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가난, 하느님 처소의 모퉁이돌
상태바
[프란치스코] 가난, 하느님 처소의 모퉁이돌
  • 머레이 보도
  • 승인 2016.09.27 13: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길-3
BASILICA OF SAN FRANCESCO D'ASSISI, ST.FRANCIS PREACHING TO THE BIRDS, FRESCOE IN THE LOWER CHURCH / WIKIMEDIA COMMONS

만일 당신이 “성 프란치스코”란 이름을 말하면서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 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사람인 “포베렐로”이며 가장 뜨겁게 논쟁을 하고 가장 많이 오해의 대상이 되는 것도 바로 그의 가난이다.

가난의 주제에 관한 열띤 논쟁 한 가운데에 단순한 프란치스코가 서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으나 하느님 안에 사는 한 방법이었고 하느님 나라를 현실화시키는 한가지 삶의 방식이다. 아마도 가장 초창기에 나온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인 ‘거룩한 교역’이란 제목의 약간 우화적인 작품(프란치스꼬와 가난부인 사이에 거룩한 교환) 안에 보면 가난과 프란치스꼬의 관계의 핵심이 몇 구절로 재치 있게 그려지고 있다. 가난에 대한 그의 사랑의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장소를 마련해주는 덕들 위에 높이 거룩한 가난이 서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가난이 모든 다른 복음의 덕들 사이에서 그 위치와 이름이 첫째로 있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로 가는 프란치스꼬의 길에 있어서 가난의 탁월함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의 아들이 특별히 이 덕을 사랑하셨다는 것인데, 그분은 지상에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셨을 때 그것을 찾아다녔고 발견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께서 설교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은 신앙의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손에 빛으로서 거룩한 가난을 맡기셨으며, 그리고 그분의 집의 모퉁이 돌로서 가난을 두셨던 것이다.

그리고 두개의 문장 안에서 이 초창기 전기의 작가는 간단히 말한다. 즉 다른 덕들은 단지 하늘 왕국을 약속할 뿐이지만, 가난은 그 왕국을 지금 이곳에서 현재화시킨다. “영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예수는 말하였다.

프란치스코와 초창기 형제들은 예수의 말씀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그 말씀들을 살아감으로써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 말씀들이 약속한 것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실현되기를 갈망하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형제들이 설교하고 증언했던 아씨시의 시민들이나 인근 만물들에게 형제들의 삶은 진실로 하느님 나라를 현재화 시킨 것과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지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자들인 것처럼 생각하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안달하는 우리들과 프란치스코의 생각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 프란치스코에게는 가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가난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우리사이에 거주하시기로 선택하셨을 때 현재화된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복음을 읽는 것처럼, 하느님께선 우리가 영이 가난할 때에 비로소 거주하시길 택하신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사이에 거주하시도록 우리가 무엇을 끌어안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면 산상수훈의 첫 번째를 산다는 것의 암시는 무엇일까? 14세기 프란치스코회의 작품인 <세 동료의 전설>은 프란치스꼬가 어떻게 마음이 가난하게 되었는가를 말한다. 젊은이로서, 그는 다른 젊은이들처럼 그의 삶으로 무엇인가 하기를 원했으며 자신만의 고유한 기여로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의 정신과 마음에 빛을 비추시라고 계속해서 요청하고 있었다.

이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프란치스꼬가 하느님께 열렬히 기도하고 있을 동안에 응답을 받았다.

“오, 프란치스코야, 만일 네가 나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면, 너는 지금까지 네가 사랑했고 너의 것으로 만들기를 갈망했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혐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하기 시작하면 전에는 달콤하고 즐거웠던 모든 것들이 쓰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며, 그리고 전에는 너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것들이 큰 달콤함을 가져다 줄 것이며, 너는 평화롭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삶 안의 중심적인 원동력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실제로 하느님의 이런 말씀들을 들었든지 안 들었든지, 또는 하느님이 그의 마음에 말씀을 하셨든지 안하셨든지, 혹은 목숨을 잃는 것이 얻는 것이라는 복음서의 역설의 말씀을 읽고 단순히 영감을 받았든지 아니었든지, 요점은 프란치스꼬가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실행한다는 것이다.

그의 가난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는 수동적인 희생정신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행동하고 선택하는 한가지 길이다. 그것은 사랑이지, 때때로 생각되어지듯이 자기 혐오나 가난부인을 포옹하도록 다그치며 자신의 죄들을 벌주려는 욕구가 아니다.

이러한 심오한 기도체험을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아씨시 근처에서 말을 타던 중 그는 한 나병환자를 만나고 이러한 환자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일어나는 압도적인 공포심으로 가득 찬다. 그러나 이번엔 대단히 노력을 하여 혐오감을 극복한다. 그는 말에서 내려 그의 손에 키스를 하고 나병환자에게 동전을 준다. 나병환자는 그에게 평화의 키스를 한다 그리고나서 프란치스꼬는 말에 다시 올라서 사라져 간다. 그날부터 그는 고행을 더 늘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완전한 승리를 하게 된다.

무엇에 대한 완전한 승리인가? 그것은 프란치스코의 기도에 대한 답으로부터 그리고 승리란 어두움과 바르게 보지 못하는 무지에 대한 것이라는 이어지는 이야기로부터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나병환자들을 불쾌하게 보는 눈멀음과 실제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가난이 만일 내가 그 손에 키스하기만 한다면 궁극적으로 나에게 가장 큰 달콤함과 만족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나병환자에게 입맞춤을 한 것은 프란치스코에게 위대한 각성의 순간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에게 하신 하느님 말씀의 진실함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가 남은 그의 생애 동안 고통받기로 선택한 가난함과 결핍은 진실로 나병환자의 손에 키스를 하게 하고 그를 가난하게 하며, 하느님께서 세상을 보시듯 세상을 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더 지니게 하는 것이다.


<출처> 머레이 보도의 <성 프란치스꼬의 길-모든 이에게 도전하는 프란치스꼬의 영성>, 참사람되어 2002년 3월호 번역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