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복음의 비폭력으로 회심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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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복음의 비폭력으로 회심하는 길
  • 한상봉
  • 승인 2016.10.0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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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강정평화컨퍼런스 발제문: 한상봉 코디네이터

강정해군기지와 사드배치와 관련해 한반도가 미일중소 동북아시아 강대국들의 패권주의 싸움에 휘말릴 위험이 더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절묘하게도 이들 나라들의 중간에 끼어 있을 뿐 아니라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으로서 동맹국들 사이에서 전쟁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고, 세계평화의 일꾼이 될 수도 있다. 축복과 저주가 교차하는 땅이 한반도라는 말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천명한 것처럼, 교회가 “인간 구원의 성사”라고 한다면, 한반도는 “세계평화를 위한 성사”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사드 배치가 확정된 성주처럼, 이곳 제주 역시 강정을 중심으로 한반도에서 평화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고민해 온 ‘평화를 위한 성사’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 제주는 문정현 신부를 비롯해 한국천주교회의 성직자들과 수도자, 평화활동가들이 평화의 일꾼이 되기로 작심한 현장이라는 점에서, 무력함으로 폭력적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평화’가 무엇인지 확인하며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교회의 신원을 재확인하는 자리다.

교회 안에서 ‘평화주의’는 익숙한 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사실상 가톨릭교회 안에서 ‘평화’ 또는 ‘평화주의’가 익숙한 언어가 된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스페인내전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교회에서, ‘평화’에 대한 메시지는 비오 12세 교종이 라디오 담화(1939.8.24.)에서 “평화는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쟁으로 모든 것이 상실된다”는 발언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비오 12세 교종은 나치의 600만 명의 유다인 학살에 침묵하였다. 실제로 평화에 대한 발언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은 성 요한 23세 교종이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를 발표하면서였다.

이 회칙에서 처음으로 “비폭력을 통한 폭력의 극복”이 선언되었다. 요한 23세 교종은 “경제적으로 더욱 발전한 국가들이 고도의 정신적 능력과 경제적 자원을 모아 거대한 규모의 전쟁무기들을 만들고 계속 그런 작업을 진행하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109항)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무기생산이 평화를 보장하는 계기가 된다는 ‘힘의 균형’ 논리를 반박하며 무기생산 중지와 군비축소를 주장하고, 이를 위해 먼저 “마음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이런 평화주의는 <사목헌장>(Gaudium et Spes, 1965)에서 가장 정밀하고 분명한 교회의 입장을 낳았다. <사목헌장>은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을 그 주민들과 함께 무차별 전멸시키는 전쟁 행위는 모두 다 하느님과 인간 자신을 거역하는 범죄”(80항)라고 단죄하였다. 이어 군비경쟁은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안전책이 아니”(81항)라면서, “군비경쟁으로 전쟁의 요인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되고 있다”고 전했다. 덧붙여 “군비경쟁은 인류의 막심한 상처”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일”이고,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치명적 재앙이 오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편 <사목헌장>은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 실현”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타인과 타국민, 그리고 그들의 품위를 존경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성실한 실천이 평화건설을 위해 절대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곧 반전운동이 소극적 평화운동이라면, 사회정의 실현운동은 형제애에 기반한 적극적 평화운동인 셈이다. 또한 평화건설과 권리옹호 과정에서 ‘비폭력’을 택하는 이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했다.(78항)

이러한 태도는 ‘정당한 전쟁론’에 대한 비판의 시작이다. 한반도 사드 배치 논란에서도 드러나듯이, 많은 이들은 ‘방어를 위한 군비확충’과 방어전쟁의 정당성에 묶여 있다. “앉아서 우리만 당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세계평화에 대한 <지상의 평화>와 <사목헌장>의 입장에 영향을 주었던 토머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일꾼> 신문에 연재한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글을 통해 힙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시작된 ‘정당한 전쟁론’을 비판하였다.

1961년은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 된지 2년,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집권한지 4년,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킨 3년째 되던 해였다. 무엇보다 핵무기 위험이 증폭되던 시기에 ‘평화’라는 말 자체가 ‘공산주의자’들의 언어로 받아들여지던 미국사회에서 머튼은 그리스도교 평화론을 전개하였다. 머튼은 군비증강과 핵전쟁의 위험을 예감하며 “우리가 핵전쟁으로 끌려 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스스로가 혼란에 빠져 있고, 우리의 내면이 공허하며, 우리의 자아가 불만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폭력성을 자제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도록 도와주는 내적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했다. 

by Matin Erspanmer

초기교회 그리스도인은 단순명료한 평화주의자였다

여기서 머튼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평화주의와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의 ‘정당한 전쟁론’을 대비시켜,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적인 ‘비폭력 평화주의자’였다. 초기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미 로마제국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를 신으로 섬기라는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차라리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들의 피로부터 성장했다. 그들의 삶은 믿음과 유순과 온유와 인내와 정결의 삶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에만 의존하며, 국가에 복종하지 않았다. 국가는 스스로를 우상화하여 하느님을 모독할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전투는 비폭력적이고 영적이었으며, 이러한 태도는 유례없이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짐승’(로마제국, 이교도)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싸우다 죽을 생각이 없었다. 

초기교회 그리스도인 모두가 단순명료한 평화주의자였다. 물론 로마군 안에도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병사로 있다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각자를 부르셨을 때의 상태대로”(1코린 7,17) 병사로 남아있었다. 그때만 해도 제국 군대가 일종의 경찰로서 팍스 로마나를 지키는 존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의 신분을 이상적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군대에 복무하면 어쩔 수 없이 공식적인 우상숭배에 가담해야 했다. 막시밀리아누스처럼 이 황제숭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병사도 있었고, 투르의 마르티누스처럼 전투에 나가 살인을 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병사도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마르티누스는 “나는 그리스도의 병사이므로 타인을 죽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에서 싸우기보다 차라리 기꺼이 생명을 바치겠다고 한 최초의 사람들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그리스도인들을 ‘평화의 병사’라고 불렀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모든 병사의 무장해제를 명하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로마제국 안에서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반사회적 집단’으로 박해받았다. 이런 비판에 맞서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하느님이 계약을 알지 못하던 시절의 전통적 관습을 따르지 않고 이제는 다른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칼을 겨누지 않으며 더 이상 전쟁 기술을 익히지도 않는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평화의 자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당한 전쟁론,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작은 악을 허용한다”

그러나 4세기에 등장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제국 안에서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뒤에 ‘정당한 전쟁론’을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상의 시민인 그리스도인들도 지상의 도시에 사는 동안 피해갈 수 없는 게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성직자나 수도자로서 완전히 영적 삶에 자신을 바치지 않는 이상, 자기가 사는 지상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도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보았다. 전쟁의 동기가 정당한 명분과 적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런 경우에 폭력은 불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른바 “사랑은 선익을 위해 행하는 자비의 전쟁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좋은 의도라면 폭력적 수단을 써서 선을 이룰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은 교회-정치적 지배권력에 의해 언제든 왜곡될 수 있었다.

이 ‘정당한 전쟁론’이 낳은 불행한 결과가 바로 십자군 전쟁과 이단 심문, 라틴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등으로 나타났다. 나치 등 파시스트에게는 ‘인종청소’로 나타나고, 교회의 전통적인 공산주의 혐오와 적대감은 공산주의자라면 양심에 거리낌 없이 쓸어버릴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을 심어 주었다. 미국이 “불의한 침략자를 응징하고” 불의한 전쟁을 조속히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민간인 거주지역인 히로시마에 원폭을 감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은 사실상 폭탄의 효과를 확인하려는 미국의 실험에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작은 악을 허용한다”는 ‘정당한 전쟁론’은 사실상 복음의 비폭력을 세상에 적응시킨 또 다른 악을 허용할 뿐이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화된 ‘정당한 전쟁론’은 교회 공식 가르침이 되어 <가톨릭교회교리서>에도 수록되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정당방위’ 차원의 무력 행사는 공격자가 입히는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해야 하고, 다른 방어 방법이 아무것도 없고, 성공할 수 있으며, 제거되어야 할 악보다 더 큰 폐해를 불러오면 안 된다고 규정하였다. 이런 조건을 100% 채우는 전쟁이 거의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전쟁금지론에 가깝거나 참고사항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은 가르침이다. 

시급한 요청, 정당한 평화론-복음적 비폭력

그래서 2016년 4월에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와 팍스 크리스티 주관으로 로마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로마회의)에서는 “비폭력과 정당한 평화”라는 주제로 아예 악용될 소지가 많은 ‘전쟁으로 전쟁을 막는 방법’을 접고, ‘정당한 평화론’에 주력할 것을 요청했다. 복음서는 일관되게 ‘비폭력’의 궤도를 걷고 있으며, 이런 ‘복음적 비폭력 저항’은 소극적이거나 비굴한 태도가 아니라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예언자적 목소리이며, “행동하는 사랑의 힘”이라고 전했다. 결국 ‘비폭력’을 교회가 교리의 차원으로 다루어줄 것을 교황에게 요청했다.

한국교회에서 ‘복음적 비폭력’은 특별히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줄곧 실천되고 있는데,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서 시작되어 최근에 평화운동과 노동운동 과정에서도 여전히 ‘비폭력 저항’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문정현, 문규현 형제 신부와 박창신 신부 등 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복음적 비폭력’을 수행하다가 옥고를 치르거나 고통을 받았다. 이들은 이사야 예언서에서 전한 ‘야훼의 종’처럼, 고통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일하다가 그들처럼 고통 받았으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운명을 함께 나누었다.

특별히 강정해군기지와 광화문에서 계속되고 있는 거리미사를 두고, 가톨릭일꾼운동의 창립자인 도로시 데이의 손녀 마르타는 ‘성찬례적 저항’이라고 극찬하였다. 도로시 데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치의 사악함을 알고 있었고, 유대인들의 망명을 적극 돕고 있었지만, 전쟁을 수단으로 하여 악과 싸운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전쟁은 계속되는 수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변호하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복음적 비폭력’은 순전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과라고 봐야 한다. 공의회 이전까지 한국교회는 다른 세계교회와 마찬가지로 ‘정당한 전쟁론’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로 인해 왜곡된 사례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정당한 전쟁론 또는 ‘비복음적 폭력’에 대한 한국교회의 반응은 제국주의와 국가폭력에 대한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라테란 조약 이후 로마교회가 파시즘에 동조 또는 침묵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대한 동조 또는 굴종적 침묵으로 일관했다.

The Deserter (1916) by Boardman Rpbinson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한국교회

이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1937년에 독일, 이탈리아와 ‘공산주의에 대적하는’ 방공(防共)협정을 체결하고, 중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작하고,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1938년 ‘조선 육군 지원병제도’까지 만들었다. 그러자 한국교회의 간행물인 <가톨릭조선>은 1938년부터, <경향잡지>는 1940년부터 ‘황국신민의 서사’를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38년에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노기남 주교(당시 명동성당 보좌신부)가 참여해 본당을 돌며, “순교정신으로 보국하자”는 시국강연을 하였다. 1939년 기해순교 100주년 기념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대식에서는 “현재 제국에서는 흥아대업(아시아를 부흥시키는 과업)을 목표로 하고 나아가는 비상시국에 처하여...순교정신으로 일제에 보국하라!”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1940년에는 명동성당에서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서울)교구연맹’을 다시 결성하고, 1941년부터 매월 첫 주일을 ‘애국주일’로 삼는다고 결정하고, 신사참배에 나섰다. 

1942년 3월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연맹은 <대동아전쟁 기구>를 반포하고, 이 기도문을 공과(功課)에 넣어 신자들로 하여금 매일 일본군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게 만들었다. 세부 지침으로서 매일 아침마다 일본 황실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저녁에는 전몰장병을 위해 기도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밖에 매주 황군의 무운장구를 위한 기도를 하고, 매월 승전을 위한 기원제를 지내며, 특히 대축일마다 장엄한 시국기원제를 지내도록 지침을 정하였다.

아울러 일제의 태평양 전쟁을 더욱 실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1인 1전 헌금운동”을 전개하여 병기를 일제에 헌납하였다. 그리고 1944년 2월 8일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보도특별정신대 (報道特別挺身隊)’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해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펴내면서 천주교인 가운데 7명(노기남 대주교, 김명제 신부, 김윤근 신부, 신인식 신부, 오기선 신부, 장면, 남상철)을 친일 인사로 등재하였다. 종교별로는 불교 54명, 개신교 51명, 유림 41명, 천도교 29명이었는데, 천주교 인물이 가장 적은 이유는, 당시 김승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에 따르면 “이것은 천주교의 특성상 개인적 차원에서 친일행적을 보인 사람들보다 교단 차원에서 친일행동에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2010년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이해 일본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이케나가 준 대주교가 8월 6일부터 시작된 ‘평화주간’에 담화문을 발표해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대한 시기에 우리 가톨릭교회의 책임을 포함하여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하느님 앞에서 용기를 갖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참된 인간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당시 일본 천주교회는 심포지엄을 열어 ‘그리스도인 공동선언’을 채택해 일본 정부와 국회에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죄책을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과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 일본군 성 노예로 취급된 위안부들에 대한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만들고 보상법을 제정하며, 재일 한국ㆍ조선인과 후손들에 영주권을 보장하고 국제인권규약이 정하는 민족적 소수자로서 지위와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2000년 12월 3일 자로 발표한 ‘한국 천주교회의 2000년 쇄신과 화해>라는 문서를 통해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때로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한 사실에 대한 아무런 죄책고백도 없었다. 노기남 대주교의 친일행위조차도 서울대교구는 “당시 노 주교의 행동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회 수장으로서 교회와 교인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였다”고 변명하였다. 일본교회 앞에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반공-국가주의에 침식된 한국교회

순교정신까지 악용하여 일제 침략전쟁에 동조했던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공간에서 미군정과 교섭하여 정치세력화에 나섰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체질화된 ‘국가주의’가 ‘반공주의’와 절묘하게 결합되어 반공친미정권 창출에 나서게 하였다. 당시 남한에서 반공은 친일행위에 대한 면죄부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 한국교회는 반공사상투쟁의 선봉임을 자처하였다. 한편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무신론 폭군에 대한 신앙자유수호의 십자군전쟁”(<천주교회보>, 1953.1.15.)으로 규정한 한국전쟁기에 강화되었다.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은 미국 천주교인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한국전쟁은 “반(反)그리스도주의자와 항전하는 전쟁”이라면서, 이번 전쟁은 “또 다른 유사 종교집단인 공산주의자들이 도발한 천주와 교회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했다.(<천주교회보>, 1950.11) 한편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는 1950년 로마 성년행사에 참석차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방문 중 전쟁 소식을 듣고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있는 한 세계평화는 불가능하다. 이 사상을 물리치기 위하여 신자들은 궐기하라!”고 촉구하였다. 

가톨릭교회가 공산주의를 단죄하면서, 당시 교회매체들은 ‘정당한 전쟁론’에 기대어 전쟁 예찬론까지 나아갔다. 당시에 <천주교회보> 기사 제목만 훑어보아도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청년 학도여 군문으로 나아가라”(1950.11.10)
“무찔르려마 무찔르려마. 사탄의 대열을 무찔르려마”(1951.1.14)
“가톨릭 정신을 기조로 멸공구국의 십자군이 되라”(1951.3.20)
“싸워야지,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한다. 공산당이 살고는 우리는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냐?”(1951.4.15)
“말살의 신념을 갖고 남보다 맹렬히 적을 공격하라”(1951.11.10)

이런 격앙된 분위기에서 1951년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 캐롤 몬시뇰, 김동한 신부 등이 모여 창설한 것이 ‘한국 가톨릭 군종단’이다. 전쟁기간 중에 모두 45명의 신부가 입대하여 활동하였고, 1961년에는 추계 주교회의에서 군종신부단을 정식 인준하고, 노기남 주교를 초대 총재로 삼았다. 군종사제단은 베트남전쟁 파병을 계기로 더욱 확대되었는데, 이후 군종사제들은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혁명공약을 내세우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과 한국교회를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더구나 2010년에는 제3대 군종교구장으로 작은형제회 출신의 수도사제인 유수일 주교가 임명됨으로써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유 주교가 2011년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총회 폐막미사 강론에서 수도회에도 군종사제 파견을 요청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참에 짚고 넘어가자면, 군종교구가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를 넘어서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사제들이 꼭 군인 신분으로 군종사목에 종사해야 하는지 재검토해야 한다. 군인이란 상부의 명령에 반드시 따라야 하지만, 사제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교회가 ‘복음적 비폭력’을 주장한다면, 사제들이 국방부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임관되어 국방부에서 월급을 받으며 군복을 입는 행위는 초기교회와 마찬가지로 사제의 양심의 자유를 침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에 동조한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개신교처럼 ‘조찬기도회’를 열지는 않았지만, 국가주의로 무장한 군사정권에 제대로 저항하지 않았던 사실 또한 반성해야 한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한국교회는 서둘러 군사정권을 지지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교구가 대구교구였는데, <가톨릭시보>는 ‘군사혁명과 반공정책: 반공은 국토통일보다 중요하다’라는 기사를 통해 “이 땅이 공산화되더라도 통일이 되어야 한다든가 공산당의 음모를 알면서도 민주주의에 충실하기 위하여 언론집회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가톨릭시보>,1961.5.28.)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한국교회는 노기남 대주교를 총재로 한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교구추진회’를 결성해 정부 시책에 적극 협조했다.

한국교회가 해방공간에서 정치세력화를 위해 나섰으며, 가톨릭의 얼굴이던 장면 총리가 집권했던 민주당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군사정권을 다시 지지한 것은 ‘정치권력’을 따르는 종교집단의 비굴한 모습을 잘 드러낸다. 힘이 있으면 정치권력의 열매를 따먹고, 힘이 약하면 정치권력 뒤에 숨는 모습이다. 결국 해방 이후부터 5.16군사쿠데타 직후까지 교회는 여전히 일제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던 교회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교회의 ‘정치개입주의’가 초래한 비극이다. 

특히 대구교구는 군사정권과 역대 보수정권에 유착해 온 대표적 사례이다. 대구교구 소유의 <가톨릭시보>(<가톨릭신문>의 전신)는 1963년 3월 16일자 ‘정치체질 개선의 본뜻-우리는 전환기에 서있는가’라는 사설에서 “교회는 현실정치에 직접 간여하기를 극력 피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특히 공식장소에서 정치에 언급하거나 사담으로라도 교회 울타리 안에서 그런 것을 비친다면 좋은 표양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정치 불간섭주의’를 내세웠다.

대구교구 교구장이었던 서정길 주교가 추천하여 민주공화당에 들어간 ‘대구의 유력한 평신도’ 이효상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 경남지부 연차대회에서,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은 박정희 밖에 없다”면서, “후진국에서 군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엔 흔히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국가의 지도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대구교구는 1980년 광주학살을 딛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도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제5공화국이 선포되고, 해산된 국회를 대신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각종 악법을 쏟아냈는데, 대구교구는 이 입법회의에 이종흥, 전달출 신부를 참여시켰다. 그결과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방송사와 언론사들이 강제 통폐합 될 때, 교구 소유의 <매일신문>이 유일한 대구지방지로 남는 특혜를 누렸다.

복음적 비폭력으로 회심하는 길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를 살펴볼 때, 교회가 군사적 패권주의와 국가주의에 침식된 부분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적 비폭력’의 입장을 취했던 교회 지체들도 많았다. 그러나 보수적 정치집단이 워낙 오랫동안 국가주의와 애국심을 빌미로 ‘정치적 저항세력’들을 탄압해 왔으며, 분단국가의 특성을 이용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반북반공이데올로기를 주입해 왔기 때문에 국가폭력에 대하여 신앙인들조차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참에 한국교회의 밑돌을 놓았던 순교자들이 모두 국가폭력의 희생자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국교회가 복음적 비폭력으로 회심하는 길에서 성찰해 보아야 할 몇 가지를 제안하는 것으로 발제를 마치고자 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돌아가신 분이라기보다는, 제국과 국가의 반복음적 세력에 끝까지 ‘비폭력적으로’ 저항하시다가 ‘폭력적으로’ 희생당하신 분임을 고백하고, 신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2) 일본제국주의와 군사정권에 협력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공식적으로 참회하고 한국민 앞에서 용서를 청해야 한다. 과거 유신정권 시절에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의 석방운동,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던 일본 천주교 정의평화협의회에 감사를 표시하고, 일본천주교회의 과거사 청산작업과 평화헌법 수호운동을 본받아야 한다.

(3) 교회 안에 온존하는 양적 성장 이데올로기를 하루속히 극복해야 한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 방한 당시 교종은 한국교회의 ‘번영’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이 밀려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하셨다. 복음적 신실성 이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금 ‘힘의 논리’에 편승할 위험이 있다. 힘의 논리에 따르면, 교회는 지배질서와 기득권 세력에 동조하여 ‘간접적이라해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폭력에 무감각해 질 가능성이 높다.

(4) 이와 관련해 군대를 ‘신자 확보의 황금어장’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군종사목이 양적 성장에 몰두하는 한, 군종사목은 ‘군사문화를 역전시킬’ 복음적 태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군종사목은 국방부의 요구대로 “정신전력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에 대한 영적 돌봄”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사제들은 국방부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얻어야 하며, 이를 위해 사제가 군인신분으로 복무하는 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여전히 강정해군기지 반대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주해군기지가 준공되자 서둘러 프란치스코 성인을 주보를 한 ‘제주해군 성당’을 만들어 군종사제를 파견한 군종교구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를 염두에 둔다면,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가 맞대면하고 있는 셈이다.

(5) 마지막으로, 정치-경제-군사적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를 맞서는 복음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최초의 복음은 로마제국의 변방인 식민지에서 선포되었으며, 가톨릭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통하여 민중에 대한 분명한 당파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포한 그대로 살지 못하는 복음이라면 가난한 이들에게는 이미 흉음(凶音)이다. 복음을 선택하고, 가난한 이들과 연대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보증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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