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궁궐에 숨어 있는 교구장 주교가 만인지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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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에 숨어 있는 교구장 주교가 만인지상인가?
  • 한상봉
  • 승인 2016.10.0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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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콩가르를 다시 읽는다 2

[한상봉]

프란치스코 교종을 떠올리면 반갑고도 씁쓸한 복합적 감정에 휩싸인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조해 왔고, 사실상 지금도 그렇다. ‘개혁’ 교황의 등장은 가톨릭교회에 참신한 바람을 불러 온 것이 사실이다. 요한 23세 교종에서 시작된 개혁의 바람이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1세를 거쳐, 숨 막히는 잃어버린 30년을 거치고 나서, 다시 교회 안에 불고 있기 때문이다.

주교 등 성직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결집하라고 촉구해 왔던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종이 강요했던 수직주의에 가장 실제로 저항해 왔던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기초공동체였으며, ‘아래로부터 탄생하는 교회’를 부르짖던 레오나르도 보프가 교황청의 심문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수평주의’는 ‘사실상’ 억압되었다. 이 억압을 풀고 교황이 먼저 신자들에게 축복을 청하는 시대가 왔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종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조차도 결국 누가 교황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슬픔이다. 한 사람의 성향과 노선과 사목정책이 전체 교회의 향방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지역교회에서는 교구장 주교가 만인지상(萬人之上)이다. 주교직이 ‘봉사 직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최고 권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주교와 공동체가 결합되는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가톨릭교회는 교구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뜬금없는 사제가 교구장으로 임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교구장에 ‘착좌’하면 그분의 말씀이 곧 법이 된다, 중세기의 영주처럼.

사진=한상봉(이 사진은 칼럼 내용과 직접 상관없음)

주교 혼자 결정할 수 없다

이브 콩가르는 <봉사하는 교회 가난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가톨릭출판사, 1974) 2장에서 교회 권위의 역사적 발전을 다루면서, 고대교회부터 교부 히폴리투스와 오리게네스가 말한 것처럼 주교(主敎)를 ‘군주(君主)’로 불러 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여기서 ‘군주’로서의 주교는 지금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초기교회는 ‘회중(會衆, congregation)’이라는 뜻의 신앙공동체, 즉 에클레시아(ecclesia)였다. 따라서 교부 치프리아노는 “교회는 주교와 일치한 백성, 그 목자와 결합되어 있는 무리다. 이 때문에 주교는 교회 안에 있으며, 교회는 주교 안에 있다.”고 말했다.

교회는 사랑과 일치, 기도와 회개에 의한 영적 어머니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가운데 여전히 머무신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형제들의 집회였다. 그래서 가톨릭전례에서 ‘우리’와 분리된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공동체의 어른이 주교이며, 이 주교는 교회 구성원들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교회를 대표한다. 그래서 주교와 다른 성직자를 선출하는 데 평신도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사목정책을 정하는 회의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교회관습법 제정에 참여했으며, 자발적으로 이 법에 따라서 생활했다. 그래서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주교직에 오른 당초부터, 여러분들(사제와 부제)과 상의하지 않고, 또한 하느님 백성(평신도)의 승인을 얻는 일 없이, 나 혼자의 생각으로 결정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결심했다."

여기서 주교는 성령이 주시는 영적인 선물을 풍부히 부여받은 ‘영적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하느님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 주교들의 당연한 직무라고 여겼다. 이런 점에서 주교는 성화된 공동체의 ‘군주’처럼 권위를 갖고 있었으나, 항상 공동체와 밀접하고 ‘실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진정한 권위는 배려에서 나온다

이런 생각들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인정한 뒤에 다소 완화되고 포기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스도교가 ‘제국교회’가 되면서, 성직자는 특권을 부여받았고, 주교는 ‘일루스트리(illustri, 뛰어난 자)’로서 원로원 의원의 대우를 받았다. 주교들은 특별히 ‘가난한 자들의 옹호자’였지만, 한편으로는 도시의 장관과 의회를 지도하고, 도시방어에도 참여하고, 황제의 권위에 의존하는 ‘공직’이 되었다. 이를테면 주교와 성직자들이 로마제국의 상급 공무원이 된 셈이다. 교회법은 국법과 동일시되었고, 성직자는 법적인 신분을 얻으면서 점차 세속화되었다.

그러나 12세기까지 주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수도자였거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영적 권위’에 대한 영감을 아예 놓치지는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교들 가운데 바실리오, 요한 크리소스톰, 아우구스티노, 세비야의 이시도로, 그레고리오 등이 모두 은수자거나 수도자였다. 당시 주교들은 수도자든 아니든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주교의 권위보다 의무를 더 강조했다.

주교는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단식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모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도와주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주교관 옆에 통상 ‘구빈원’이 있었던 것은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바티칸에 노숙인들을 위한 시설을 설치한 것은 당연한 교부들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주교관 옆에는 무엇이 있을까? 교회 전통에 따르자면 주교관 옆에는 가장 가난한 이들이 머물 공간(환대의 집)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비’는 교회, 또는 교회를 드러내는 주교의 처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사실상 주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강조하는 정의와 공평, 환대의 모든 복음적 이상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교회는 ‘사랑의 완전성’을 지향하는 인간 공동체였다. 교황이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 ‘나는 모든 사제들의 종Conctorum sacerdotum servussum’이라 말할 때, 이는 권위의 행사를 넘어서 하느님 백성의 복지에 대한 배려를 뜻했다. 이들은 아버지다운 권위뿐 아니라 어머니다운 배려를 귀하게 여겼고,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권위는 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진=한상봉(이 사진은 칼럼 내용과 직접 상관없음)

당신들을 위한 주교, 당신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

여전히 교회는 법적인 조직이기보다 기도하고 단식하고 보속하고 은혜를 구하며 영적인 싸움에 나서는 이들의 공동체였다. 그래서 5세기의 레오 1세 교종은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 의해 선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으며, 첼레스티노 1세 교종은 “신자의 의사에 반해서 결코 주교가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공동체가 먼저이고, 주교는 나중이었다. 그래서 “공동체 없이 주교 없다.”는 말이 상식이었다. 주교가 권위 이전에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봉사직분임을 확인시키는 말이다.

사제들의 처신 등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교회생활 전체를 투명하게 만들었던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신자들에게 이런 말을 되풀이 했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주교이며, 당신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더불어 죄인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복음의 제자이며, 복음을 듣는 사람입니다.
내가 주교라고 한다면, 그것은 당신들을 위해서입니다."

안전가옥에서 해방된 주교

지금 여기에서 당장에 현실성 없는 ‘주교선출제’를 제안할 생각은 없다. 다만 교구장 주교들이 신자들의 목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해 주길 바랄 뿐이다. 신자 없이 성직자 없고, 공동체 없이 주교가 없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독일 쾰른 교구장 프링스 추기경은 1963년 사순절 교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서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입니다. 구세주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마찬가지로 사제와 주교의 임무는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일입니다. 교황도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교들이 ‘구중궁궐’에 숨어 지내면 안 된다. 여기서 구중궁궐이란 외부인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겹겹이 방어벽을 치고 있는 ‘안전가옥’이라는 뜻이다. 곳곳에 CCTV와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전가옥이 필요한 사람은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이다. 주교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으로 범벅이 된 하느님의 ‘종’이나 노예, 머슴이라면 지킬 것이라곤 목숨밖에 없을 텐데 주교관 문턱이 높기만 하다.

하물며 예수님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셨음을 기억한다면, 주교야말로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영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방한 때 방탄차를 타지 않은 것처럼 무방비로 세상에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 교회전통을 계승하는 주교의 태도다. 더군다나 교종의 무방비가 곧 신자들과 격없이 만나고자 함이었다면, 한국교회 주교들이 배워야 할 바는 더욱 크다. 거창한 종교행사가 아니더라도 일상 안에서 수시로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앉는 주교가 그리운 시절이다. 이제 “주교님, 전화 드려도 될까요?” 말하고 싶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행동하는 사랑, 한상봉, 리북출판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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