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딸들에게 배웁니다 “아빠! 어디 갔다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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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딸들에게 배웁니다 “아빠! 어디 갔다 오세요?”
  • 유형선
  • 승인 2016.09.1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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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선 칼럼] 

담배를 커피 같은 기호품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마약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지금도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겁니다. 그러나 저는 담배를 끊고 싶었습니다. 지난 이십여 년, 담배를 끊지 못해 피어왔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오늘까지 담배를 끊은지 81일차 되었습니다. 몇년을 끊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필 수 있는게 담배라고 합니다만, 아직까지는 금연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저에게 금연은 연례행사였습니다. ‘올 해의 목표, 금연’ 이런 글귀를 새해를 맞이하며 스마트폰 배경화면에넣어도 보았지만 늘 한 두 달 만에 끽연의 유혹에 넘어 갔습니다.

그러나 이번 금연은 좀 다릅니다. 제 의지만으로는부족하다고 인정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우선 정기적으로 의사 선생님을 뵈면서 ‘챔픽스’라는 금연약을 처방받아 아침 저녁으로 먹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약을 먹으면 담배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제껏 시도해 본 여러 금연 방법 중에서도 가장 수월하게 금연의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금연어플을 깔았습니다. 현재 80일 10시간 동안 804개피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18만9천원을 담배값으로 쓰지 않았다고 어플이 알려줍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만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껴왔습니다. 마흔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은 점차 건강에 자신이 없어지는 시간임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담배는 끊지 못하겠으니 차라리 건강보험을 하나 더 가입했다는 선배도 보았습니다. 이렇게 담배 끊지 못하고 나이만 먹어가다가 행여 건강마저 잃어버리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두 딸을 어떻게 키우나 하는 공연한 걱정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금연과 이번 금연의 출발점은 분명 다릅니다. 이번 금연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딸들에게 부끄럽기 때문이었습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면서 딸들에게 자꾸만 끊었다고 거짓말을 반복하는 제 모습이 부끄럽고 한심했습니다. 저는 작년 겨울부터 두 딸들에게 금연하고 있노라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입니다.

사진=한상봉

지금도 유월의 그 날 밤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두 딸이 잠 든 것을 확인하고는담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슬그머니 현관을 빠져나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 대 피웠습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일종의 의례같은 흡연이었습니다. 다시금 현관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와 양치질을 하러 목욕탕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잠들어 있어야 할 두 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작은 딸이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어디 갔다 오세요?”
할 말이 없는 아빠는 모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달님이 보고 싶어서 나갔다 왔어요.”
작은 딸이 제 대답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언니! 아빠는 달님 보러 나갔다 오셨어! 아빠! 저도 달님 보고 싶어요. 다음 번에는 같이 나가요!”

그 순간 초등학교 5학년 큰 딸은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다는 얼굴로 긴 한 숨을 쉬며 베개에 머리를 묻었습니다. 거짓말을 반복하는 아빠는 부끄러웠습니다.

며칠동안 퇴근길이 두려웠습니다. 아이들 눈치를 살피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잠들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행위보다 딸들에게 거짓말 하는 아빠가 되어버린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담배만 끊으면 더이상 거짓말할 필요도 없고 제 자신과 제 가족이 모두 행복해 진다는 정답을 저의 내면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부끄러웠습니다.

거짓말 하는 아빠를 끊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의지만으로 행했던 금연이 번번히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인터넷을 찾아 금연프로그램을 한다는 병원을 찾아 갔습니다.이번 금연이 성공한다면 저에게 부끄러움을 알려준 제 딸들 덕분입니다.

제 딸이 저를 부끄럽게 만든 또 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지난 봄 어느 공휴일, 안방에서 작은 딸과 함께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접시에 깎아 놓은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며 영화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작은 딸이 난데 없이 저에게 질문 했습니다.

“아빠는 꿈이 뭐에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바로 옆에서나 들릴 만한 작은 소리로 저에게 질문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는 얼마나 놀랐던지 먹던 복숭아가 목에 걸렸습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물 잔을 비우고서 몇 번을 큰 숨 뱉고서야 진정 했습니다.

“아빠 꿈을 물은 거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꿈이 무엇이다 대답은 하지 못하고 그저 질문을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그 동안 살면서 꿈을 묻는 건 늘 부모였고 대답해야 하는 건 자녀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 딸이 저에게 꿈을 묻고 있습니다. 대체 마흔 셋 접어든 ‘아저씨’에게 꿈을 물어도 되는 건지 의아했습니다. 이런 질문은 학창 시절 이후로 받아 본 적도 없고 더더군다나 아버지가 된 이후에는생각도 해 본 적 없었습니다. 일종의 반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반칙을 다름 아닌 제 딸이 저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작은 목소리의 질문 하나가 저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아빠는 딸에게 꿈이 무엇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하는지요?

아마도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꿈을 묻는 자는 스승이요 꿈을 대답하는 자는 제자일 겁니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 순간 초등학교 1학년 제 딸이 저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금요일에 치를 받아쓰기 시험을 고민하는 제 작은 딸이 마흔 세살 아빠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꿈을 묻는 스승 앞에서 저는 대답을 찾지 못해 한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딸들 덕분에 금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딸들 덕분에 꿈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2016년 9월 11일)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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