고 주게 한다. 그들은 방어적일 필요가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방어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돈이 폭력과 증오의 근원들 중 하나라고 강하게 확신하면서 심지어는 아픈 이들을 위해서 쓰는 것 이외에 돈을 만지는 것조차 금지한다.

그는 “우리는 먼지라는 형태 그 이상으로 돈을 사용하거나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첫 번째 규칙에서 말한다. 이 진술은 확실히 극단적이다. 교회는 프란치스꼬가 죽은지 몇 년 후에 교회의 주류적인 해석의 입장에서 규율의 이 극단적인 관점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21세기에 진입하는 이때에 돈에 대한 사랑이 가져다 준 극단적인 위험에 처한 우리 주위를 둘러볼 때, 소유와 탐욕 때문에 국가들 사이에 얼마나 사랑이 작은가를 볼 때에 프란치스코의 입장이 문서에서 보듯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입장은 우리의 영적인 적당주의가 이룩한 극단적인 광기보다 훨씬 더 바람직한 극단적인 어리석음인 것이다. 극단적인 탐욕은 물 흐르는 듯한 평범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극단적인 사랑에 의해서 만이 물리칠 수 있다. 그리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그런 사실을 이해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대항을 기꺼이 하려 하지 않는다면 증오의 세계에 사랑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프란치스코가 사제에게 세 번씩이나 복음서를 펴서 읽어달라고 요청하던 그의 회심의 시초에 확고해진 것이다. 복음의 말씀들은 분명하고도 타협하지 않는다:

“만일 네가 완전해 지려거든, 가서 네 모든 소유물을 팔아라,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여행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아라, 지팡이나 전대도 신발이나 돈도 지니지 말아라."(루가 9,3)
"만일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그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마태 16,24)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이 세 권의 복음서의 말씀들을 어떻게 살아냈는지에 대하여 많은 책들이 쓰여졌다. 그러나 여기선 프란치스코의 가난이 급진적인 사회변혁자의 창작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한 신실한 사람의 단순한 응답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철저함은 그의 가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에 대한 응답에 있는 것이다. 그는 가난을 산다.

그리고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을 그렇게나 놀라게 한다. 그들은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 우리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프란치스코의 삶은 복음이 한가지 삶의 방식이며, 주일날 아침에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드는 일련의 단조로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프란치스코의 전 생애는 복음이 진실하게 살아지고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을 하도록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 때에만 비로소 이웃사랑이 확보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출처> 머레이 보도의 <성 프란치스꼬의 길-모든 이에게 도전하는 프란치스꼬의 영성>, 참사람되어 2002년 3월호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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