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착오, 실수연발... 그래도 공동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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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착오, 실수연발... 그래도 공동농장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6.09.13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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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공동 농장-2

피터는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그 에이커의 땅에 꽤 흡족해 하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농토와 넓은 면적과 동물들을 원하였다. 그래서 공동농장을 하는 계획은 1935년 그해 겨울내내 계속되었다. 나는 어느 토요일 오후 젊은이들이 땅에 대하여 대화하고 있던 동안에 아이다의 중계방송을 들으려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몹시 추운 겨울을 보냈으며 밖에는 거무스름한 눈이 땅위에 무겁게 쌓였고 빙판은 길가를 덮었고 하늘은 어두웠다. 우리는 방안에서 추위에 떨었다. 보일러관은 항상 얼었으며 얼지 않았을 때에도 집안을 덥히는 것이 어려웠다. 우리는 내년 여름을 고대 하면서 우리의 불편을 잊으려고 하였다.

각자는 자기자신의 바램에 따라 공동체를 그렸다. 에디는 인쇄업자였는데 그는 현금을 벌기 위하여 농장에 작인인쇄소를 세우는 것에 대하여 말하였다. 빌은 사랑에 빠져서 집을 짓는 꿈을 꾸었다. 짐은 기술자였는데, 그는 트랙터 뒤에 앉아서, 쟁기를 끌거나 스프 배급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시로 야채를 운반하는 트럭을 운전하는 자신을 그려보았다.

이 모든 토론 중에서 남부의 한 마을 출신 교사이며 독자였던 한사람이 보낸 편지가 행동을 촉진시켰다. 그녀 또한 시골에서 기도하는 삶을 살면서 여름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공동농장의 생각에 매혹 당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녀가 건축자재를 제공하고 그녀의 작은 집을 우리가 지어주는 조건으로 농장측에 1천 달러를 희사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것으로 그녀는 3에이커의 땅을 차지할 것이었다. 그녀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실업자들에게 일을 줄 것이며, 우리가 빵배급을 하여 “사람들을 구호대상자로 만들고 그들을 태만에 빠지게 한 것”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는 그녀가 편지에서 제안한 것처럼 시골에서 살려는 이 미래의 동지의 성격에 대하여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그녀처럼 생각하는 그 어느 누구도 좋아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았다. 나는 상세하게 우리 같은 사람들에 대하여, 그녀가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묘사함으로써 그녀를 단념시키고자 하였다. 나는 우리가 성인들의 공동체가 아니고 오히려 어떤 원칙들을 성취하려고 하는 단정치 못한 개인들의 그룹일 뿐이며, 그 그룹의 장은 인간의 자유와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분석이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우리가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보낼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들이 비이성적으로 또한 증오에 차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사랑으로 증오를 극복하고, 사람들을 그렇게 만드는 힘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배경과 교육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배우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사나운 사자에서 순한 어린양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랑 속에서 실천하고 사랑하는 것을 배우며 사랑의 대가를 치루는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교사 친구는 그래도 우리가 농장을 찾아보기 시작하라고 주장하면서 답장을 보냈다. 그래서 우리는 자동차를 빌려서 뉴져지의 빙판길을 다니며 찾기 시작했다. 성 이시도르 농부 축일인 4월 19일에 우리는 펜실베니아의 이스턴에서 3마일 떨어진 언덕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 아름다운 봄날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운전을 했던 큰 댄은 풀밭으로 뛰어들더니 “땅으로 돌아가자!”고 신명나게 외쳤다.

그 농부의 아내인 듀브로우 부인은 우리에게 으깬 감자와 말린 버섯으로 만든 스튜우, 아스파라거스와 집에 저장해둔 과실로 저녁을 주었다. 우리가 먹었던 그 모든 것이 그 땅에서 재배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우리는 전율했다. 그 농장은 바로 우리가 원했던 농장인 것 같았다. 아름다운 숲과 한 개 내지 두 개의 들판이 있었다. 그리고 땅의 나머지는 모두가 언덕이었다. 헛간까지는 오르막이었으며, 내려가는 길에 샘물이 있었고 목장까지는 다시 오르막이었다.

우리는 그 땅을 당시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폴란드계 가족으로부터 1250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였다. 친구에게서 천 달러를 얻었고 나머지 250달러는 쉽게 모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땅에 너무나 만족했기 때문에 계약금을 지불하고 나서 신선한 달걀과 싱싱한 채소들과 함께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느낌으로 뉴욕으로 돌아왔다. 성 프란치스코는 “여러분은 여러분이 실천하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농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공동농장에 대하여 쓸 수 있겠는가?

그 땅을 구입한지 얼마 안 되어 우리는 28에이커의 땅 전체에 물이 없으며 단지 헛간과 집에서 흘러나오는 빗물을 받기 위한 물 저장 탱크 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그렇게 기뻐하며 달렸던 샘은 이웃농장의 것으로 판명났다. 몇 주 뒤에 어부들의 파업이 뉴욕에서 일어났다. 그들 중 한 그룹이 도움을 청하려고 우리에게 다가 왔을 때 우리는 그들 중 20명을 돌볼 준비를 하느라고 너무나 바빴다. 그래서 짐과 중서부지방의 한 대학생에게 농장을 여는 일을 위임해야 했다. 그들 두 사람은 스테이튼 섬에 있는 집을 닫고 대부분 가톨릭 일꾼 신문독자들과 친구들이 기증한 물건들을 새로운 장소로, 우리들이 마리아 농장이라고 이름 붙인 곳으로 옮겼다. 그해 여름에 집과 헛간과 짐수레 창고는 모두 꽉 들어찼다.

전국 비스켓 산업 파업기간 동안에 알게된 전직이 편집자였으며 지금은 몸이 아픈 존슨씨와 그의 아내가 그 집을 책임 맡기 위하여 내려갔다. 그들은 또한 내 어린 딸을 돌보아 주었다. 다락은 곧 남자들을 위한 기숙사로 꾸며졌다. 우리의 첫 손님들 중엔 파업중인 어부들도 몇 명 있었다. 나머지 두 개의 침실은 여자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가 옛 모트가의 셋집을 사용하도록 주선했던 게르트루트 버크는 할렘으로부터 한번에 6명의 아이들을 보내며 친절하게도 그들의 배 삯을 지불해주어서 우리를 크게 도왔다. 우리는 헛간에 그들을 있게 했는데, 그곳에서 6월에 도착하기 시작한 대학생소녀들이 아이들을 돌보아줄 수 있었다.

실제로 버크가 보낸 아이들은 전조에 불과 하였다. 너무도 자주 사제들과 수녀들과 신문의 독자들은 우리에게 알콜 중독자들과 병원에서 막 퇴원한 정신 질환자들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이 먹을 음식 비용을 함께 보내는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돈을 모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결국 이런 상황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땅에 의지해서 살 수 있다고 쓰지 않았는가? 이제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주님은 항상 보답해 주셨다. 다른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우리에게 선물들을 보냈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는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인다면 그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선 우리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셨다. 우리는 많은 실수를 하며 머뭇적거리면서 농장을 만들어나갔다. 한 대학 졸업자는 자기 자신이 선택한 채소들을 심으려고 귀중한 아스파라거스 밭을 반이나 망쳐 놓았으며, 다른 이는 잡초 덩굴이라 생각하면서 고구마를 전부다 뽑아내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거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가르침을 받았다. 예를 들면 소를 구입했을 때 그랬다. 캔사스의 독자인 노젠버그 부부가 소를 살 돈을 우리에게 보내왔다. (후에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따서 소이름을 ‘로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소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인쇄업자인 에디는 어린 시절 방학 기간 중에 우유 만드는 일을 해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기계공인 짐과 대학생인 Cy와 함께 이웃 농장에 가서 흥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주인 농부에게 오직 50달러만을 지불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젖소들로 가득한 들판을 보여주면서 젖소를 고를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들판으로 가서 그들이 데려올 만한 온순한 소 한 마리를 데려왔다. 그 소가 우유를 쉽게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그들은 즉석에서 그 소를 사서 언덕 너머에 있는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그들이 산 소는 늙은 소였다는 것이 밝혀졌으나 우유는 많이 생산하는 소였다. 로지는(소는) 오직 한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름이 지나자 무리를 그리워하는 것 때문에 항상 말뚝을 뽑고 달아나버리곤 하였다. 울타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로지를 데려오기 위해서 그 세 명의 구매자들 편에서는 강제로 끌어당기고 데려오는 것에 의존해야 했는데, 그들은 보통 함께 로지를 돌보았다.

아마도 농부로서는 우리가 형편없었으나 그 해 여름에 메리 농장은 행복한 집이었으며 그 후로도 많은 여름동안 행복한 곳이었다. 얼마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왔었던가! 서커스에서 차력사로 일했던 한 남자가 있었는데, 러시아 곡예사들의 한 팀이 그의 어깨 위에서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보름달이 뜨면, 그는 집 뒤에 있는 언덕편에서 옆으로 재주넘기를 하곤 했다. 그는 존 그리핀을 놀라게 하였는데, 존은 폐렴을 앓고 난 후 회복기에 있었으며 막 바우어리에서 우리에게로 왔었으며 마차헛간에서 잠을 잤는데, 그는 항상 베개 밑에 고기 자르는 도끼를 두고 잤으며 아니면 적어도 그렇게 하겠다고 우기곤 했다.

우리와 여름을 보냈던 한 젊은 신학생은 새끼 돼지 6마리를 가지고 왔었다. (그것들은 집 옆에 있는 꽃밭에 우리가 만들었던 작은 기도소에서 로사리오 기도를 하고 있었을 때 축사에서 달아나버리는 습관을 제외하고는 재미있었다.)

우리의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존 그리핀은 다 나았을 때 울타리와 시골풍의 벤취들을 곳곳에 만들어 주었다. 파업기간 중에 우리에게 왔었던 사람들 중 한사람인 어부 존은 우리와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기에 이제는 농부 존으로 알려진다. 프랭크는 아이리스와 장미나무, 팬지, 국화나무와 패튜니어를 심었다.

노동자들과 학자들간의 다툼은 꽤 오랫동안 이곳에선 시작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학자들이 시골풍의 벤취들 주위에 앉아있는 것에 불평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거나 야채를 준비하는 여자들이 항상 벤취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식은 때때로 부족했으나 토론은 길었다. 특히 여름에는 피터 모린의 생각들을 듣기 위해서 농장으로 온 학생들과 교사들로 법석대었다. 이 때는 평화시였는데 비록 교종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무장한 국가의 유용성에 대하여 말했을지라도 우리의 사고는 그 시대의 중대한 문제로서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 실업과 가족의 생존과 같은 문제들이 우리 마음에서 가장 윗자리에 있었다.

메리 농장에 왔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후에 표현된 인상들은 모순적인 만큼이나 계발적인 것이었다. 한번은 나라 전체에 흩어져 있는 10개의 대학에서 온 학생들이 방문하였다. 그들의 현저한 기억은 그들이 상치를 먹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한 교사는 사회학적인 관찰에 관하여 긴 학문적인 보고서를 썼는데, 그는 농장이 가족들에게는 실패이지만 독신 어부들을 위한 피난처로서는 성공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그가 머물러 있던 때에 우리에겐 단지 세 명의 어부만이 있었는데 말이다!).

한 어부는 이렇게 농장생활을 묘사하였다. 즉, “내가 처음에 왔을 때, 나는 이 모든 사제들과 교수들과 대학생들과 멋쟁이 여성들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 항구마다 도착해서 술을 마셔왔는데 부두를 제외하곤 결코 해변 어느 곳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모든 어부는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은퇴해서 일할 수 있는 닭농장처럼, 한 조각의 땅을 꿈꾼다. 그러나 시골에서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바다에 있을 때 배 위에서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과 어울리곤 했다. 그래서 공동농장은 그에겐 해답이 된다.” “그래요.” 그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내가 하늘 나라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나는 곧 어느 곳에 있든지 사람들은 모두 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얼마 전에 짐 몬태규는 결혼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아기 한 명이 있었는데 이어 또 하나를 더 낳았다. 세 아이가 되었을 때 우리는 한 가족의 성장과 우리 자신의 발전을 비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이상들이 오직 천천히 심지어는 한 어린이의 성장보다도 더 천천히 성취된다는 것을 우리의 머리를 통해서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상들이 우리가 보기에 흐뭇하게도 마치 어린 송아지와 염소들이 그렇게 하듯이 제 발로 어엿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기를 원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긴박한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그 첫 번째는 물 문제였다. 실업자가 된 한 택시 기사가 그해 첫 여름 어느 날 잠시동안 우리와 머물려고 농장에 왔었다. 그는 그가 물을 찾는 특별한 기술이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날 오자마자 맹렬하게 땅을 파는 일에 시간을 다 보냈다. 짐은 해질녘이 될 때까지도 이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 남자에게 자신이 농장 주변에서 땅을 파보았다고 알려야했다. 그래도 낙담하지 않은 그 사람은 다음날 우리 땅에서 땅파기를 다시 시작하였다. 이번엔 그가 그의 직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물을 찾았다. 다음 해에 우리는 이웃 농장을 샀는데, 그곳엔 사랑스러운 샘물이 있었고 우리는 물 공급을 무한정으로 받았다.

우리의 식량 상황도 좋아졌다. 우리는 돼지들과 닭들, 소들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정원에서 품질 좋은 농산물을 풍부하게 키웠다. 사람들은 들락날락했으나 보통 25명 정도가 메리 농장에서 살았다. 이렇게 있을 곳이 마련되자 손님들이 늘어났으며, 우리는 그들 모두를 먹여야했다. 피터는 행복해했다. 그는 그의 가장 소중한 이상 중 하나가 실천되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년이 지나자 메리 농장과 피터 모린 농장에 관한 우리의 알림으로, 다른 공동 농장들이 많은 곳에 퍼져나갔다. 나는 그것들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으나, 뛰어난 농장들 중에는 미네소타주의 에이트킨 농장, 미시간주의 사우스 리용, 오하이오주의 에이본, 메사추세스주의 업톤, 버몬트주의 커팅스빌, 펜실베니아주의 옥스퍼드, 뉴욕주의 뉴버그 등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족의 친구’라고 부른 것처럼, 온화하게 일시적으로 손님으로 들어오지만 영원히 머물며 집안 일에 대해 무자비한 군주같이 변했던 그런 사람들이 늘 우리와 함께 있었다. 그런 친구중 한 명이 모리스 오코넬 노인이었는데 그는 84살까지 살았으며 메리 농장에 10년간 우리와 함께 살았다.

죽기 전 수주일 전에 병자성사를 주기 위해 성 버나드 교회에서 한 사제가 왔을 때, 모리스는 다음 번에 마을에 다니러갈 때 그에게 잠시 들리겠다고 쾌활하게 공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출현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장례 미사 후에 오코넬씨는 강 위쪽의 언덕에 있는 성요셉 교회 묘소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날씨는 맑고 봄날 같았지만 땅은 굳어있었다. 지난 10년간 그를 알았던 우리는 새로 판 무덤가의 차가운 땅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관이 땅속으로 내려질 때 오코넬씨를 생각하였다. 그 관은 값싼 회색빛의 관이었다. 그 때 나는 오코넬씨가 1940년쯤에 나를 위해 관을 만들어주면서도 자신을 위해선 결코 관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나는 그에게 내 관을 주어야한다고 느꼈기에 목수인 한스 터네슨이 나에게 다른 관을 만들도록 했다. 한스가 나를 위해 만든 관속에다 나는 담요들과 다른 침구들을 넣어두었다. 그는 제단과 성물안치소, 그리고 경당의 벤취에 칠한 것과 같은 밝은 노란색 니스를 그 관에 칠하였다. 그가 우리를 위해 만들었던 제의실과 벤취들은 여전히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피터 모린 농장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용될 것이다.

코넬씨는 낡은 헛간을 개조해서 스스로 작은 안락한 집을 만들었다. 그는 죽기 전 1년동안 한 가족과 함께 지낸 것을 제외하곤 그 집에서 계속 혼자 살았다.

코넬씨의 건물은 아름답다거나 상상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은 실용적이었다. 그는 결코 헌 재료들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새 소나무 널판과 못들을 통으로 요구하였다. 타르종이로 지붕과 벽을 덮었는데 다른 건물들에는 훨씬 못 미쳤다. 그것은 재료의 부족 뿐 아니라 능력과 창의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이스튼의 메리 농장에는 가난의 모습이 다양했다.

그는 또한 내 딸인 타마를 위해서도 작은 오두막을 지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와 생일 때 받은 돈을 수년동안 저축했는데 85달러나 되었다. 이 돈으로 그 당시에 이층침대, 선반, 식탁과 의자, 그리고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나무 상자가 있는 작은 장소를 만들기에 충분한 나무판자를 샀다. 나는 난방을 할 수 있을 만큼 더 넓은 오두막을 원했다. 그런데 그것은 가장 작은 올챙이 난로로도 더워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코넬씨는 완고하였다. “나는 당신과 타마이외엔 거기에서 누구도 잘 수 없게 작게 만들고 있어요.” 사실은 다른 이들, 즉 일시적으로 방문한 사람들과 때로는 농장의 남자들이 거기에서 잠을 잤다. 후에 현관이 L자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그곳은 여섯 명이 자기에도 충분할 만큼 넓었다.

우리는 이스턴에서 살았던 기간동안 오코넬씨가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였는지를 아주 자주 기억해야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와 함께 일했는데, 예를 들면 존 필리거이다. 또한 짐 몬태규는 벌리 하우스에서 일했으며 게리 그리핀과 오스턴 휴즈는 짐의 집을 만드는 데 도와주었다. 하지만 진실은 누구도 오코넬씨와 오랫동안 일할 수가 없었다는 것으로, 왜냐하면 그가 성을 잘내는 기질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그려야하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성바오로는 “우리는 평안한가? 그래서 당신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도 또한 있었던 그대로의 일들에 대해 쓴다. 다른 사람들의 평안함을 위해서-이 세계에서 늙고 병들고 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사랑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사람들은 자주 단지 진실의 한 부분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비난받는다. 나는 현재에 대한 진실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자주 과거에 대하여 쓴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현재에 유익을 준다. 원칙들은 여전히 있으며, 진실도 같이 남아있다. 그러나 애덕을 거스리지 않고 어떻게 정직하게 쓸 수 있을까?

많은 노인들처럼 오코넬씨는 골칫거리였다. 그는 아주 오래 전에 아일랜드에서 왔으며, 카날가가 거리가 아니라 운하였을 때를 기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21명의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의 아버지는 목수이자 체육인이었다. 모리스는 그가 쾌활한 친구이고 힘의 재주에서 뛰어나다고 묘사했으며, 아내로부터 놀라운 관대함으로 경탄을 받았다. 모리스에 의하면 그녀는 모든 아이들을 돌보고, 빵을 굽고,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고, 집안 일을 혼자 다 했는데, 이 모든 일에서 결코 실패한 적이 없었다. 실로 모리스는 우리의 여성 친구들이 아이들을 돌볼 수 없었거나 다른 면에서 잘못할 때마다 우리에게 용감한 여인의 전형을 그려주곤 하였다.

모리스, 그는 퇴역군인이었으며 많은 군복들을, 즉 아프리카 남부나 인도 그리고 이 나라에서 입었다. 왜 그가 우리와 함께 머물렀을까?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그는 평화주의자나 유대인, 흑인들과 교제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동체에 관해서라면!

성 베네딕또에 의하면, 모든 현관에 나그네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다른 그리스도처럼 환영함으로써 환대를 모범화시키는 친절한 노인이 있어야한다.

그의 작은 오두막은 농장 입구 옆에 있었으며, 그는 결코 방문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환영이라니! 만약 방문자가 초라해 보이면 그는 호통을 쳤으며, 반면에 옷을 잘 차려 입었으면 아주 상냥하게 대하였다. 그는 공동체로 그의 동료들을 방문하러 왔던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드물게 난해한 사람이었다. “도둑들, 술주정꾼들, 그리고 게으름뱅이들, 이 모든 이들이!”-이렇게 그는 공동 농장의 일원이 되려고 결심한 이들의 특징을 나타냈다. 농장에 살고 있는 누구든 어떤 기술을 보여주면, “너희들은 무슨 교도소에서 그것을 배웠니?”라고 그를 비웃곤 하였다. 우리와 일년을 살고 난 후에 가톨릭 신자가 된 한 남자는 그 오두막 문을 지날 때마다 매번 모욕과 조롱을 당했다. “변절자, 죽 한 그릇에 신앙을 바꾼자야!”라고 모리스는 소리치곤 하였다.

그는 또한 주먹을 날리려했으며 오직 나이 때문에 매맞지 않았다. 그를 설득하여 좀더 협동적인 마음 상태로 만들려고 했던 한 여자 손님이 그를 격분시켰기에 그는 나무를 주먹으로 때려서 손가락 관절을 부러뜨렸다. 만일 누군가가 그와 의견이 달랐다면 그렇다, 폭력적이고 분노가 많은 남자 오코넬씨였다.

우리가 피정집을 시작한 첫 겨울에 농장의 세 명의 남자들이 헌 목재로 헛간 지붕을 수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모을 수 있는 도구들만으로 그 일을 해야했는데, 왜냐하면 오코넬씨가 우리와 함께 머문 지 9년째 되는 그 때에 자신의 오두막에 모든 도구들을 넣고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곳에서 총을 들고 그것들을 지켰다.

그해 겨울 피터 모린과 로이 신부와 다른 남자가 그 헛간에 기거하였을 때 오코넬씨가 병이 났고 그를 설득하여서 그 곳에서 간호를 받게 하였다. 그는 따뜻하고 포근하게 지냈고, 쟁반에 음식을 가져다주었으며 그러자 곧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그는 추운 시기동안 머물기로 결정하였으며 거대한 난로가에 자리를 잡았다. 헛간의 한쪽 끝은 난로와 벤취와 의자와 책선반이 있던 중앙으로부터 커텐으로 분리되어 있는 기도소였다. 피터와 오코넬씨는 침묵 중에 몇 시간씩 앉아있었고, 오코넬씨는 파이프를 물고 책을 들고 있었으며, 피터는 움직임 없이 그의 두꺼운 스웨터 속으로 턱을 내리고 몰두해있었다.

오코넬씨는 역사에 관한 위대한 독서가였는데 하지만 그가 보통은 그것들을 끼고있는데, 특별히 그의 이빨들(그는 그것들을 틀니라고 부르지 말도록 했다)을 빼놓고 논문을 쓰는 그를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매일 그레고리안 미사를 거행하는 아침에 특히 몇 달간은 어려웠었다. 아침에 7시에 미사가 거행될 때, 오코넬씨는 이를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는 10시나 11시까지 잠을 자곤 했었다.

그해 사순절 동안에 우리는 뉴먼의 설교집을 식사 중에 읽어왔다. 모리스는 뉴먼이 영국 사람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개종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 독서가 그를 겨냥했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뉴먼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전혀 왜 그런지를 몰랐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그는 식탁에서 떨어져나와 화를 내며 발을 세게 구르곤 하였다. 우리에게 책을 읽어준 스탠리는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읽었는데(그는 결코 그와 함께 일하지는 않았다), 스탠리는 읽는 동안 “이것은 한스에게 해당되고, 이것은 도로시에게 해당해요”라고 말하면서 읽는 습관이 있었다. 오코넬씨는 그 독서내용이 자기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하여서 더 이상 그것을 참지 못하였다. 그는 오두막으로 돌아가버려서 우리는 쟁반에 음식을 담아서 그에게 가져다주어야 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그는 부엌까지 걸어와서 음식을 가져갔다.

많은 피정자들이 우리에게 왔던 봄과 여름동안에 오코넬씨는 우리가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고 그들에게 다가가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은 우리가 복잡한 음식에 대한 그의 싫증을 존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상점에서 구입한 달걀, 치이즈, 우유와 빵, 마가린, 그리고 깡통스프 등 말하자면 모리스 뿐 아니라 그 누구나 자유로이 먹을 수 있는 부엌 선반에 비치된 늘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피정을 하기 위해 온 우리의 친구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옷을 주기를 갈망하는 친절한 마음으로 왔었다. 모리스는 그에게 주어진 많은 기부금을 갖게 되었으며 우편으로 보내진 옷 꾸러미들이 많았다. 나는 자주 생각하길, 사람들이 그렇게 자비심이 많은 영혼을 지니고 있는 것은 멋진 것인데, 그러나 그들은 우리들, 즉 오코넬씨에게서 자신을 무시한다고 끊임없이 비난을 받고 있는 우리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확실히 그들은 우리들에 대하여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그 당시 내 공책에 이 상황에 대하여 대략 적어둔 것을 약간 찾았다. 즉 “다른 이들이 없이 살아갈 때 여섯 켤레의 신발과 12벌의 속옷을 가지고 있는 모리스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하는가? 예를 들면 피터말이다. 모리스가 모든 도구들을 치워버리고 아마도 술을 마시기 위해 그것들을 팔아버리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십자가의 어리석음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나는 사랑이 의지의 문제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상식에 대해서는? 로이 신부는 모든 것이 넌센스란다.”

물론 로이 신부가 옳았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른 이를 위한 사랑에 의해서 알려진다. 그들이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시오!” 나는 “그 누구도 우리에 대하여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괴로워하곤 하였다.

“만일 당신이 사랑 안에서, 초자연적인 사랑 안에서 성장하길 바란다면, 모든 자연적인 사랑은 포도 가지가 잘라내지듯이 잘라내져야 한다. 비록 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보이지 않을지라도 신앙을 가져야한다”라고 로이 신부는 응답하곤 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잘려내지고 있었다. 오코넬씨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나는 (우리가 돕는) ‘우리의 천사들이’ 우리가 말한 것, 즉 우리 모두는 한 형제이고 우리는 가족이며 우리는 힘의 사용을 믿지 않고 사랑을 믿는다는 것을,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와도 그들을 내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까에 대하여 생각하곤 하였다. 만일 그들이 굴욕감 없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심지어 빈정거림과 혐오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모습까지 표현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커다란 승리로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자발적인 협력을 믿는다. 이러한 생각들에 대한 믿음은 용광로 속에서 시험되어야한다.

그리고나자 나는 모리스를 공손하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교훈을 가르치시기 위해 그를 선택하셨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그는 불손함과 증오와 원한과 우리를 죽음에로 이끄는 의심을 낳는 속죄양인 듯 했으며 그런 모든 모습이 이 노인 안에 한데 모여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난해함들을 시험하는 것을 계속한다면? 다른 동료가 물건들을 가지고 달아나 버리는 것은 어떤가? 다른 누군가가 저지른 죄의 대가로 여러분 자신이 신성한 체 하는 것을 세우려고 하는 그러한 동정심엔 무척이나 독선적인 무엇인가가 있지는 않을까? 우리가 은총 속에서 성장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다른 뺨을 내주는 것이 다른 누군가를 예비 도둑이나 살인자로 만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이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 그런 경우에 나는 내가 매맞게 되는 온순한 자보다는 때리는 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믿는다. 사람은 죄인의 대가로 성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죄인이 되는 것이 더 낫다.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 모두가 구원받아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최종적으로 답해준 사람은 바로 루이스 파리나 신부였다. 게슈타포의 손에 순교한 이브 드 몽세이유 신부는 그가 죽어도 될만한 원칙들을 믿었기 때문에 죽었다. 파리나 신부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가지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영향력은 초자연적 사랑을 통해서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신성은(위선적인 동정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구원될 수 있도록 다른 이들에게 감명을 준다. 심지어 비록 우리가 다른 이들의 범죄를 증가시키게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그리고 우리는 그것 때문에 여러번 항의를 받았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그 어떤 법적 강제력도 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상식도 이룰 수 없는 것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다. 파리나 신부는 모든 회의에서 사랑을 칭송하며, 사람들이 그 사랑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함을 강조한다.

드 몽세이유 신부는 자유에 대하여 훌륭하게 기술하였다. 이 자유는 엄청난 하느님의 선물로서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자유롭게 사랑하길 원하고, 또한 이 사랑을 너무나 깊이 갈망하셔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사랑과 자유, 이것들은 위대하고 고귀한 말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서 배우는 길은 내가 써온 것처럼 공동체를 통하여, 마음의 부서짐을 통하여, 영혼이 메마르는 경험을 통하여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기쁨에 찬 사람들을 통해서 조금씩 우리 안에서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경당의 가구와 우리 가족들에게 헛간들을 만들어주고, 사람들과 더불어 그의 작은 집 앞에 있는 햇빛이 비치는 계단에서 아이들과 친절하게 말하고 새들에게 먹이를 주었던 오코넬씨가 친절한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과 사랑 속에서 우리가 성장하도록 하느님에 의해서 선택된 도구였다는 것을 굳건히 믿는다.

하느님께선 임종 때에 그에게 보상하셨다. 그는 교회의 위대한 성사인 종부성사를 받을 때에 꽤 의식이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어린아이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의 무덤에서도 그는 친절한 친구들의 기도를 받았다. 그는 어떤 교종이나 왕이 교회의 손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받았다. 그는 축성된 땅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묻혔다. 그가 평화로이 쉬길 기원한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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