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당신의 하느님은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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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당신의 하느님은 우상이다
  • 한상봉
  • 승인 2016.10.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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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 프란치스코는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돈’을 새로운 우상이라고 말했다. 교종은 경제성장이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는 낙수효과 이론을 먼저 비판했다. 이러한 경제질서는 ‘무관심의 세계화’를 만들어 내고, 결국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생활양식을 뿌리내리게 한다.

교종은 신자유주의가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의 고통스러운 절규 앞에서 함께 아파할 줄 모르고 다른 이들의 고통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그들을 도울 필요마저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54항)고 지적하면서 ‘돈에 대한 물신주의’를 비판했다. 물신주의는 ‘비인간적 경제독재’의 결과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인 ‘유대전쟁’은 돈에 대한 로마인들의 탐욕이 불러 온 것이었다. 기원후 64년, 유다에 새로 부임한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유다의 재산을 울궈 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보물을 직접 거두어 가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성전을 지키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몰려왔고, 총독의 군대는 3천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유대인 통치자 아그리파 2세 역시 그네들의 편을 들었다.

더 고결한 자유를 향한 열망에 부푼, 셀 수 없이 많은 민족들이 로마인들에게 복종했습니다. 그런데 우주가 다 복종하는 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입니까? ... 하느님의 도움을 믿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 역시 로마인들의 편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없다면, 그런 하나의 제국을 세우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원 후 70년, 유대전쟁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벽 기슭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 성 안에는 굶주림으로 떠는 사람 천지였으니, 하루는 사람들이 자기 아기를 굽고 있는 여인을 현장에서 잡은 적도 있었다. 결국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로마 군대에 의해 참살당했으며, 성전은 약탈당하고 불타올랐다. 살아남은 자들은 검투사들의 경기를 위해 로마에 보내졌고, 나머지는 노예 시장에 팔려 나갔다. 그 후 로마 황제의 사유지가 된 유다에서는 ‘정복된 유대’라는 글귀가 새겨진 기념주화가 발행되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숱한 목숨을 앗아 간 로마제국이 ‘돈’에 기념사를 박아 넣은 것이다.

잠들지 않는 자본의 태평천국

자본의 질서는 군대처럼 일사불란한 메커니즘에 의해 운영된다. 이는 인간의 질서를 넘어서는 자율적 구조이다. 자본과 황제는 같은 지위를 얻는다. 아리스티데스가 로마의 지배 체제를 두고 “오직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사신들과 대신들을 자기 휘하에 두며 모든 것을 혼란이나 자극 없이 조용히 관철시킨다면, 그 어떤 질투도 존재하지 않으며 도처에서 정의와 존경심이 지배하고 모든 사람이 일한 만큼의 몫을 받게 된다.” 하였지만, 오늘날 이러한 놀라운 현실을 창조해 내는 힘은 ‘자본’에 있다.

로마에서 황제는 제국에 우선하고, 제국은 자신의 우두머리인 황제만을 바라보고, 모든 명령권은 다시금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처럼 오늘날 자본은 나라와 국경과 인종과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만사만물을 지배하는 원리가 돈과 자본에서 비롯된다. 그 대행자가 기업이든 금융 기관이든 어느 투자가이든지 ‘돈’이 중심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로마제국의 소원이 ‘황제 만세’였듯이, 오늘날 자산가들의 소원은 ‘자본 만세’이다. 그러나 돈의 혜택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요절’할 운명이다.

철학자 세네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잠들어 있는 모든 인간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고, 모든 인간의 평안을 위해 긴장해 있으며, 모든 인간의 안락을 위해 힘들게 일한다. 황제는 이 땅에 현신한 이후 자기 자신을 포기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는 천체의 별들과 같이, 한곳에 머무르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오늘날 금융과 자본을 다루는 빌딩가의 형광등 불빛은 꺼질 줄을 모르고 밤을 밝힌다. 그리고 그들이 내쏘는 빛 때문에 사그라진 도시의 어둠은 돈 없는 불행한 중생의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이들 자본의 황군(皇軍)들은 언제나 유토피아를 광고한다. 그리고 이에 도전하지 않는 체제를 ‘평화’라 부른다. ‘자본의 태평천국’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말 뒤에는 엄청난 그림자가 깔려 있다. 자본에 복종하든가, 아니면 죽음을 예비해야 한다. 브리타니아의 칼가쿠스 장군은 로마에 맞서 적절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로마에) 복종하고 충성함으로써 그들의 거만한 폭력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계의 강도들은 땅에서 노획할 것이 더 나오지 않으면 바다까지도 샅샅이 뒤진다. 적이 부자이면 그들에게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적이 가난하면 그들은 명예욕을 내세운다. 그들은 동양이나 서양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부와 가난을 동시에 열망한다. 그들은 약탈, 살인, 강도질에 ‘지배’라는 잘못된 이름을 붙였다.

그들은 세상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누구에게나 가족은 가장 소중한 법인데, 그들은 우리한테서 어린 아이와 가족들을 빼앗아 다른 곳에 노예로 팔았다. 우리의 처와 자매들은 친구와 손님임을 자처하는 자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소유물은 세금이 되었고, 땅의 결실들은 곡물세가 되었으며, 우리의 몸과 손은 채찍과 욕설이 춤추는 도로 작업장에서 갈갈이 찢겨졌다. 노예로 태어난 자들은 다시 한 번 팔려 나가 그들의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자란다."

맘몬에 저항하는 하느님

이와 정반대의 진영에 계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군대의 깃발 대신에 십자가를 들고 이른바 ‘맘몬’으로 상징되는 황제와 자본의 세력에 대항하는 영적 싸움을 지속한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다.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자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마태 25,42)라고. 이 말씀을 듣고도 꿈쩍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무쇠 같은 심장인가? 그대들의 주님께서 저기 계시다. 그분께서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그대들은 폭식을 하고 있다. 끔찍한 일은 이것뿐이 아니다. 그대들은 폭식을 하면서 말없이 그분을 경멸한다. 그분께서 그대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아주 적은 양이다. 굶주림을 달랠 수 있는 빵 한 조각이다. 그분이 저기 계신다. 그분이 추위로 죽어 가는데 그대들은 비단옷을 입고 그분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동정도 보이지 않으면서 무자비하게 제 갈 길을 간다. 이 같은 행동이 어찌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쓰레기더미에서 울고 계시는” 예수를 외면케 하는 것이 맘몬의 힘이다. 예수는 맘몬이 하느님과 양립할 수 없다고 천명하신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루카 16,13). 맘몬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일그러뜨리기 때문이다. “죄 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기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넘긴다”(아모 2,6).

이렇게 돈 또는 맘몬은 하느님의 정의와 하느님의 자비를 거스른다. “은전 서른 닢 때문에” 유다는 예수를 팔아 넘겼고, 부활의 기적을 보고 깜짝 놀란 병정들은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많은 돈을 받았다. 그러므로 카이사르의 것(돈)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진실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복종은 하느님께 돌리라고 예수는 권고한다(마태 22,31).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

아울러 사도들은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1 디모 6,10)라고 일갈하고 있으며, 구약 전체를 통하여 초대 교회에서까지 고리 대금업과 이자놀이는 사람들을 노예 상태로 떨어뜨리는 까닭에 단죄받았다. 야고보 사도는 더욱 강력하게 호소한다.

“부자들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당신들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을 생각하고 울며 통곡하십시오. 당신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 많은 옷가지들은 좀먹어 버렸습니다. 당신들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고, 그 녹은 장차 당신들을 고발할 증거가 되며, 불과 같이 당신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와 같은 말세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잘 들으시오. 당신들은 당신들의 밭에서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 챘습니다. 그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야고보 5,14).

오죽하면 야고보 사도가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야고보 4,4)라고 말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돈(자본)을 장악하고 돈으로 돈 먹기를 하려는 다국적 기업, 국제 금융 그리고 우리의 탐욕적 세계관은 복음 앞에서 단죄받는다. 하느님 나라에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이런 포악한 자들을 힘으로 휘어잡으시리니, 한번 일어나시면 그들의 생명은 안개같이 사라지리라. 배를 퉁기며 살도록 내버려 두셔도 실상은 그의 걸음을 낱낱이 헤아리신다네. 물거품 같은 영화는 지나가서 자취도 없게 되고, 찐 나물처럼 쓰러져 뽑히고, 이삭처럼 잘려 버릴 것일세”(욥 24,22-24).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 이런 상황 한가운데서 우리네 삶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자문해 볼 차례다.

이미 우리 마음의 모래톱은 탐욕적 세계관에 깊숙이 깎여 내려갔다. 공공연한 맘몬의 화신化身뿐 아니라, 가난의 현재 진행형이자 잠재적 탐욕의 화신들이 들끓는 것이 이 세상의 참상이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울게 마련이다. 만개한 자본주의 꽃은 그 빛이 현란할수록 목숨을 마감할 때가 가까이 왔음을 깨달아야 한다. 육신의 따스함보다는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 속에서 신운神韻을 읽으려 했던 시인의 마음이 고해苦海에 징검다리를 놓을 것이다.

"내 언제고 지나치는 길가에 한 그루 남아 선 노송(老松) 있어 바람 있음을 조금도 깨달을 수 없는 날씨에도 아무렇게나 뻗어 높이 치어든 그 검은 가지는 추추히 탄식하듯 울고 있어, 내 항상 그 아래 한때를 머물러 아득히 생각을 그 소리 따라 천애(天涯)에 노닐기를 즐겨 하였거니, 하룻날 다시 와서 그 나무 이미 무참히도 베어 넘겨졌음을 보았나니.

진실로 현실은 이 한 그루 나무 그늘을 길가에 세워 바람에 울리느니보다 빠개어 육신의 더움을 취함에 미치지 못하겠거늘, 내 애석하여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에 올려 보았으나, 그러나 어찌 나의 손바닥에 그 유현(幽玄)한 솔바람 소리 생길 리 있으랴.

그러나 나의 머리 위, 저 묘막(渺漠)한 천공(天空)에 시방도 오고 가는 신운(神韻)이 없음이 아닐지니 오직 그를 증거할 선(善)한 나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_ 유치환, 선한 나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행동하는 사랑, 한상봉, 리북출판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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