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복음'에 관심 없는 사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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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복음'에 관심 없는 사제들
  • 한상봉
  • 승인 2016.09.1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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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세속화 시대, 성직자 권위주의에 대한 유감-7
사진=한상봉

[한상봉]

한국교회 안에서 어쩌면 복음에 충실한 사람이 오히려 외로운 시대인지 모른다. 프란치스코 교종마저도 참담한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내심 교황청에서 외로울지 모르겠다. 시인 백석은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 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고 했다.

이 시가 가슴에 전율을 일으키는 사제들은 행복하다. 가슴 한편이 젖어오고, 급기야 ‘동무’를 만난 기쁨이 스며드는 사제는 행복하다. 세상이 주는 칭찬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온전히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신을 위해서'라는 말은 옳지 않은 표현이다. 신은 ‘여격’에 놓여서는 안 된다. 신을 위해서 이웃에게로 갈 것이 아니라, 신에게 쫓겨서 이웃에게로 갈 것. 사수가 쏘아야 화살이 표적을 향해 날아가듯이."

여격(與格)이란 “사람이나 동물을 나타내는 체언 뒤에 쓰여, 그 체언으로 하여금 무엇을 받는 자리에 서게 하는 부사격 조사. ‘에게’, ‘께’, ‘한테’ 따위가 있다.”고 사전에 적혀 있다.

베유에 따르면, 예수회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으로 들린다. 실상 하느님은 인간이 주는 영광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인간 안에 이미 그분의 모상성(image)이 담겨 있기 때문에 내 안에 계신 그분이 나를 부추겨 이웃에게로 가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러한 하느님의 의도에 대하여 ‘예(fiat)’라고 동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의도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이며, 곧 나에 대한 반역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가는 것은 그분의 모상대로 지어진 나를 실현하는 길이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다.

그래서 사제가 이웃을 ‘내 몸’처럼 돌보기 위해서는, 먼저 내 몸을 사랑하고 돌보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며, 결국 남을 사랑할 수 없다. 나에게 관대하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도 엄격하다.

하느님은 ‘자비’이시니 먼저 나를 관대하게 품어주고, 그 힘으로 남을 품어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사제가 평신도를 업신여기며 권위주의에 빠져 있을 때, 사실은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하거나,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그러나 더 슬픈 현실은 언젠가부터 복음 자체에 대한 사실상의 관심이 사라진 것이다. 관습적인 신앙이 문제인 것처럼, 복음에 대한 관습적 이해도 문제다. 그렇다고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사제들은 직무상 늘 그분의 말씀을 접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미 들었던 복음에 대한 민감성만 회복한다면, 교회와 세상은 예전과 다른 얼굴로 낯설게 보일 것이다. 그 안에서 하느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행동하는 사랑, 한상봉, 리북,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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