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와 사제들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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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와 사제들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9.2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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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세속화 시대, 성직자 권위주의에 대한 유감-9
사진출처=c1.static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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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작 하느님이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라고 믿는 신자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교리적으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대자대비하신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 심지어 주교와 사제들조차 하느님께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계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 목숨을 언제라도 거두어 가실 수 있는 분이 하느님이심도 믿지 않는 분위기다. 하느님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마치 자신이 하느님인양 고압적이고 냉정하게 신자들을 대하는 사제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은 하느님을 자비로운 어머니가 아니라 ‘심판관처럼 준엄한 군주’처럼 여기고, 자신은 재판정의 ‘검사’인양 면책대상이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가련한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푸는 공덕으로 자신의 죄조차 탕감되는 것처럼 여긴다.

공개적으로 비난받지 않는다고 죄가 없는 게 아니다. 주교와 사제들을 면전에서 공박할 신자들은 별로 없고, 뒤에서 쑤군덕거리는 것은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에서 그려 넣었듯이, 하느님 앞에는 교황이나 주교, 사제, 수도자의 신분이 무색하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계급장을 떼고서 벌거벗은 채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준주성범>에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는 자”라는 말이 있듯이, 성직자일수록 마지막 청문회를 통과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주교와 사제들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존경받을 만하게 살아감으로써.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교황’임에도 존경받는 이유는 교회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가장 낮은 데 있는 사람의 시선으로 교회와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지난 2014년 8월 14일 한국 방문 첫날에 교종은 한국 주교들에게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중심에 있다.”고, “복음의 시작과 끝에도 가난한 이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분은 단순히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그 말을 입증했다. 교종이 ‘쏘울’을 타거나, 세월호 유족들의 손을 잡아주고, 꽃동네에서 마련한 거창한 교황의자를 거부한 것은 공연한 짓이 아니었다.

그분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성 베드로 성전 발코니에서 신자들에게 먼저 강복을 청했다. 다른 추기경들에게 축하인사를 받는 자리에서도 의자에 걸터앉지 않고 함께 ‘서서’ 추기경들의 인사를 받았다. 최초 방문지로 난민들이 운집한 람페두사를 선정하고, 최초 순방지로 브라질을 선택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손수 제 가방을 들고, 어린아이들을 들어 올릴 때, 이것은 다만 프란치스코 교종의 ‘멋쩍은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아니,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해도 좋은 일이다. 교황이든 주교든 사제든, 이런 퍼포먼스라면 아무리 해도 나쁘지 않다. 이런 모범이 다른 고위성직자들뿐 아니라 사제와 수도자, 심지어 신자들에게도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날 주교와 사제들이 섬기는 자로서 그런 시늉조차 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

변방의 나자렛 처녀 마리아 없이, 노동자 요셉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없이 가능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없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분보다 더 나은 거처와 더 나은 복장과 기름진 음식과 번듯한 자동차를 소유하는 ‘종들의 종’은 없기 때문이다. ‘업무상 필요’가 아니라면, 소박한 소유는 그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마더 데레사를 존경하면서 가난을 미워하고, 로메로 대주교를 칭송하면서 비겁하고, 샤를 드 푸코를 자랑하면서 사제관(또는 주교관)을 떠나지 않으며, 아시시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면서 교회재산을 늘리는 데 열을 올릴 수는 없다. 나의 행위가 나를 고발하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떠도는 “프란치스코회 재산은 하느님조차 모른다.”라는 우스갯소리는 사실상 프란치스코회의 ‘어긋한 정분(情分)’을 조롱하는 말이다. 지금 백지 한 장을 책상에 올려놓고 자신이 평소 존경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보라. 그들 가운데 지금 나처럼 사는 사람이 있는지 묻자. 마음으로 선을 갈망한다고 선해지고, 하느님을 갈망한다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행한 선만큼 나는 선하다. 내가 지금 행한 사랑만큼 나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다. 야고보 사도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야고 2,26)이라며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다.”(2,18)고 말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2-27)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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