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서 신부 "금수저만 이웃인 조직폭력배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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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서 신부 "금수저만 이웃인 조직폭력배의 나라"
  • 이강서 신부
  • 승인 2016.10.05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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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광화문 시국기도회 강론: 이강서 신부_ 서울교구 삼양동선교본당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의 질문은 역사적 획을 그은 중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신앙생활의 요체, 그리고 신앙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이란, 영원한 행복, 궁극적인 구원을 말한다. 그래서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물음은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이강서 신부

주목할 부분은 질문자가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어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율법학자였고, 그것은 그 당시 배우고 익힌 대로 살아가는 존경받는 신앙인, 성실한 지식인, 모범적인 시민이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은 오늘 복음 이외에 한 번 더 복음서에 등장한다. 그곳에서 질문자는 율법학자가 아닌 부유한 권력자(루가 18,18), 또는 부자 청년(마태 19,22: 마르 10,22)으로 언급되는 사람인데 그 역시 아쉬울 것 없는 기득권자요, 뭇사람의 부러움을 받던 예수님 시대의 금수저였던 인물이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선 오늘 율법학자의 질문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물음이었다 점을 기억하자. 율법학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유대교의 핵심 계명을 잘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율법학자의 본심은 예수님의 답변을 자신의 지식과 견주어 저울질해보는 것이었다. 

계명의 본질은 사랑이다. 하느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은 구별될지언정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1서에서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4,20)라고 경고하고 있다. 

나아가서 스승께서는 열두 제자들과 나눈 고별 담화에서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해 최종적으로 이렇게 정리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에는 차등과 단계가 없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하느님 사랑이 먼저고 그 다음 이웃 사랑이라는 순서도 성립하지 않는다. 또는 하느님 사랑이 있어야 이웃사랑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분법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잘라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사랑은 단일하며 무엇으로도 나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본인이 인정하든 아니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랑이다.

사진=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헌신적으로 사랑해야할 이웃이 누구란 말인가. 이 질문 역시 당사자인 율법학자는 자기가 사랑해야할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웃이란 자명하고 상식적인 범주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여기듯이 이웃이란, 같은 민족이 아니라도 사상과 신념에서, 종교와 신심에서, 생활수준과 교양 정도에서, 친분과 인연이 있는 사람, 심리적이고 공간적인 거리가 가까운 사람들이다. 

예수님 시대에 이 이웃이라는 울타리 외곽에는 인간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은 없다고 간주되었다. 그 사람들은 종종 개와 짐승으로 언급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당시 로마인을 비롯한 이방인들, 사마리아 사람들과 비유다인, 세리와 창녀들, 나병환자들과 병자들, 장애자들, 가난한 이들, 율법의 죄인들이었다. 

이렇게 율법학자의 질문에는 교활한 알리바이가 담겨 있다. 나아가 이웃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짐짓 정당하다는 동의와 칭찬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편협하고 위선적인 율법학자의 자세는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영성가, 사목자, 수도자, 신심 깊다는 신앙인의 태도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조금 비약해서 대비해 보자면, 그것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이 나라에 적지 않은 국민이 자기와 입장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국민으로 매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고용된 고위 관료와 공직자, 공무원 중에는 자기 입맛에 따라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소위 전문시위꾼,테러리스트, 종북세력, 좌빨이라고 준범죄자 취급을 하고, 심지어 국가의 주인 대다수 시민을 개· 돼지라 취급하는 일조차 일상이 되어 버린 나라에 살기 때문이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절묘하다. 예수님은 그 답을 스스로 얻도록 되묻는다. 답변으로서 비유는 사랑해야할 이웃이란 우리 입맛에 맞는 통상적 의미의 이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웃은 폭력과 불의의 희생자, 고통받는 피해자, 가난한 사람, 타인의 도움이 절박한 약자, 그들이 바로 하느님이 요청하는 사랑의 수혜자, 이웃이라는 가르침이다. 그 이웃은 각종 친분과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이익집단으로서 이웃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 때문에 발생한 이타적 공동체로서 이웃인 것이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초주검이 되어 길바닥에 널부러진 어떤 사람,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고 되묻는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 시대를 여전히 관통하고 있다. 아울러 이 질문은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국가와 정부의 책임있는 당국자에게까지 확장되는 물음이기도 하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리는 비유의 주인공,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요, 사랑의 이중계명인 이웃 사랑을 충실히 수행하는 참 신앙인이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정치제도 안에서 국가의 존재이유, 국가운영의 주체인 정권의 사명과 책임, 공직자를 비롯한 공무원과 관료의 책무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주체이자 주인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 그리고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하고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일련의 활동을 그 책무로 삼고 있다. 한마디로 국가는 집합적으로 제도화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한 국가의 실패는 지켜주지 못한 국민의 숫자에 있다. 그 숫자는 만 명, 천 명이 아니라 나라가 지켜주어야 할 국민 한 사람의 생명에 있다. 지난 일은 잠시 접어두고, 이 정권은 지난 902일전 세월호의 304명을 어떻게 살리지 않았는지, 또 325일 전 보성의 노인인 고 백남기 임마누엘 농부를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명백한 국가의 실패, 정권의 실패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위임한 권력과 힘이 도리어 강도의 무기가 되어 국민을 강탈하고 초주검이 되도록 조지는 이 나라, 이 정권은 날강도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 없는 참 나쁜 나라일 뿐이다.

사진=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누가 우리의 구원자인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느님에게 있다. 이 말은 구원이란 자기의 힘, 권위, 재산, 능력, 직위에 있지 않고 오로지 내 뜻이 미치지 않는 영원한 타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거울처럼 자신을 발견할 타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타자는 성경의 표현으로는 하느님과 이웃이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타자의 표상이고, 이웃은 우리에게 포착된 구체적 타자인 것이다. 결국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은 나의 구원자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내용이 같아진다.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누가 나의 구원자인 이웃인가, 힘과 능력이 뛰어난 해결사 이웃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라고 한 최후 심판의 선언처럼,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 널부러져 있는 그 폭력의 피해자, 그 무력하게 널부러진 이가 바로 우리의 이웃이자, 구원자라고 우리는 고백하는 것이다.

국가와 정부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존립과 정권의 성공은 핵무장과 고고도미사일 방어시스템(사드), 군비증강과 한 줌도 안되는 최상위 부유층과 기득권자들의 풍요와 안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성공은 궁극적으로 가장 약하고 힘없는 사람의 존엄한 기본권을 지켜주는 것이고 다시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지 않도록 끝내 지키고 예방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국가와 정부의 입장에서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국민이 이 나라의 구원자요, 이 정권의 구세주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다.

다시 하늘이 열리기를 염원하는 후천개벽 개천절

단기 4349년 개천절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께서 하늘을 열고 지상으로 내려온 사건, 곧 지상이 하늘처럼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 웅대한 꿈을 기억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기념일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백성을 크게 이롭게 한다는 그 웅대한 홍익인간의 꿈은 이제 오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구조를 간절히 바랬던 제 국민 304명을 바다에 수장하고, 정의를 외쳤던 힘없는 농부를 물대포로 쏘아 죽이는 나라, 국가경제의 소중한 자원인 노동자들을 재갈 물리고 노예로 삼으며 국민 대다수를 개· 돼지 가축정도로 여기는 정권, 대다수 국민들이 스스로 흙수저로 비하하는 이 나라는 하늘을 열고 하늘과 제일 가까운 행복한 나라가 아니라 닫힌 하늘과 암흑뿐인 지옥, 헬조선이라 회자될 뿐이다. 

그러니 이제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이사야 63,19) 하고 기도한 것처럼, 새롭게 하늘이 열리고 이 땅이 새롭게 되도록 우리 신앙인의 역할을 다짐하자. 그래서 묵시록에서 요한이 "그 뒤에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묵시록 21,1) 라고 언급한 것처럼 어둠과 죽음의 헬조선을 뒤엎고 새 나라,새 세상, 새 하늘을 우리가 열어가자. 그것은 백성이 하늘이고,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우리가 배웠기 때문이다. 아멘.

이강서 신부_ 서울교구 삼양동선교본당

<출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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