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천박한 은총의 장사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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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천박한 은총의 장사치인가?
  • 김경집
  • 승인 2016.10.17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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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21세기가 벌써 스무 해 가까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20세기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20세기는 오로지 속도와 효율로만 학습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보상(그 절차와 과정이 공정한지 여부는 차치하고)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물질적 풍요를 점진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노동력의 착취였지만 그 이전의 시절이 너무나 서럽도록 가난해서 굶어죽지 않는 게 고마웠고 온갖 물질적 도구를 얻을 수 있음에 취했다. 그래서 독재마저 미화되고 열렬히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더 이상 20세기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아직도 그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여전히 사회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종편 방송의 방향이나 허접한 패널들이 입에 거품 물고 떠드는 걸 보면 혹세무민이 따로 없다. 그런데 그걸 종일 보며 옳다고 따르는 족속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무리 배우고 나이 먹으며 경험이 많은들 무엇하랴. 명백한 진실도 믿지 않고 오히려 타박하고 겁박한다. 매카시즘이 시대착오적으로 난무한다. 그 망나니짓이 우리가 당장 살아야 하고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 할 미래를 뿌리부터 망가지게 하는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진=한상봉

예언자 역할 포기한 교회...악마와 손 잡을 수도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의 힘은 복음의 선포와 그 실천에서 온다. 그리고 그 바탕은 예언자 정신에 뿌리를 둔다. 예언자는 시대정신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의 예지력이 멸망할 미래를 수렁에서 건져낸다. 그런 판단력이 시대정신을 읽어낸다. 하지만 이미 교회는 그런 예언자의 역할을 일찌감치 포기했고 오히려 권력과 재력의 뒷배 역할을 자처하고 있으니 이러고도 존재의 이유가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주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젊은 사제들마저 교회의 기득권(그래봤자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옹호에만 몰두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마다 할 게 없는 듯하다. 저러다 악마와도 기꺼이 손을 잡을 기세다. 진위 여부를 떠나(약간의 오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약간의 진실만 존재해도 두렵고 무서운 일이라는 건 분명하다)

대구대교구에서 벌어진 희망원 사건은 변명하기 어렵다. 처음부터 그러지는 결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금야금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관행이라거나 교회 사정상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넘어 이미 벌어진 폭력과 야만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성하고 사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을 딱 다물고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그 문제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지적했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알지도 못하면서 부화뇌동한다거나 교회를 흔드는 작태라고 비난하고 억압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죄를 지은 것이다.

명동성당이 조용하고 깨끗한 관광명소가 되어 행복한가? 

제사장만 횡행하는 교회는 빛도 소금도 아니다. 시대정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교회와 성직자와 신자는 그 자체로 교회를 욕보이는 것임을 두려워해야 한다. 복음서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한 것은 그만큼 조금만 방심해도 언제나 어디서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 54~56)

서슬 퍼렇던 유신독재 때도 무자비한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도 약자를 대변하고 교회의 보호를 받고자 찾아온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품었던 한국교회였다. 그러나 지금 어떠한가. 이명박 정권이 온갖 탐욕으로 나라를 망가뜨리고 박근혜 정권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정의를 조롱하는데도 거기 맞서 싸우는 이들이 지금의 한국천주교회를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하는가? 물론 그들이 오래 교회를 차지하며 많은 불편과 불이익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 이해하고 보듬으며 예의를 지키고 신뢰를 키웠던 게 지난 한국천주교회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오히려 교회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영세 받는 이들도 많았다.

민주노총의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를 선택한 것을 은연중 반겼던 교회와 사제들이 있었다는 건 알만 한 신자들이면 다 안다. 명동성당이 조용하고 깨끗하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어 행복한가? 더 이상 그런 약자들에게 교회를 내주지 않은 게 자랑스러운가? 약간의 불편과 무례와 왜곡은 어쩌면 모든 인간사의 보편적 사례다. 그 허물을 침소봉대하여 내치는 건 결국 약자를 억압하는 폭력에 가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진=한상봉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교회

갈수록 약자들은 늘어만 가는데 교회는 중산층 교회 운운하며 그들을 외면한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강남 일부는 중산층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걸 일반화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한국천주교회는 그러고 있다. 제 시대정신도 읽어내지 못하고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며 폭력(정치적 폭력뿐 아니라 경제적 폭력 등을 포함한)을 방관하는 한 교회는 존재 의미가 없다. 복음을 말로는 떠들면서도(사실 그렇게 말로 떠드는 것도 사실은 복음이 아니라 본회퍼 식으로 말하자면 ‘천박한 은총’의 말이나 마구 뿌려댈 뿐인 경우가 많다) 정작 이 시대가 읽어내고 실천해야 할 복음 정신은 외면하는 한 절대적으로 그렇다.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 풀이할 줄 모르느냐’는 예수님의 질타는 마치 지금 우리에게 던져지는 듯하다. 살인적 물대포 직사로 쓰러지고 끝내 선종한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대해서도 교회가 침묵하는 모습을 보며 절망한다. 물론 뜻있는 사제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폭력과 불의를 규탄하는 모습에서 위로는 받지만, 주교의 관을 쓰고 침묵하는 모습은 절망스럽다. 오스카 로메로 주교에는 못 미쳐도 김수환 추기경이 보였던 기개를 흉내라도 내고 있는가?

지금 정교분리 운운할 일이 아니다. 사사건건 언급할 수는 없다고 변명할 일도 아니다. 폭력과 불의에 의해 사람이 죽었다. 그런데도 입을 다물고 있다. 위기에 처할 때 어느 누구도 교회에 몸을 의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한상균이 그랬고 더 많은 한상균과 백남기가 그럴 것이다. 한국교회는 무너지고 있다.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게 안타깝고 두렵다. 교회만 바뀌어도 세상의 절반이 바뀔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할 수 있는 역할인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예언자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의 미래가, 나라의 미래가 다시 설 수 있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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