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조차 사랑한 백인대장처럼… 그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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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조차 사랑한 백인대장처럼… 그럼 우리는
  • 박철현 신부
  • 승인 2016.09.13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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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_박철현 신부_마산교구 사회복지국장
박철현 신부_마산교구 사회복지국장

저는 마산교구에서 사회복지국장이면서 동시에 정의평화위원회의 소임도 맡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래저래 걱정 많은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가 사회복지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너무나 부족한 부분이 많고, 정의평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더 더욱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국민을 섬기고 소통하는 일이 정말 이다지도 어려운 일일까요? 어쩌면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사전에는 겸손이라는 단어가 사라져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감탄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기 전까지는 늘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으셨던 예수님이셨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한 사람을 칭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받는 바로 그 사람은 백인대장입니다.

백인대장은 첫 번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존중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원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이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을 한 번 이야기해 볼까요?

백인대장은 그 말 그대로 로마군 100명의 수장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로마의 군사적인 통치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습니다. 보다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압하고 힘으로 다스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단순히 힘으로 통치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백인대장은 자신의 권력을 지배하거나 억누르는 일에 사용하지 않습니다.그에게는 로마인도, 이스라엘인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거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백인대장이 어떤 의도나 속셈을 감춘 채 단순히 친절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원로들도 기꺼운 마음으로 백인대장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섰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도자라는 사람은 겸손을 보여주기보다 이렇게 할 테니 무조건 따라오라고 합니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종북이니 좌익이니 하는 말로 마치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처럼 매도합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 애를 쓰기보다는 오히려 불안을 더 조장합니다. 불안을 조장하는 일은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쉽게 동의도 구할 수 없을뿐더러 저항만 더욱 커지게 만들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프레임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배운 게 그것뿐이라서 그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진=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두 번째, 백인대장은 자신의 가족들이 아니라 노예를 위해서 예수님을 청합니다. 노예제도가 권력자들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그 시절, 이렇듯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과감하게 나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백인대장은 노예를 하나의 소모품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당시 사회의 한계 때문에 노예를 부리고 있었지만 그 노예 때문에 사람을 청할 줄 아는 배려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단순히 수단이나 도구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노예이지만 적어도 그 노예가 병에서 나아야 할 권리를 존중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백인대장은 참으로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많은 기업들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이 노예 아닌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으로 대우하기보다는 돈 벌어다 주는 기계, 그리고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이면 해고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어려움을 나눌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기업주들의 치부가 드러나게 되면 성실하게 일을 해온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희생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약자인 노동자는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사회의 기초는 허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게 되고 사회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청했지만 곧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까지 오는 수고를 하지 않으시도록 배려합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이 예수님을 청한 일 자체가 그분을 지배구조의 틀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틀 속에 묶여있기에는 너무 크고 얽매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늦게나마 백인대장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보내어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게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께는 그 권력의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솔직히 이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의 권력자와 너무 비교됩니다. 너무나도 어이없게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제나 수도자를 권력의 틀 속에 억지로 끼어 넣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들이 정치이야기를 왜 하냐?” “수도자들이 데모나 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는 말들은 모두 종교, 신앙을 권력의 틀 속에 가두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사람을 먼저 보고 사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정치와 권력이라는 틀 속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반발심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아무튼 백인대장은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지녔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손함도 지닌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감탄을 끌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되 겸손함도 더불어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신 분들은 모두 그런 마음으로 오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이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의 장면을 보게 되는데 성체성사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사랑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선적으로 사회적 약자라고 표현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괜히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의 벗이라고 불렸겠습니까? 지금은 누구입니까? 세월호로 인해 시간이 멈추어졌는데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 상처 받은 수많은 가족들, 농민대회에 참여했을 뿐인데 물대포를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님, 엉터리 합의로 안 그래도 고난으로 가득 찬 삶에 억지와 강요라는 덧칠까지 당해야 하는 위안부 할머니들, 일터에서 하루아침에 바깥으로 내몰린 해고자들, 이런 분들이 아니겠습니까?우리는 철저하게 바로 거기에서부터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마디로 처절한 사랑이었습니다. 찢기고 상처 나고 때로는 억압까지 받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때로는 행복과 기쁨뿐만 아니라 고뇌와 아픔까지도 담겨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었기 때문에 기쁨과 행복만 끌어안는 사랑이 아니라 아픔과 고통까지도 품어줄 수 있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회적 구조가 지닌 틀은 많은 사람을 억압합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그 틀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일에만 급급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노하느라 힘을 다 쏟을 수 없습니다. 안타까워하기만 해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주위의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안위를 향해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도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로 옮겨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전히 울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노숙까지도 마다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주장을 열정적으로 외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아주 작은 소리여서 지나치기 쉬운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랑해야 하며, 사람을 넘어서서 함께 고통 받고 있는 공동의 집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성체성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감탄하게 만드는 백인대장이 됩니다. 그 길을 향해 모두 중단 없이 부단히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박철현 신부_마산교구 사회복지국장

<출처/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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