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튼] 하느님의 우주적 춤사위
상태바
[머튼] 하느님의 우주적 춤사위
  • 웨인 심직
  • 승인 2016.09.30 12: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제>

사랑하도록 준비되어 있고, 잘 받아들이며,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창조된 세상의 한 가운데에서 경험된다.

<시작 기도>

창조주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주 만물의 경이로움과 창조된 모든 광채들이 일어나 인사하며
당신께 대한 저의 사랑을 환기시킵니다.


머튼에 관하여

토머스 머튼은 수도원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둔덕과 숲의 켄터키 풍경에 흠뻑 빠졌다. “나는 위대한 정적 속에서 나의 영혼과 영적 고요와 함께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 나에게 풍경은 관상을 위해 중요한 것으로 보이며, 나는 그것을 사랑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요나의 징표>에서).

머튼의 이러한 성사적 관점은 전례와 자신의 영적 삶에 있어 죽음과 부활의 과정이 계절과 서로 보완된다는 사실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만들었다.

사순절기 첫번째 일요일은 지금 내가 아는 한 큰 축제이다. 그리스도는 사막을 거룩한 곳으로 만드셨고 사막에서 나는 그 사실을 발견했다. 숲은 봄의 단련 속에서 온통 젊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기대라는 단련 속에서 젊어질 뿐이다.... 싹은 안 나왔다. 싹들은 이렇게 이른 사순시기에는 추측하거나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광야는 약속으로 빛나고 있다. 땅은 단순하고 강한 옷을 입고 있다. 모든 것이 거룩한 봄이 오는 것을 미리 말해준다. 나는 이제까지 숲과 언덕과 새들과 물 그리고 하늘에 대해 이렇게 자유스럽고 친밀감을 느끼며 말한 적이 없었다. (<요나의 징표>에서)

은둔소에서 바라보며 머튼은 썼다: “은둔소가 나에게 보도록 해주는 한 가지는 우주가 나의 고향이며 내가 그것의 일부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대화의 서원>에서). 이러한 감수성이 더 고조되면서, 그는 그의 주변에서 매일 펼쳐지는 자연의 드라마를 인식했다.

"오후에 내 머리 위의 낮은 소나무 가지 사이에는 많은 작고 예쁜 벌레잡이 새들이 벌레를 잡으려고 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너무나 가까이, 나는 그것들과 거의 닿을 뻔했다. 그것들의 사랑스러움, 빠른 날개짓들, 그것들의 모양과 지저귐들, 날면서 보이는 등위의 노란 점들에 나는 넋이 빠졌다. 그것들과 내가 모두 같은 자연이며 그 자연은 사랑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어떤 전적인 일체감이 느껴졌다."(<대화의 서원>에서)

<관상의 새로운 씨>의 마지막 장에서 머튼은 세상을 하느님이 춤을 추고 있는 정원이며 사원이고 낙원으로 상상한다. 하느님은 창조물 안에서, 창조물을 통하여 춤추시며 모든 것들이 리듬에 맞춰 참여한다. 이러한 우주의 춤은 성령의 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사랑 속에서부터 일어난다.

"주님은 당신의 창조 낙원에서 노시며 당신 자신을 다양하게 표현하신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의 의미라는 강박관념을 버릴 수 있다면 그분의 신비스러운 우주의 춤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세상과 시간은 비움 속에서 그분이 추는 춤들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침묵은 결혼 축제의 음악이다. 우리가 인생의 현상에 대해 잘못 이해하기를 고집한다 해도, 우리 자신의 이상한 결말과 복잡한 목적 속에서 그 현상들을 분석해도, 우리자신을 슬픔, 어리석음, 그리고 절망 속에 빠져들게 한다 하여도... 우리가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바람에게 우리의 두려운 엄숙함을 던져 버리며 하느님의 이 우주의 춤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멈춤>

자연 세계에 대한 당신 자신의 관점을 성찰해보라. 창조물에서 분리됐다고 느끼는가? 또는 춤의 일부라고 느끼는가?

 

머튼의 말

"자연 안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관상은 그리스 교부들이 자연스러운 관상이라고 말했듯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 모두 갖고 있다. 한 편으로 자연스러운 관상은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서 핵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하느님에 관한 긍정적인 인식이다. 그것은 자연에 관한 추론적인 과학이 아니며 창조 세계 안에 반영되는 하느님에 관한 직관적인 인식으로서 영혼에게 주어지는 종교적인 자각의 관습이다.

사물에 관한 이러한 직관적인 종교적 관점은 연구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으며 많은 부분은 금욕적인 이탈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연스러운 관상의 부정적인 측면은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올바른 질서와 그분께의 의탁에서 멀어지면 허무와 환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똑같이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꽃들과 나무들, 언덕과 시냇물들, 들판들, 야생 철새들, 책들, 시들, 사람들이여, 나는 당신들의 한 가운데에서 형언할 수 없이 외롭다. 때때로 비이성적인 허기가 내 의지 깊은 곳으로 뚫고 들어와 내 가장 깊은 자아를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던져 버리며 당신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나는 내 마음의 중심에 있는 깊은 불꽃으로 당신에게 닿으려 하지만 당신과 나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당신께 닿을 수 없기에 나는 부끄러워하고 외로움과 무력감을 느끼며 절대로 나에게 속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은 내 안에 창조물의 거룩함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공경심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순수하고 완전하며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맑은 물 속의 햇빛과 같이 모든 것들 속에 비추어진다. 그러나 물 속의 그 빛을 마시려고 한다면, 나는 그저 그 모습을 흩으러 뜨릴 뿐이다." (<요나의 징표>에서)

 

성 찰

머튼은 그리스 교부들로부터 “자연스러운 관상”의 개념을 도입하여 우리가 자연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모든 창조물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 이 문구를 해석했다. 자연스러운 관상은 우리가 마음을 순수하게 가지고 열려고 노력한다면 가능하다.

머튼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받은 선물에 감사 표현하기를 배우면서 순수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을 창조물 안에 계신 하느님께 더 열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에 깨어 있지 잃으면 우리 주변의 거룩함도 볼 수 없게 되리라는 뜻이다.

일단 우리가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을 변형시킨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물질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 사랑의 계시로 본다. 그 결과, 자연스런 관상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존경을 깊게 한다.

창조물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에 눈을 뜨면서 우리는 창조물 위에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려는 것을 멈춘다. 우리는 지배보다는 우주와의 조화를 찾게 된다. 우리는 창조물을 거룩한 땅, 신성한 장소로 보며 다가간다. 머튼은 우리가 자연 세계와 친밀하면서도 경건하게 관계를 맺고 창조의 춤에 참여하도록 요청한다.

★ 머튼은 자연을 관상하기 위한 도구로서 카메라를 사용했다. 카메라의 렌즈 구멍은 그의 마음을 여는 것이었다. 그는 카메라로 자연의 물체들이 지니고 있는 숨겨진 차원, 그것들의 조용한 신비의 심연을 보려고 노력했다.

카메라 하나를 구하고 필름을 넣는다; 여분의 필름을 마련하라. 그런 다음 당신에게 신비감을 주는 어떤 자연의 장소로 가보라. 명백하고도 극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장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물체나 풍경에 집중하기를 원할 때마다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풍경주위를 걸으라. 당신의 열린 마음 위에 먼저 어떤 영상을 새기기 위하여 카메라의 파인더 안에 형상을 담으라. 그 다음에 사진을 찍으라.

카메라를 사용하는 목적은 예술이 아닌 기도이다. 그래서 사진이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라. 카메라는 당신에게 관상적으로 보는 방식을 발전시켜주는 도구일 뿐이다. 당신의 사진들 한 두 개를 선택하여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자하는 당신 마음의 열망을 상기시켜줄 수 있는 장소에 그것들을 놓는다.

★ 자연 세계에 있는 동안 걷고 보면서 머튼의 다음 말들과 조화를 이루며 기도하라 “하느님은 창조물 안에서 반사된다.”

★ 머튼은 이렇게 썼다: “나는 나무 아래에서 존재한다. 나는 필연성에 의해서 숲을 거닌다”(토머스 머튼, <이방인의 하루>에서). 어떤 풍경이 당신을 하느님을 향해 끌어당기는가? 물가, 숲 속, 사막, 산, 기타 등등과 당신의 관계를 묘사하는 산문시를 써보라.

★ 머튼의 어구를 다시 읽고 당신 주위의 세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쓰라. 할 수 있는 한 구체적으로 묘사해 보라.

★ 인사나 춤처럼 창조물을 향해 거룩한 몸짓을 해 보라. 그 몸짓은 당신을 둘러싼 세계 안의 하느님께 보내는 당신의 응답이 반영되어야 한다. 잠시동안 그 동작을 천천히 그리고 주의 깊게 반복하라.

이 종교적인 경험을 짧은 기도, 예를 들면 나는 기꺼이 “우주의 춤에 참여합니다”라는 기도로 마치라.

 

하느님의 말씀

이 세상과 ,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이 땅을 그 물 위에 세우셨도다.
어떤 사람이 야훼의 산에 오르랴?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 (시편 24,1-4)

<마침 기도>

오 하느님,
저의 마음을 당신께 들어 올립니다.
제가 봄의 미풍, 꽃들, 구름들, 겨울의 서리를
당신의 메시지로 알아듣도록 일깨워 주십시오.
당신을 향해 밤낮으로,
과 가을로, 파충류에서 포유동물, 그 모든 것을 통해
저를 당신께 불러들이십시오.
제가 불멸의 태양을 향해 기쁨에 넘쳐 춤을 출 수 있도록
제 마음 속에 희망의 씨앗을 심으십시오.
아멘.

(이 책은 1994년 미국 미네소타주의 세인트 매리 출판사에서 발간된 웨인 심직의 <Praying with Thomas Merton>을 <참사람되어>(2001.1)에서 편역한 것이다.-편집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