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말, 바보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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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말, 바보 평신도
  • 김유철
  • 승인 2016.10.1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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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의 Heaven's door] 

‘불온서적’ 120종 177권

19세기가 시작되는 1801년의 일이다. 조선임금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즉위한 다음 해인 1801년 천주교는 사교(邪敎)로 지목되어 수많은 이가 참수형 등으로 생명을 잃었다. 천주교인들은 이 일을 신유박해, 신유교난이라 불렀고, 당시의 기록자들은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 적었다. 그 때 기록자들이 지목한 천주교관련 금서(禁書)가 120종 177권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책이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것으로 알고 불태우고 파묻는다. 그러나 책은 책일 뿐 언제나 진실은 책 너머에서 스멀스멀 움직였다.

16세기 이후 이런저런 경로를 통하여 들어온 많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안에는 천주교와 관련된 책이 들어있었다. 교회공동체를 형성한 1784년 이후 불과 10년이 안 되는 동안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명례방공동체의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과 이승훈‧정약용이 관련된 정미반회사건(1787년), 윤지충‧권상연의 진산사건(1791년)을 거쳤다. 천주교인이란 단 하나의 이유로 ‘참수’와 ‘유배’가 기다리던 그 모든 일을 조선천주교 평신도공동체는 이른바 ‘외부세력’인 선교사와 성직자 없이 겪어냈다.

‘불온서적’ 중 한글서적 83종 111권

조선 땅의 사람들을 위해 처음으로 들어온 중국인 주문모신부는 1795년 1월 한양에 도착했다. 물론 주 신부가 들어 온 것은 평신도성직제도(가성직, 假聖職이란 용어와 대비되는 방상근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의 용어)에 대한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의 금지령(1790년)과 성직자 파견을 요청한 평신도 이승훈‧윤유일에 대한 응답이었다. 1801년 수렴청정 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사학금지령 이후 신유년 박해가 시작되면서 철퇴를 맞은 천주교 불온서적 120종 177권 중 83종 111권은 놀랍게도 언문이라 불리던 한글서적이었다.

성인 정하상의 아버지 정약종은 한글로 된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이자 호교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했고, 역관출신 최창현은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디아즈의 <성경직해>와 마이야의 <성경광익>을 발췌해 <성경직해광익>을 한글로 편찬하였고, 이를 목판본이 나오기 전에는 손으로 써서 보급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의 교리이자 하늘의 도리를 쉽게 민중들에게 알리려는 평신도 지도자들의 노력은 이미 공동체 창립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천주교회의 시발점이 된 천진암‧주어사 강학회 지도자이자 구성원이었던 이벽과 정약전 등은 당시 양반, 여인, 평민 모두에게 전파력이 큰 4·4조 운율의 가사(歌辭)로서 천주교의 교리를 전하려 했다. 그것이 지금도 전래되는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이다. 물론 언문, 즉 한글이다.

‘주님의 기도’는 한글 천시로 번역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대표적 기도문 ‘주님의 기도’(당시 '텬쥬경')에 대한 한글본 사료는 좀 의아스러운 구석이 있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역서학서 중 수많은 천주교 관련서적을 한글로 옮기거나 주문모 신부도 그 내용과 구성에 대해서 놀라움을 표했다는 한글로 편찬한 정약종의 <주교요지>가 있을 정도 인데 가장 기본이 되는 ‘주님의 기도’는 왜 한글로 옮기지 않았을까?

참고로 신유박해 당시 번역 보급된 한글교리서를 살펴보면 <고해요리>, <고해성찬>, <교요서론>, <성교천설>, <성세추요>, <성체문답>, <요리문답>, <천주교요>, <천주십계>, <삼문답> 등이다. 아울러 십계명의 경우는 전체 신자의 2/3가 외울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 (<한국천주교회사 1> 331쪽 참조>)

그런데 유독 ‘주님의 기도’만 “在天我等父者 我等願爾名見聖 爾國臨格 爾旨承行於地 如於天焉 我等望爾 今日與我 我日用糧 而免我債 如我亦免負我債者 又不我許陷於誘感 乃救我於凶惡 亞孟 재쳔아등부쟈 아등원이명견성 이국임격 이지승행어지 여어천언 아등망이 금일여아 아일용양 이면아채 여아역면부아채자 우불아허함어유감 내구아어흉악 아맹)”의 형태로 이어졌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일까?

평신도는 바보가 아니다

제2대 조선교구장을 역임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앵베르 주교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 신자들은 천주교를 받아들인 그 시초부터 방언(한글)을 천시하는 관습에 따라 천주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그렇게 합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문 서적을 번역하는데 한자의 음만 따져 번역했지 그 뜻을 따라 번역하지 않고 사용했으며, 따라서 무엇을 기도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1838년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그 당시의 상황을 전한 교계 언론 역시 “이는 한글을 천시하는 풍조에 따라 뜻풀이를 하지 않은 채 한문 기도문을 그대로 한글로 읽기만 한 것이다. 때문에 한문을 이해하는 지식인층만 그 뜻을 알 수 있었고 한문을 이해하지 못한 대다수 서민과 부녀자들은 뜻도 모른 채 그저 입으로 기도를 바치기만 했다.”고 보도했다.(<평화신문> 2008년6월29일 12면)

그러나 이 같은 일들은 1837년 12월 31일 한양에 입경한 앵베르 주교의 조선 천주교인에 대한 너무 이른 판단이었고, 170여 년 전의 성직자 말을 사료 비판 없이 “마땅하고 옳습니다”라고 여기는 교계신문의 일방적 보도관점은 문제가 있다. 이것은 서적전교로서 조선천주교 공동체를 시작하고 목숨으로 지켜 온 것에 대한 무지이며 평신도를 가리켜 ‘아멘바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기 37년 전인 1801년 압수된 천주교 불온서적 120종 177권 중 83종 111권이 한글서적이었다.

아니, 평신도는 ‘바보’다

주기도문이 한글본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사료의 존재가 규명하겠지만 혹여 초기 천주교인들이 한글로 풀이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한글 천시’라는 단 하나의 이유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21세기 한국천주교회가 부활대축일에 목매여 부르는 대영광송 ‘글로오오오리아 인 엑셀시스 데오’를 지금도 여전히 한글 천시의 개념으로 천주교인들은 라틴어로 부르는 것인가? 수도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부르는 그레고리안 라틴어 성가가 한글을 천시하기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가?

‘바보’라는 호칭이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지만 넘을 수 없는 존경의 대상으로 불렀던 기억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런 삶과 사람들이 있었다. 옮겨지지 않는 산을 탓하지 않고 그 산을 옮기는 믿음이 부족함을 알고 조용히 물러서는 그런 의미에서 그래, 평신도는 바보다.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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