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챙기는 정동노동, 남편 챙기는 감정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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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챙기는 정동노동, 남편 챙기는 감정노동
  • 신승철
  • 승인 2016.10.2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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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상봉

[신승철 칼럼] 

자본주의, 여성의 부드러움을 탐내다

오늘 아침 아내는 저를 깨워서 현미밥과 김치찌개, 나물반찬을 같이 먹었습니다. 아내는 새벽부터 일어나 살림을 했지요. 저는 아내에게 늘 고맙고 부끄럽습니다. 능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저는 집안 살림과 가사노동의 일부만을 분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결혼 전에도 어머니의 살림과 보살핌을 당연시 여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와 어머니의 살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제가 이 글을 쓴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번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제가 최근 아내로부터 혹독한 살림수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해보니까 엄청 서투르고 익숙하지 않아서 지적을 많이 받습니다. 아내의 수제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굳히면서, 아내가 살림할 때 텔레비전 앞에서 리모컨을 클릭하던 습성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자발적으로 살림을 하기에는 모자란 면이 많습니다. 저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살림꾼입니다.

여성의 살림은 인류문명이 탄생한 이래 줄곧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초기 인류의 마음속에는 “어머니=대지=여신”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신이 생산의 여신인 ‘삼신여신’과 창조의 신인 ‘마고여신’이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의 부드럽고 섬세한 살림에 탐이 나서, 그것을 서비스노동과 감정노동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실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이유는 여성의 살림에 대해서 임금 부분을 미지급하기 때문이겠지요. 여성의 쇼핑, 요리, 세탁, 청소 등을 임금으로 환산하지 않고, 대부분 그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여성에게 맞벌이를 권장하여 슈퍼맘이 되게끔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이중적인 압박감은 살림과 경제활동을 함께 해야 하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이 사회에서 맡은 대부분의 노동이 감정노동이나 서비스노동이며 질 나쁜 일자리인 경우가 많지요.

백화점이나 마트, 대형 매장에 가면 감정노동을 하는 여성노동자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노동은 외면적으로 친절하지만, 내면적으로 감정소모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상사나 고객, 내담자 등이 모두가 여성들에게 ‘갑’인 상황이 그것입니다. 따뜻하고 부드럽던 여성들의 섬세한 마음속에 권력이 아로새겨지고, 압박감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바로 감정노동입니다. 그래서인지 감정노동의 부분을 월급명세서의 항목 중 일부로 올리고 있는 외국계기업도 많다고 합니다.

감정노동은 감정을 소진시키고 고갈시켜, 에너지가 빠져나간 지치고 텅 빈 신체의 상태를 만들어버립니다. 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딸들인 여성들이 얼마나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감정노동이 갖고 있는 화려한 가면 뒤에는 여성의 고달프고 지치고 소진된 상황이 숨어 있습니다.

사진=한상봉

사랑의 소진인가? 증폭인가?

여성의 살림은 공동체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아이들을 살리는 살림살이의 활동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정동(affection)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정동노동이라고도 말합니다. 살림은 마법과 같은 신비한 힘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힘들고 지칠 때 활력을 갖게 해주고, 흐트러진 것에 질서를 잡아주고, 음식에 맛과 향을 주고, 아이들의 울음을 그치고 웃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정동노동, 다시 말해 살림은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힘을 증폭되는 비밀을 갖고 있다고들 합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힘을 증폭시켜, 생명을 사랑하고, 우주와 자연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대지는 어머니이며 여신인 셈입니다.

그러나 살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이 대부분입니다. 살림을 아무리 해도 가족들이나 남편, 아이들은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루 종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해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눈에 띄는 것은 거의 없죠. 사실 어떤 것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유지하고 지속시키는데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물건이 가 있어야 하는 곳에 있어야 하고, 옷이나 신발이 깨끗이 세탁되어 자리 잡아야 할 곳에 있고, 책들이 책꽂이에 제대로 꽂혀 있으려면 엄청난 에너지와 일이 필요합니다. 살림살이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요술을 부른 듯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살림에 의해서 가정이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또한 살림은 반복입니다. 아침밥을 준비하고 먹고 치우면 바로 점심밥 준비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죽했으면 삼시세끼를 다 먹는 남편을 ‘삼식이’라고 할까요? 살림의 끝없는 반복은 화음과 리듬을 가진 반복일 수도 있고, 지겹고 무료하고 소진되는 반복일 수도 있습니다. 저의 아내의 경우에는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무료하고 힘든 가사 일에 화음을 부여하고 리드미컬한 반복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살림의 반복은 강건하게 가정생활을 만들어줍니다. 이러한 살림의 반복은 아침-점심-저녁의 반복, 사계절의 반복, 밀물과 썰물의 반복과 같은 자연, 생명, 우주의 반복과 공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림은 우주의 하모니와 생명의 리듬, 자연의 순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아내에게 살며시 물어보았습니다. 우리 집에서의 가사노동이 자신의 감정을 소진하는 감정노동인지, 사랑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정동노동인지 말이지요. 그 질문에 대해서 아내는 마치 무엇을 원한 것이냐는 듯 약간 감정을 실어서, 두 요소가 동시에 있겠지만 그 중 비중이 높은 것이 감정노동이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저희 집에는 한때는 길냥이였던 고양이 두 마리가 있는데, 아내 얘기에 따르면 고양이를 챙기는 것은 정동노동이고, 저를 챙기는 것은 감정노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더 잘 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런 한편으로 고양이들에게 경쟁심도 느껴졌습니다. 아마 많은 여성들이 살림에 대해서 제 아내와 비슷한 의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한상봉

살림과 경제의 분열

살림(Oikos)은 공동체를 살리고, 아이를 돌보고, 장애인을 보살피고, 노인을 모시고, 조상신이나 신을 섬기는 것 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살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살림을 어원으로 하는 오이코스로부터 경제(economy)가 유래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경제와 살림을 분리시킴으로써, 가정생활이나 살림살이를 경제적인 영역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살림으로 해결했던 부분은 이제 경제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이를 테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이제 유치원과 공동육아시설 등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살림의 돌봄, 보살핌, 모심, 섬김 등이 했던 영역을 이제 사회서비스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사람과 자연, 생명을 살리는 살림은 이제 자본주의 상품이나 공공부문이나 서비스노동, 감정노동의 부문이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소 복잡합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라는 면에서 살림으로부터 여성은 벗어날 필요가 있고, 사회서비스가 여성의 살림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도 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회서비스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바로 대부분 여성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보니 한 여성의 정동노동이 다른 여성의 감정노동으로 대체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각 경우의 여성은 다른 인물들이겠지만, 여성 전반으로 보았을 때 굉장히 여성의 입장에서 불리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자신의 아이들을 학원에 맡기고 돌봄을 받게 하기 위해서, 바로 그 아이의 어머니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특히 여성의 감정노동, 서비스노동, 돌봄노동이 저임금노동, 불안정노동이라는 점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성이 살림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맞벌이가 일상화된 현 시점에서 남성과 함께 살림을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사노동에 소홀한 남편들에서 요리와 세탁과 청소를 잘 하는 남편으로 사회트랜드가 넘어가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제 막 살림의 초년생이지만, 아내의 불만은 시키는 일은 잘 하지만 알아서 잘 하지는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저의 경우에는 집에 들어가면 막상 어떤 살림을 먼저 해야 하는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멍해진 느낌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늘 아내에게 꾸중을 듣는 모습이 마치 초등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지적받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어찌 보면 아내는 살림 영역에서는 영원한 사부이며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여성에게 기본소득을!

이런 면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여성의 살림에 대한 사회공공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공공부문과 사회서비스가 해야 할 일을 민간과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공동체가 나서서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공공부문이 힘을 실어줬을 때야 현실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지급을!”이라는 이탈리아 여성운동가들의 슬로건처럼,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기본소득을 주어야 한다는 담론이 활성화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살림이 여성의 희생이나 이중착취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랑할수록 사랑이 증폭되는 정동노동의 장점을 사회가 받아 안아야 할 것입니다. 사회에서 인정되고 있는 모권보호나 여성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살림의 가치를 온건히 인정해주는 사회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복잡한 제도와 장치를 필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살림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지름길입니다.

살림은 잘 보이지 않고 늘 반복되며 여성에게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족을 자본주의 재생산의 기본세포단위로 전락시키는 것은 바로 여성의 살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에 있습니다. 가족이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가족구성원 모두가 살림에 참여하고, 함께 리듬과 화음을 만들어내고, 재미있고 유쾌한 공동체 활동으로 변모시키는데 있습니다. 물론 공동체가 된 가족에서 여성의 역할은 살림의 총감독이자 코디네이터겠지요. 제가 아직 살림에서는 초짜다보니, 아직 배우고 느끼고 실천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하나하나 배우다보면 살림의 고수가 되어 사랑을 할수록 사랑이 증폭되는 미세한 정동의 흐름을 알게 될 날이 있겠지요.

오늘 아침에 아내와 함께 손을 잡고 제 연구실인 <철학공방 별난>을 향해 같이 걸어갔습니다. 살림과 글쓰기 작업을 함께 하고 있는 아내의 거친 손과 아직 살림으로 단련되어 있지 않아 뽀송뽀송한 저의 손이 비교가 되었습니다. 살림은 생명을 살려내는 보이지 않는 들숨날숨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늘 숨은 반복되지만, 그것의 중요성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 사회의 공동체와 아이와 노인, 장애인, 동물 등을 살려내는 여성의 보이지 않는 살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어머니=대지=여신”의 오래된 인류의 사유방식에서 지혜를 배웁니다. 사랑할수록 사랑이 증폭된다는 진실은 살림의 진실이기에, 살림은 세상을 재창조하고 생명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원천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승철 바오로
동물보호 무크지 <숨>에서 동물권에 대한 공부 시작.
문래동 예술촌에 연구공간 ‘철학공방 별난’ 운영.
<마트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들>, <철학, 생태에 눈뜨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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