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주교 “사람에게는 얼음이면서 하느님을 향해 불타오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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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 “사람에게는 얼음이면서 하느님을 향해 불타오를 수는 없다”
  • 가톨릭일꾼
  • 승인 2016.10.04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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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샤를르 드 푸코 서거 100주년 기념미사 봉헌

10월 3일 오전 11시 서울대교구 신사동성당에서 ‘복자 샤를르 드 푸코 서거 100주년 기념미사’가 강우일 주교의 주례로 봉헌되었다. 이날 미사는 예수 까리따스 우애회, 예수 까리따스 사제회, 샤를르 드 푸코 재속우애회,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예수의 작은 형제회에서 주최했으며, 이날 푸코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대전교구 사제이며 예수 까리따스 사제회에 참여하고 있는 이범배의 신부의 강의를 들었다. 이날 행해진 강우일 주교의 강론을 전재한다.(편집자)

샤를르 드 푸코 작은형제가 하느님 품에 안긴지 100년이 넘어 감개가 무량합니다. 작은 형제들은 워낙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시는데, 그 제자라고 볼 수 있는 작은 형제들, 자매들도 참 소박하게 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시작성가를 들으면서 과연 그렇구나, 생각했습니다.

시작성가“ <가톨릭성가 416. 좋기도 좋을시고>
(후렴) 좋기도 좋을시고! 예수사랑 살아내신/샬형제 백주년에 한데모여 기뻐하네.
1. 오직하나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는것은/푸코형제 벗이되어 함께 살아가는 것.
2. 나자렛의 삶을사는 푸코가족 모두에게/예수사랑 축복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3. 우리모두 푸코영성 온몸으로 살아내어/만인의 형제로 사랑하게 하소서.

이렇게 다른 성가에도 가사만 붙여서 부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2015년 10월 3일 가정에 관한 세계주교시노드를 개막하시기 전날 밤에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 광장에서 전야제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에서 오늘의 세상이 정말 어둠에 가득 찬 세상이지만 가정이야말로 이런 세상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작은 등잔 같은 존재라고 하시면서, 교회가 가정이 가진 가치와 빛을 다시 찾아내자고 촉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30년을 나자렛의 가정이라는 작은 시골구석의 공간에 사시면서 당신의 영성을 키워나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교종께서는 시노드 시작 전에 하신 말씀에서 그런 가정의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서 나자렛 성가정의 영성을 전하면서 복자 샤를르 드 푸코를 소개하셨습니다. 푸코 형제를 나자렛 성가정의 신비에 홀려서 군인으로서 출세가도를 내팽겨치고 뛰쳐나간 위대한 탐험가라고 부르셨습니다. 부모와 이웃과 함께 어우러져서 묵묵히 하루하루 단순한 노동을 하면서 기도생활을 이어가신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보면서 샤를르 드 푸코 작은 형제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향한 욕망을 쫓아버리고, 하느님을 향한 새로운 탐험의 길에 나서셨다고 교종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가정들은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 그 가정 안에는 엄청난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교종은 우리도 가정의 신비를 엿보기 위해 샤를르 형제와 함께 나자렛의 성가정을 들여다보자고 초대하십니다.

나자렛의 가정이란 예수님이 30년을 보통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사신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세상의 다른 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아주 평범한 가정, 고뇌와 기쁨이 뒤섞여 있는 가정, 갈등도 있지만 서로 존중하고 인내하는 가정, 서로 낮추고 양보하면서 섬기는 삶을 살아가다가 하나가 되는 가정, 이 나자렛의 가정이야말로 예수님의 복음적 성덕이 서서히 영글어간 공간이었다고 교종께서 그렇게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샤를르 작은형제의 귀천 100주년을 맞으면서 그분의 하느님 사랑을 향한 탐험의 이정표를 잠시 더듬어보면 좋겠습니다. 샤를르 작은형제가 남긴 염원과 기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분의 성덕에 다시한번 다가가려 합니다.

1898년 7월 20일, 샤를르 형제는 나자렛 성가정에 대한 묵상을 다음과 같은 기도 형태로 남겼습니다.

“거룩하신 동정녀 성 요셉님,
저를 두 분과 함께 우리 주님 발치에 있게 해주십시오.
두 분과 함께 저도 나자렛의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분의 전 생애가 하느님 안에 실종되었고 하느님 안에 머물렀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현존을 결코 잊어버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한순간도 한눈 팔지 않고 아버지를 쳐다보였고,
한순간도 한눈 팔지 않고 아버지를 예배하였고,
끊임없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였습니다.

오주 예수님,
나자렛에서나 광야에서나 공생활 동안이나
예수님의 내적인 삶은 똑 같았습니다.
항상 어디서나 당신은 하느님 안에서 실종되시고,
하느님 안에 온전히 침수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풀면 하느님 안에 완전히 푹 빠져 사셨습니다.)
겉으로 무슨 일을 하시든
당신은 내적으로는 언제나 하느님 안에 침잠하셨습니다.

예수님, 저에게도 그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당신처럼 간단없는 관상의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당신 내면의 관상은 당신 존재의 바탕이고 기둥이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기도와 독서와 비천한 노동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저는 노동하면서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식사는 가난하고 단순한 먹거리로 적게 먹었습니다.
당신께서 나자렛에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잠심, 침묵, 가난, 잠행, 노동의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이하 사진=한상봉

샤를르 드 푸코 작은형제는 이렇게 예수님의 꼭꼭 숨어 사신 삶에 자기도 푹 빠져서 살고자 했지만 그렇다고 봉쇄 안에 갇혀 사는 관상수도자로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샤를르는 사제품을받은 사람으로서 사도직 활동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직은 샤를르 만의 고유하고 특별한 사도직이었습니다. 샤를르는 이를 ‘선함의 사도직’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아포스톨래 드 봉떼. 봉떼(bonté)라는 말은 선함, 착함, 어질다는 뜻입니다. 샤를르는 이 선함의 사도직에 대해 말씀하면서 자신이 사도로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다가가기 위해서는 먼저 가난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에게 계속 말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자신에게 이르고 있습니다.

“부를 두려워하자. 부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무한히 풍요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연약함을 생각한다면 부는 큰 위험이다. 왜냐하면 부는 나 자신이 그에게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고 동시에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가난해지자. 가난한 예수님을 닮기 위해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되자. 그분의 말씀에 순명하기 위해서라도 가난해지자,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렇게도 가난을 강조하셨고 부에서 멀어지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사신 것처럼 우리도 가난하게 무소유로 살면서, 가난한 노동자들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사용하지 말자.”

그리고 1909년 샤를르 드 푸코 작은형제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의 사도직은 선함의 사도직이어야 한다. 어짊의 사도직이어야 한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게 되어야 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선하니 그가 믿는 종교도 선할 것이다.’ 누군가 내가 왜 온유하고 선한가 묻는 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나보다 훨씬 더 선하시고 좋으신 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나의 선하신 스승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제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성광(聖光)이 되어야 한다. 사제는 사라지고 예수님만이 보여야 한다. 나에게 오는 모든 영혼 안에 좋은 기억을 남기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자. 웃는 이와 함께 웃고 우는 이와 함께 울자. 그래서 모든 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자.”

이것은 푸코 자신이 사제로서 자신의 사도직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샤를르 드 푸코는 사제인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사도직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1912년 3월에 쓰신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도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사도가 될 것인가? 만나는 모든 사람,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에게 선함, 따뜻함, 형제적 사랑, 덕망의 표현, 겸손, 온화함으로 다가가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느님이나 종교에 관한 말을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인내하신 것처럼 우리도 인내하고 하느님께서 선하신 것처럼 우리도 선하고 오직 사랑하고 기도해주는 따뜻한 친구로 남아 있어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에 관해 말하더라도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형제로 보고 예수님의 피로 몸값을 치른 하느님의 자녀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보내실 때 늑대들 가운데 양들처럼 보내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전투적인 마음가짐은 멀찌감치 쫓아내어야 한다. 비그리스도인이나 사악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 우리가 돌봐야 할 병자로 봐야지 쳐부숴야 할 적으로 보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그다음에 제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분은 무엇보다 사랑에 매료된 사도였다는 것입니다. 샤를르 작은 형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하나임을 수없이 강조하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다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샤를르 형제는 1893년 4월 30일에 쓰신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두 마음을 가질 수는 없다. 하느님을 향해서는 불같은 마음을 가지면서 사람들에게는 얼음 같은 마음을 가질 수는 없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뜨거우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맡겨주신 사람들을 향해서도 마음이 뜨거워야 한다.”

우리 마음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사람을 사랑하려는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마음이 뜨거워지고 불타오르고 애틋해지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도 똑같이 더 뜨겁고 따뜻해집니다. 우리 마음이 사람을 향해서는 얼음이면서 하느님을 향해 불타오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마음이 뜨거워지면 하느님을 향한 마음도 뜨거워집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가장 좋은 일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심화하는 일입니다.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가장 확실한 표지일 뿐 아니라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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