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엄마, 이상한 엄마, 수상한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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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엄마, 이상한 엄마, 수상한 엄마
  • 신승철
  • 승인 2016.09.19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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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철의 Ecosophia: 희망-2]

엄마는 주파수가 다른 라디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 직장인들, 자영업자들은 모두 엄마의 아들딸입니다. 그것은 예외가 있을 수 없는 명제입니다. 우리의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자면,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쓰다듬어 주던 엄마의 손길, 환한 미소를 담은 엄마의 표정, 깊이가 느껴지는 엄마의 눈빛이 있습니다. 아마 아주 어릴 적에는 엄마의 돌봄의 흐름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에 있을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조금씩 나이가 들고 사생활이 생기면 엄마의 말이 왠지 잔소리처럼 느껴지고 간섭처럼 다가옵니다. “차 조심해라”, “밥은 먹었니?”, “늦지 않게 일찍 다녀라” 등의 이토록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에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대답하게 되니까요.

분명 엄마는 주파수가 다른 라디오 같을 때가 많습니다. 다 커버린 아들딸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아이들처럼 대할 때가 있으니까요.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마치 고장 난 녹음기와 같을 때도 많지요. 그게 싫어서 귀찮아서 엄마의 돌봄을 간섭으로 여기게 되나 봅니다. 기억해 보면 엄마의 시간은 대부분 돌봄노동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밥하고 쇼핑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 엄마는 보이지 않게 가정을 일으킨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집에서 그토록 땀을 흘리고, 챙기고, 보듬고 그러는 억척스런 엄마의 삶처럼 살지 않겠다는 아들딸들이 많습니다.

엄마의 주파수는 어디에 맞추어져 있을까요?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엄마처럼 반드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야 할까요? 누군가는 사랑할수록 사랑이 증폭되는 것이 돌봄이라고 합니다. 또 누군가는 여성의 살림은 자본주의의 세포단위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공동체를 자기생산하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온건히 사랑하고 돌보는 엄마는 지금 세대와는 많은 차이와 어긋남, 빗나감을 만들어냅니다. 오늘은 주파수가 다른 엄마의 라디오, 엄마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살림, 차이 나는 반복

어릴 때 저는 젓가락질을 잘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너 젓가락질 못하는구나! 배우면 쉬워 이렇게 해봐”하면 ‘관심이 많아서 그러는구나’ 생각이 들어 그 때마다 젓가락질을 배우는 척 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젓가락질에 대해서 지적하면, 일부러 포크를 들고 밥을 먹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늘 그런 저의 뿔난 행동에 서운하지도 않은지, “편식하지 마라, 이것도 먹어라”라고 반찬을 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엄마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그저 가족 속에서 으레 그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늘 챙겨주지만 간섭하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고 자취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챙겨야 할 것이 많은 게 살림인줄 몰랐으니까요. 또한 살림이란 끝없는 반복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아침을 먹으면 점심이 다가왔고, 그 다음 저녁이 다가왔습니다. 와이셔츠를 빨고 자면 이튿날 다시 빨아야 했고, 세금을 이번 달에 내면 다음 달에도 내야 했습니다. 그러한 반복은 어머니가 왜 똑같은 얘기를 반복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저는 직장 다니면서 이따금 시골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밥은 잘 먹고 다니냐?”. “편식하면 안된다”라는 얘기가 또다시 전화기 너머로 들렸습니다. 여전히 주파수가 다른 엄마의 라디오가 반복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엄마의 살림과 간섭의 반복은 어떤 성격의 반복일까 고민하기 시작하고, 나중에서야 그것이 해명되었죠.

제가 대학원을 다닐 때 반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반복강박’입니다. 다시 말해 동일한 것, 뻔한 것이 반복되는 비루한 일상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른 하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급한 ‘차이 나는 반복’입니다. 아침-점심-저녁, 밀물과 썰물, 사계절과 같은 ‘자연과 생명의 반복’이 그것입니다. 똑같은 것이 행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한 차이가 생산되는 반복이 그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창조하고 생성하는 반복입니다.

저는 엄마의 살림이 이러한 ‘차이 나는 반복’이고 일정한 리듬과 화음으로 가득찬 반복이라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살림이 접속하고 있는 삶의 내재성은 늘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반복되는 생성과 사건의 순간이라고 생각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어머니가 살림이라는 ‘차이 나는 반복’의 화음 속에서 반복된 얘기를 하면, 왠지 저는 반복강박적으로 동일하고 뻔한 것의 반복된 간섭처럼 매번 오해했던 것이지요.

차이 나는 반복은 생태계, 생명, 공동체의 약속입니다. 엄마의 살림이라는 차이 나는 반복과 접속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눈치 챕니다. 사랑과 돌봄, 살림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대한 자연, 우주, 미생물, 생명, 사물의 차이 나는 반복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엄마의 살림은 문명에 의해서 가려진 반복의 화음으로 가득찬 공동체의 오래된 약속을 보여주는 징표와도 같습니다. 왜 간섭처럼 느꼈을까요? 한 사람을 온건히 사랑하고 돌보고 싶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계속 얘기를 계속 하면, 왜 귀찮고 촌스럽고 쿨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을까요?

사진=한상봉

열린 공동체의 약속, 이상한 엄마 되기

그리고 저는 어느덧 40대 중반이 넘은 중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따금 엄마에게 묻습니다. 왜 어릴 적에 그렇게 간섭처럼 참견처럼 제게 얘기했냐고? 그런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뻔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저희 엄마는 사실 알고 보니 굉장히 이상하고 특이한 엄마였습니다. 보통의 일반적인 엄마의 범주가 있다면 그것에 속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책을 많이 읽는 제게 철학이라는 돈 안 되는 학문이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철학책을 먼저 읽고 책꽂이에다가 재미있을 만한 것들을 몰래 꽂아두었던 엄마였습니다. 간섭처럼 느껴질 것 같아, 일부러 말 안하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한 일이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엄마의 말이 대개 간섭이라고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고 마을과 공동체, 협동조합 등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했습니다. 특히 생활협동조합원들은 저의 엄마처럼 남을 챙겨주고 살림하고 돌보는 엄마들이었지요. 그런데 그녀들도 무척 이상한 엄마들이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폴라니, 푸코, 고진, 신이치 등 인문학을 공부하는 엄마들이었습니다. 이 엄마들도 아이들이 자라나면 엄마의 말은 간섭이라고 들을 엄마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사랑과 돌봄이라는 공동체의 오래된 약속에 대해서 눈뜰 정도로 나이가 들면 얼마나 우리 엄마가 특이하고 이상했는지를 눈치 챌 것이라는 점을 말이지요.

사실 저는 엄마의 돌봄이 당연한 것이고 간섭이라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중학생 때였고, 사춘기 때였습니다. 엄마가 “너 머리가 긴 것 같은데”라고 한 마디라도 하면, 그 순간 뒷산으로 팽하니 올라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땐 엄마의 말은 무엇이든 껄끄러웠습니다. 제게도 사생활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마치 아직도 배냇저고리에 있는 아이를 대하듯이 말하고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무척 싫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의 엄마들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그 한결 같이 반복되는 돌봄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와 공동체들이 지속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세상의 엄마들은 모두 특이하다

엄마들의 말이 다 간섭으로 여겨졌던 때를 생각해 보면 엄마가 늘상 하던 얘기를 반복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엄마의 살림의 반복, 삶의 반복, 생활의 반복이 오케스트라의 화음과도 같은 ‘차이 나는 반복’임에도, 저는 똑같은 얘기들이 지겹게 반복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점심-저녁 동안 엄마는 늘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늘 자연의 반복, 생명의 반복, 공동체의 반복과 함께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텃밭을 일구어서 잡초를 새벽부터 뽑고, 텃밭에서 나온 상추로 다섯 가지의 다른 반찬을 만드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텃밭에서 일하면서 광물, 야채, 잡초, 벌레, 씨앗, 퇴비 등의 지혜를 터득하였던 분이셨습니다.

성당에서 구역모임이나 미사가 있을 때면, 본인은 가족들 몰래 성당에 다녀왔으면서도 다른 식구에게는 성당에 나가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때는 한 마디 않으셨던 그런 얘기들을 이제 나이가 들자 우리에게 터놓고 얘기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엄마의 특이한 면, 수상한 면, 이상한 면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 젊은 세대들도 결국 엄마의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될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가 지금 당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엄마의 시간이 갖고 있는 반복의 레퍼토리를 동일한 것의 반복, 비루함의 일상의 반복이라고 여기고, 그 속에 담긴 깊이와 지혜의 넓이, 따뜻하고 포근함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엄마들의 돌봄과 살림이 갖고 있는 ‘차이 나는 반복’, ‘특이성의 반복’, ‘소용돌이치는 반복’을 ‘반복강박’, ‘동일성의 반복’, ‘뻔한 것의 반복’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엄마들 한 사람 한사람이 ‘이상한 엄마’였고 ‘특이한 엄마’였고, ‘수상한 엄마’였다는 점을 눈치 채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뻔한 엄마도 없고, 그저 똑같은 반복되는 얘기로 간섭하려고만 하는 엄마도 아마 없을 겁니다. 이제 독립하여 나이든 저로서는 엄마의 말을 간섭이라고 착각했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러나 엄마의 특이함을 발견하게 되는 때에 모두 간섭으로 여겨지던 마법의 사슬이 풀리고 영적 깨달음에 도달하는 경험도 저로서는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세상의 엄마들은 모두 특이한 엄마들이고, 엄마의 살림과 돌봄이 화음과 리듬을 가진 차이 나는 반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마침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엄마의 말이 간섭이 아니라 따뜻한 돌봄으로 느껴질 순간입니다.
 

신승철 바오로
동물보호 무크지 <숨>에서 동물권에 대한 공부 시작.
문래동 예술촌에 연구공간 ‘철학공방 별난’ 운영.
<마트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들>, <철학, 생태에 눈뜨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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