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인 사람들, 신을 믿는 사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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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사람들, 신을 믿는 사람이란
  • 한상봉
  • 승인 2016.09.19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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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한 변론] , 카렌 암스트롱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9
by martin Erspamer

세계적인 종교학자이며 종교비평가인 카렌 암스트롱(Karen Amstrong)은 <신을 위한 변론>을 썼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앞서 말하자면 “신은 변론이 필요없다.” 리처드 도킨슨 같은 학자들이 <만들어진 신>과 같은 책을 내면서 신에 대해서 공박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신’이 아니라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간디가 예수를 존경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문제 삼은 것과 마찬가지다. 한걸음 더 나가자면, 제도종교에 의해 길들여진 신이 문제다.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한다.

신앙인들은 이론상 신이 완전히 초월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하느님이 정확히 누구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기대하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신을 원하는 대로 길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내 나라에 축복을 내려달라고, 우리 여왕을 지켜달라고,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소풍가는 날 좋은 날씨를 달라고 하느님께 수시로 부탁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혹시 깜박하기라도 할까 봐,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우리는 비천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느님께 거듭 일러준다. 정치인들은 자기네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하느님을 인용하고, 교사들은 교실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하느님을 이용하며, 테러리스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잔혹한 일을 찌른다. 선거나 전쟁에서는 상대편 역시 하느님이 아끼고 돌보는 하느님의 자녀들일 텐데도 하느님께 ‘우리’ 편을 들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하느님은 우리가 이해 수 있는 방식으로는 선하지도 성스럽지도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만약 하느님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고 지혜로운’ 분이라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분일 수 있다.

수행 없이 종교 신앙 없다

그러면 정말 ‘종교’란 무엇일까? 종교는 본래 사람들이 생각한 무엇이 아니라 행한 무엇이었다. 종교의 진실은 단순히 교리 내용을 “맞아요!”하고 동의하고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운전 교본과 교통법규집을 읽었다고 운전을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교본만 열심히 읽는다고 춤이나 그림이나 요리를 배울 수는 없다. 이런 것은 지속적이고 헌신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날 음악가는 음악에 심취해서 몰아지경에 빠지고, 무용가는 춤과 혼연일체가 되며, 스키선수는 슬로프를 질주해 내려올 때 외부세계와 완전히 합일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그냥 ‘기분 좋음’을 훨씬 뛰어넘는 만족감이며, 그리스인들이 ‘엑스타시스’(ekstasis)라고 부른 것이다. 엑스타시스란 일상의 ‘밖에 서다’라는 뜻이다. 결국 교리공부가 아니라 상식을 뒤엎고 일상의 요구를 뛰어넘는 수행을 통해서만 종교의 본질을 꿰찰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무신론

그렇다면 우리가 수행을 통해 제 것으로 만들어야 할 종교의 핵심적 가치는 무엇일까? <신을 위한 변론>에서는 다양한 종교전통을 소개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종교만을 상대로 살펴본다. 대사제 중심의 성전 유대교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책의 종교’로 발전하면서 유대교 역시 일종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언젠가 랍비 여호수아가 성전파괴의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스라엘이 속죄의 길을 찾는 장소가 이처럼 폐허가 되다니.” 그러나 랍비 요하난은 차분히 대답했다. “슬퍼하지 마라. 우리에게는 성전 못지않은 속죄의 길이 있으니,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랍비 힐렐의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이교도가 힐렐을 찾아와 힐렐이 한쪽 다리로 선 채 자신에게 토라(모세오경) 전부를 가르쳐주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힐렐이 대답했다. “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이것이 토라가 말하는 전부이며 나머지는 해설에 불과하네. 가서 공부하게.”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유대교에서는 친절함이 성전의 제의를 대신하고, 공감과 자비가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다. 랍비들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증오심을 갖는 것은 무신론에 해당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살인은 인간에 대한 죄일 뿐 아니라 신성모독이기도 했다.

믿음이란,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 아니다

예수의 경우에는 자신의 신성을 믿으라는 요구보다 헌신을 강조했다고 암스트롱은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주고, 배고픈 자들을 먹여주고, 혈연에 구속되기를 거부하고, 자만심과 특권의식을 버리고, 하늘을 나는 새나 들판에 핀 백합처럼 살면서 아버지 하느님을 믿기를 바랐다.”

예수의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이들에게, 심지어 매춘부나 세리들에게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자비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이 자비의 대상은 통념상 고결하고 존경할만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러한 복음적 충실함은 산도 움직일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인간의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들에게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교리)명제들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었다. 암스트롱은 예루살렘의 주교 키릴루스의 사례를 든다. 키릴루스 주교는 개종자들에게 미리부터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의례과정을 통해 단식과 기도, 예배와 신앙교리에 대한 안내를 받고나서, 신조를 암송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에게 헌신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종교의 핵심 키워드는 자비와 공감

이슬람교 역시 ‘믿음’보다 ‘삶’을 강조했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560~632)는 620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이라고 생각한 존재로부터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 그가 받은 하느님의 메시지들은 결국 ‘암송’을 의미하는 ‘꾸란’이라는 경전이 되었고, 이 꾸란의 종교가 하느님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는 ‘이슬람’이다. 꾸란과 이슬람교는 ‘믿음’에 관심이 없었다. 난해한 교리를 공식적으로 따지는 신학적 사변은 ‘잔나’(zannah)라 하여 무시되었다. 잔나는 그 누구도 입증할 길 없는 문제들을 제멋대로 추측해서 괜히 사람들이 종파를 갈라 싸우게 하는 일을 의미했다.

이슬람교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꾸란의 기본 메시지는 공감(자비)을 실천하라는 도덕적 요구였다. 개인의 부를 쌓는 것은 악이고, 부를 공정하게 나누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선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은 미크라, 기도, 금식, 자선, 순례 같은 헌신적 활동이다. 꾸란에서 신앙이란 “부를 나누고 정의로운 일을 행하며 땅바닥에 엎드려서 자기를 비우고 자아를 굽히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불신자를 뜻하는 ‘카피룬’은 하느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거만하며, “걸핏하면 화를 내고 자기의 명예와 특권에 관해서 예민하며, 거칠게 보복하는 파괴적 성향이 있는 사람”이다. 이슬람교의 본질은 사실상 최근 테러리스트로 지목되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다. 무슬림들은 “복수는 알라의 몫으로 남겨두라”면서 정중함과 관대함을 덕으로 삼았다. 이들이 말하는 ‘지하드’라는 말도 ‘거룩한 전쟁’(聖戰)이 아니라 ‘노력’이나 ‘분투’를 뜻하는 것이다. 모순투성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말이다.

신앙인, 신성함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제사용 그릇

카렌 암스트롱

암스트롱은 “태초부터 인간은 헌신적이고 고된 종교적 행위를 되풀이해 왔다”고 말한다. 그들은 표현하기 힘든 방식으로 인간성을 고양하고 충족하는 신성함과 접하게 해주는 신화, 의례, 도덕적 규율을 발전시켜 왔다. 그들이 그렇게 독실했던 이유는 단지 신화와 교리들이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믿을 만해서가 아니고 우주의 기원에 관해 알고 싶어서도 아니며 더 나은 사후세계를 원해서도 아니었다. 권력에 굶주린 사제와 왕들이 믿음을 강요해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는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맞서도록 도와주었다. 종교의 의미는 지금 현재의 삶을 치열하고 풍요롭게 사는 데 있었다. 이를 두고 암스트롱은 “종교적인 사람들은 야심찬 희망을 지녔다”고 했다.

그들은 꿈을 꾸면서, 자연을 사색하면서, 서로 그리고 동물들과 소통하면서 일상적으로 환희와 통찰의 순간들을 겪기를 소망해 왔다. 그들은 삶의 고통에 짓눌려 신음하기보다 고통 속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갈망했다. 욕심 부리고 옹졸하게 굴기보다 관대하고 공정하며 최대한 인간적으로 살아가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평범한 물잔이 되기보다 공자의 말처럼 ‘신성함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제사용 그릇’이 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인간 개개인에게서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찬미하며 이방인,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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