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우상을 향해 돌격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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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우상을 향해 돌격 앞으로
  • 최충언
  • 승인 2016.10.17 0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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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어르신 부검 시비를 바라보며

[최충언 칼럼] 

사람의 신체를 검사하여 생명이나 심신에 관하여 의학적으로 판단하고 인체에 적정한 대응조치를 시행하는 것은 의사의 의무이자 권한이다. 진단서는 의사 개인이 발행하는 사문서지만 사회적, 법적으로는 공문서의 가치를 지닌다. 예를 들면, 사람의 법적 권리는 출생신고로 시작하고 사망신고로 끝나는데, 사회적으로는 출생증명서와 사망진단서로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동시에 이러한 문서는 사인통계를 비롯한 여러 통계의 기초자료가 되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보건통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법적이나 관습적으로 의사의 진단서는 사회생활의 여러 곳에서 중요하게 쓰이며 공문서와 같은 가치를 지니므로 의사는 진단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바르게 교부하여 피해가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의료와 관련된 불만 또는 분쟁 가운데에 진단서를 둘러싼 일이 적지 않으며, 그 때문에 의료인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불신을 받기도 한다. 최근 백남기 어르신의 사망진단서로 나라가 들끓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을 “두 다리를 가진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라고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적었다. 인간의 더 근본적인 결함은 ‘끝이 없는 무례함’이라고 말했다. 최근 백남기 어르신의 사망진단서를 둘러싼 논쟁 아닌 논쟁을 보면, ‘끝이 없는 무례함’의 극치를 서울대학병원 의사들이 보여주고 있다.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다정함과 선의 앞에서는 무례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돈과 권력에 부라퀴들이다. 이것은 타락한 실존의 모습일 뿐이다.

사진=한상봉

지난 달 25일, 경찰의 직수살수로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날 밤, 사망진단서에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로 발부되었다는 뉴스를 듣고는 내 눈을 의심했다. 화가 나고 부끄럽고 복잡한 마음으로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회진을 마치고 진료실에서 <사망진단서 유감>이라는 글을 SNS에 올렸다. 반응은 놀라웠다. 187명이나 내 글을 공유한 것이다. ‘좋아요’가 145명이니 글을 읽은 사람마다 공유했다는 이야기다. 병사라는 게 일반 상식에서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아래는 내가 쓴 글의 대강이다.

나는 대한의사협회에서 발간한 '사망진단서 작성지침'이라는 35년 전 인턴 시절에 받은 소책자를 아직도 진료실에 비치하여 사망진단서를 쓸 때 참조한다. 어제 백남기 어르신이 돌아가셨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작성한 사망진단서를 보고 나는 같은 의사로서 경악을 했다.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라고 적혀 있고, 직접사인이 심폐정지라니? 의사가 작성한 건지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출근하여 통계청과 대한의사협회에서 발간한 사망진단서 작성안내 리플릿을 원무과에서 구했다. 의사뿐 아니라 의대생들도 사망진단서 작성 방법을 학교에서 배운다.

사망진단서에서 사망의 원인과 사망의 종류가 가장 중요하다. 직접사인에 ‘심폐정지’라고 적혀있다. 웃기는 일이다. 지침에는 불명확한 진단명이나 사망에 수반하는 증상이나 징후만 기재하면 안 된다. ‘심폐정지’ ‘호흡정지’ ‘호흡부전’ ‘심장정지’ 등 사망에 수반된 현상만 기재해서는 안 되며 구체적인 질병명을 적어야 한다. ‘외상성 경막하 출혈 및 지주막하 출혈’ 만큼 구체적인 질병명이 어디 있나!

백남기 어르신의 경우, 절대 병사일 수 없다! 손상이 있으면 사망종류를 결정하는데 질병보다 손상이 우선한다. 질병 외에는 다른 사망원인이 없을 때에만 병사를 선택한다. 외상의 합병증으로 질병이 발생하여 사망하면 ‘사망의 종류’는 외인사라고 명백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대생도 아는 이 기본적인 사실을 서울대학병원의 의사가 이렇게 엉터리 진단서를 발부하기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분명 외압이 있었다는 증거다. 국가권력이든 봉직하고 있는 병원의 수장이 엉터리 사망진단서를 발급하라고 지시를 내리지 않고서야 병사란 있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진단서를 작성한 의사는 그러면 안 된다. 사망진단서의 사망원인은 사망통계 작성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환자와 유족을 위한 의사의 마지막 배려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압이 있다하더라도 의사의 양심을 속이면 안 된다. 내가 주치의라면 이렇게 사망진단서를 적겠다.

▲ 직접사인: 외상성 경막하 출혈 및 지주막하 출혈
▲ 사망의 종류: 외인사
▲ 사고 종류: 기타(경찰 살수차의 수압)

그동안 백남기 어르신의 보도를 보면 참 가관이다. 경찰은 부검영장을 신청하여 기각 당했다가 조건을 달고 2차 영장을 발부받았다. 가해자가 부검을 결정하는 꼴이다. 공권력의 살인적인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머리뼈 골절과 외상성 뇌출혈로 돌아가신 분을 부검하다니 이게 인간이 할 짓인가. 유족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일이다. 근본적인 결함을 가진 인간들의 ‘끝이 없는 무례함’을 가진 자들이 유족들이 완강히 반대하는 부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사인부분에서 외인사냐? 병사냐?로 논쟁을 벌이고 둘째는 외인사라도 물대포냐? 빨간우의냐?로 초점을 흐려 결국 국가책임은 아니라고 여론몰이를 하려는 것이다. 악의 세력이 하는 짓이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다. 양심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다. 나는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믿는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인간은 양심을 통해 법을 발견하며, 이 법은 언제나 선을 사랑하며 행하고 악은 피하도록 하느님이 새겨 준 것이라고 양심을 정의한다. 사망진단서를 쓴 전공의가 무슨 잘못이 있겠나? 모르긴 해도 그 전공의는 양심이 찔려 괴로워할 것이다. 그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은 양심선언을 하는 것인데,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망자를 사물이 아닌 사람으로 본다면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심성이 너무 거칠고 사나워졌다. 현대문명의 무서운 발전 속도는 심성이 황폐되는 속도와 비례관계에 있는 것일까? 그래서 현대 문명병의 중화제로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하는 걸까? 한 끼의 식사를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선 노숙자들을 먹이는 사람들, 버림받은 치매 노인들의 똥오줌을 받아내며 살아가는 사람들, 장애자들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속도전일 수가 없다. 우리는 그동안 웰빙을 위한 느림에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닌 지 반성한다. 가난하고 병들고 집도 없고 인지기능도 없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느림을 선택한 사람들이 바로 예수의 제자들이다.

자, 이제
깃대 꽂을 자리는 잡았는가
총구와 포신의 탄착점을 알겠는가
승리가 늦추어질 수는 있어도
질기면 반드시 이긴다
한 치 오차 없이
저 발칙한 우상을 향해
돌격 앞으로!
(<접전>, 김일석)

나는 김일석 시인의 <접전>을 좋아한다. 시를 직접 써서 보내 준 존경하는 선배의 이 시를 자주 왼다. 백남기 어르신의 사망종류는 그 누가 아무리 병사라고 우겨도 외인사다. 이성으로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는 없다. 부검논란보다도 그동안 살아오신 백남기 어르신의 생애와 왜 상경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슬픈 우리 농촌의 현실을 직시하자.

반드시 부검을 막아내고 책임자를 처벌해야한다. 정부는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하고 고인에게 머리를 숙여야만 한다. 그래야 인간의 결함인 무례함이 치유된다. 그리고 편안히 고인을 보내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질기게 연대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이긴다고 시인은 단언한다. 발칙한 우상을 향해 모두 돌격 앞으로~

 

최충언 플라치도
외과의사.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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