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문득 스산한 이국땅 안개 자욱한 정경이 특별했던 영화 <만추>(晚秋, Late Autumn, 2010)가 생각납니다. 이만희 감독이 만든 1966년 영화를 김태용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이라는데,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쓸쓸한 탕웨이와 현빈의 연기가 일품이었습니다. 거기에 덧입힌 김필이 부르는 노래 ‘다시 사랑한다면’은 우리네 사랑의 결말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가을’이라고 발음만 해도 닿을 수 없는 사랑이 손끝에 만져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조금 덜 만나고 조금 덜 기대하며
많은 약속 않기로 해요
다시 이별이 와도 서로 큰 아픔 없이
돌아설 수 있을 만큼
버려도 되는 가벼운 추억만
서로의 가슴에 만들기로 해요”
서로 큰 아픔 없이 돌아설 수 있을 만큼 버려도 되는 가벼운 추억은 희망일 뿐, 늘 사랑은 아프고 늘 사랑은 무언가 기대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아무리 해도 충분하지 않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까지’가 없습니다. 입술로는 ‘이제 그만’이라고 발음해도 상처가 될 때까지 사랑은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그 지극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은 하느님이심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 합니다. 주인이 종이 되어 오시고, 임금이 천민이 되어 오셨다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버려도 끝내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그분이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실패한 사랑’뿐일 겁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넘어져도 그분이 포기하지 않아서 여전히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그분과 인연을 맺었으니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할 테지요.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 온다는 걸
그대여 빌게요 다음 번의 사랑은
우리 같지 않길 부디 아픔이 없이
꼭 나보다 더 행복해져야만 해
많은 시간이 흘러 서로 잊고 지내도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때도 이건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하느님의 사랑은 슬픈 사랑입니다. 아픈 사랑입니다. 호출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나중에라도 “그게 사랑이었지” 하고 우리가 깨닫기만 해도 안심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 위에서조차 원망 한 마디 내뱉지 않고 사랑하던 그 사랑입니다.
가을입니다. 다 내려놓자고 다그치는 계절입니다. 사실 희망조차 부질없다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하늘은 맑아도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그래서 자잘한 행복에도 기뻐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잠시 잠깐 느끼던 사랑이 귀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생전 무엇이든 베풀었지만, 타인의 환대 때문에 흐뭇했던 순간은 별로 없습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환대하였지만, 그때도 예수님이 그이를 먼저 환대했기 때문입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루카 24,29) 하고 그들이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작은 친절에도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버려도 되는 가벼운” 사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외로움의 습격>(김만권, 헤다, 2023)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외로움’이란 “이 세계에서 타자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갈 터전을 잃은 느낌, 더하여 내가 이 세상에 쓸모없어졌다는 느낌, 그래서 결국엔 이 세상에 속할 곳이 없다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이런 느낌은 개인적인 일이지만, 이런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사회는 참 위험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리서치의 보고에 따르면, 젊을수록 외롭고, 1인 가구일수록 외롭고, 일정소득 이하일 때 더 외롭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 때 나를 인정하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이 세계에서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글라렛 선교 수도회의 이문수 신부가 시작한 ‘청년밥상문간’이나 이영우 신부가 대학촌에서 시작한 ‘참 소중한…’이라는 공간이 의미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공간이 세상과 단절된 이들을 다시 세상에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데, 그 지푸라기가 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입니다.
<만추>는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데이트를 마치고 시애틀에서 헤어지던 날 밤 훈(현빈)은 애나(탕웨이)에게 곧 다시 돌아올 테니 30분만 기다려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애나는 기다리지 않을 거라고 말하죠. 그때 훈은 “I know you won’t be here”(알아요. 당신이 여기 없을 거라는 거)라고 말하곤 웃죠. 기대 없이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냥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중이 쓸쓸해도 좋을 사랑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