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도라지, 백민주화 인터뷰] “아빠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서 미안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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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라지, 백민주화 인터뷰] “아빠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해서 미안하대요”
  • 백승호
  • 승인 2016.10.10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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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임마누엘 선생은 자녀의 이름을 ‘백도라지, 백두산, 백민주화’라고 지었다. 도라지는 민중을, 백두산은 통일을, 민주화는 말 그대로 민주화를 의미한다. 나라와 사람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듬뿍 묻어난다. 백승호 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자녀들은 “이제 아버지의 역사를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버지를 기념하려는 게 아니라, “비록 불의한 역사였지만 제 몸 사리지 않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어른들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백남기 농민 추모제에 참석한 백민주화 씨. 사진=한상봉

민주화 운동에 참 열정적이셨는데...

= (아버지는) 유신헌법 이후로는 계속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셨어요. 학교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하다가 결국 학교에선 제적됐죠. 아빠가 주동자니까 경찰은 아빠 잡겠다고 수배를 내리고, 아빠는 그거 피하려고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계셨어요. 그게 7년이 될 줄은 몰랐죠. 명동성당에 2년쯤 숨어계시다가 가톨릭에 귀의하시고, 이후 갈멜수녀원으로 옮겨 잡부 생활도 하고 수도사 생활도 하고 그러셨어요. 1980년, 박정희 죽고 나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시기가 있었잖아요. 그때 학교로 돌아가서 다시 운동을 시작하신 거죠.

1980년도에 학교에 복교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신 게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이셨어요. 장례식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데 상여 만들 줄 아는 촌놈이 아빠밖에 없었대요. 상여 만들고 시위를 시작했는데 전두환이 학교로 탱크를 몰고 온 거죠. 시위 주도한 사람들이 기숙사에 모여 있었는데 후배가 아빠한테 그랬대요. “이거 느낌이 안 좋다. 일단 도망가자.” 그런데 아버지는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냐, 내가 왜 도망가느냐.”고 말하고 거기 남아계셨고, 결국 군인들한테 끌려갔죠.

우리한테 그 이야기는 자세히는 안 해 주셨는데, 그때 고문도 많이 받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중학교 들어갔을 때쯤 아빠한테 고문 후유증이 찾아왔어요. 허리가 너무 아프신데, 병원을 아무리 찾아 다녀도 원인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다리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어요. 아마 신경에 문제가 있었나 봐요. 그래서 한동안 걷지도 못하셨죠. 매일 밤마다 온찜질 해드리고, 수지침 놔드리고 했죠. 그때가 95년도쯤이었어요.

그 이후엔 일을 하다가도 몸에 무리가 생기면 바로 휴식을 취하셨어요. 한 번 심하게 아프셨으니까. 주변에서 후유증으로 고생이니 나라에 보상금이라도 신청하라고 하면 한사코 거부하셨어요. “같이 운동한 친구 중에 죽은 녀석도 있고 또 몸은 안 상했어도 정신적으로 상처 입어서 고통 받는 사람들도 있는데, 얘네들은 보상금 못 받는다. 근데 내가 무슨 염치로 그 돈을 받느냐. 산 사람은 말이 없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고향인 보성으로 돌아가셨을 때 생활은 어떠셨나요?

= 그냥 평범한 농부였죠. 아빠는 원래 사람 엄청 좋아하고 욕심도 없는 사람이에요. 왜 대학생들 농활 오잖아요? 사실 농촌에서는 농활을 반기지 않아요. 농번기라 바쁜데 대학생들 와봤자 큰 도움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아빠는 농활대 오면 그렇게 잘해주셨어요. 맨날 밥해 먹이고, 술 사주고,이야기 나누고. 워낙 사람 좋고, 앞장서서 힘든 일 해결하고 나서니까 사람들이 이장 한번 해보라고 했대요.

그 당시에 이장은 나라에서 임명했었는데... 처음에 아빠는 손사래를 쳤죠. 아빠는 원래 부끄럼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하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막 “내가 이장할 거야~” 하고 욕심 부리시는 분은 아니셨어요. 자리 욕심 같은 건 없으시고 오히려 사양하시는 분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하도 아빠가 이장해야 한다고 하니까 정 그러면 투표로 뽑자고 하고 뽑히신 거죠.

Kathe Kollwitz

아버지는 그날 왜 집회에 나가셨나요?

= 아빠는 농민이잖아요. 농민들이 먹고살기 힘드니까 나가셨어요. 쌀 한 가마니에 15만 원도 안 돼요. 이렇게 팔면 기본적인 생활조차 힘들어져요. 문제점이 심각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쌀값을 17만 원에서 21만 원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더 떨어졌죠. 대통령한테 공약 지키라고 말하려고 나간 거였어요. 농민들 이러다 다 굶어 죽는다고. 그래서 나간 건데... (울음)... 그날 아침으로 되돌리고 싶어요. 아빠 저렇게 되기 전날로...

솔직히 아빠가 너무 불쌍해요. 왜 그 추운 날 그 자리까지 나가셔서 그렇게 싸우셔야 했나. 저렇게 평생을 바쳐서 싸우고 누워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잖아요. 아빠가 누가 알아달라고 나서신 건 아니지만 그만큼 힘들게 싸우셨으면 인제 그만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도 되는 거잖아요. 딸의 입장에서는 그래요. ‘아빠는 대의를 위해 싸우셨다’ 그런 이야기 말고 그냥 아빠로서 할아버지로서 그렇게 자기 삶 즐기다 가셔도 되는 거잖아요.

아빠가 저렇게 된 것도 안쓰러운데, 아빠가 평생을 바쳐 싸워온 세상이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게 너무 화가 나요. 그런데도 아빠는 자기가 미안하대요. 자기가 그렇게 나섰던 건 내 자녀들이, 후손들이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어서 그렇게 싸워왔던 건데 지금 보니 달라진 게 없어서 너무 미안하대요. 어떻게 인생이 그래요. 너무 불쌍하잖아요. 이렇게 쓰러진 거 보니까 너무 허망하잖아요. 그렇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지도 않잖아요. 우리 아빤 저렇게 누워있는데...

딸로서 더더욱 안타까움이 클 것 같아요.

=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겨우 버티고 있어요. 그런데 안 그런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오늘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님이 그러는 거예요. “그 백남기 그 사람 너무 아니지 않아요?” 옆에 같이 탔던 삼촌이 화가 나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35년 동안 시골에서 농사만 지었던 분이라고 답하니까 택시기사가 “아니 티비에서 보니까 평생 데모꾼으로 살았더구만, 손님들도 다 그 사람 폭도라고 하던데.”라고 말하시더라고요.

어쩌면 같은 세상을 사는데 이렇게 정반대로 생각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들이 이렇게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워지더라고요. 너무 이해가 안 돼요. 폭도고 데모꾼이면 죽여도 된다는 거에요? 죽어도 싼 거에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너무 이해가 안 돼요. 죽어도 싼 사람은 없잖아요. 누구의 목숨도 그렇게 가벼이 여기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인터뷰 출처/ 백승호, <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6년 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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