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이냐시오 카페에서 예수회 인권연대 주최로 영화 <나의 올드 오크>를 상영하였다. 제110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을 기념하여 상영한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나, 다니엘 브레이크>의 감독인 켄 로치의 영화여서 더 보고 싶었다.
영국 폐광촌, 시리아 난민 이야기
영국 북동부의 폐광촌에 어느 날 시리아 난민이 들어오자 동네 주민은 이들에게 적개심을 가진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린 이들이 영국으로 몰려오자 정부는 이 마을에 임시거처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폐광촌이 된 후 이미 하락하고 있는 집값이 난민들로 인해 더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와 자기들의 살림살이도 어려운데 그들을 도와준다고 불만이 가득하다.
그런데 ‘올드 오크’라는 오래된 펍을 운영하는 ‘TJ’는 난민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어려운 것이 있으면 도와주려고 애쓴다. 특히 난민 중 사진작가가 꿈인 ‘야라’가 그곳 주민인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빼앗기고 깨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도와 줄 방법을 고민하고 결국 고쳐주면서 가까워진다. 'TJ’는 왜 평생을 자기와 같은 마을에서 일하며 살아온 친구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난민들을 도와주고 연대할까? 그것은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공감과 연민’ 때문이다. 그도 폐광으로 삶이 힘들어지자 아버지가 바다에서 자살을 하고 엄마와 아내까지 잃는 상실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TJ’는 자기가 오랫동안 쓰지 않던 공간을 고치고 치워서 난민들과 밥 한 끼를 나눠 먹으며 서로 의지한다.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는 구호를 떠올리면서.
동네 주민들은 난민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극도로 싫어하지만 감독은 그들을 선과 악으로, 강자와 약자로 분리해서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민들 역시 어쩔 수 없이 약자와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리아 감옥에 갇혀있던 야라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들이 하나둘씩 야라네 집 앞에다 꽃을 가져다 놓고 야라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애도한다. 마지막 장면은 ‘용기, 저항, 연대’라고 쓰인 커다란 깃발을 든 동네 주민들과 난민들이 함께 행진하는 것으로 끝난다.
좋아서 난민이 된 이는 없다
2015년 터키 보드룸 해변에 싸늘하게 식은 몸으로 파도에 떠밀려온 인형처럼 작은 어린이. ‘에이란 쿠르디’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계속되는 내전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가던중 뒤집힌 배에 탔던 시리아 난민이었다. 배우 정우성의 말대로 “난민들에게 피신은 선택이 아니라 목숨을 건 어쩔 수 없는 여정”이다. 영화의 야라는 동네 주민들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자 “우리도 가고 싶다”고 소리친다. 남의 나라가 좋아서 난민이 되는 이들은 없다.
우리나라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들어왔을 때 우리도 영화 속의 동네 주민들처럼 편견과 적대감을 보였다. 무슬림은 모두 'IS'(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lami State)라는 편견, 우리들의 몫을 빼앗을 것이라는 우려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영화 속에서 ‘TJ’는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나쁜 상황을 난민들 탓으로 돌리자 “살기 힘들 때 우리는 희생양을 찾지”라고 말한다. 우리들 속에는 남 탓으로 돌리려는 비겁함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그것도 나보다 더 약한 희생양을 찾는다.
난민뿐만 아니라 이주 노동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이제 우리나라는 이주노동자들 없이는 어떤 분야에서도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을 정도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부분 값싼 임금으로 한국인들이 일하기 꺼려하는 3D업종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금 또는 체불 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문제의 원인을 체불 사업주나 사업장 환경에 묻지 않고 이주노동자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안전하고 편안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위험과 불안과 땀과 눈물, 심지어 그들의 죽음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무조건적 환대가 가능하다면
영화가 끝나고 의정부 교구 ‘엑소더스’에서 난민 활동가로 일하는 강슬기님과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 영화를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는 질문에 자기가 활동하는 곳의 현장과 영화에서의 모습이 너무 비슷하다고 했다. 2019년에 ‘가톨릭 난민센터’ 축복식을 했는데 ‘난민’이라는 단어 때문에 주민들의 반대로 개소 3일 만에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아야 했다고 전했다. 영화에서처럼 땅값이 떨어진다, 범죄율이 늘어난다는 이유다. 슬기님은 난민을 환대하는 특별한 방법보다는 ‘TJ’가 야라를 알아가는 과정처럼 우리도 그들 한 사람에 한 사람에 관심을 갖고 알아간다면 그들을 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 같다고 답했다. 그리고 구리에서 오신 수녀님 한 분은 친구 수녀님이 ‘한 가정 한 난민 결연맺기’를 하고 계시는데 벌써 스무 가정을 매칭시킨 것을 보고 알리고 싶어서 나오셨다고 하셨다. 희망의 말씀이었다.
이 영화는 ‘환대’와 ‘적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지만 영화 내내 환대와 적대의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TJ’가 야라를 환대하는 장면, 마을 주민들이 난민들을 적대하는 말과 행동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무수한 환대와 적대가 공존한다. 하지만 내가 하는 환대가 어떤 이에게는 적대가 될 수 있고, 적대 역시 누군가에게는 환대가 될 수 있다. 철학자 데리다는 환대란 단순히 적대의 반대말이 아니라며 단어도 생소한 ‘적환대(hostipitality)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것은 환대와 적대가 현실 세계에서 매우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 나는 난민을, 이주민을, 성소수자를, 노숙자를, 가난한 이를 환대하는가, 아니면 적대하는가? 왜 그런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치열하게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영화 속 주민들과 같은 이유로 그들을 혐오하고 배제하고 그들 ’탓‘을 할 것이다.
그럼 과연 이 영화의 부제처럼 ‘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용기’가 있기나 한 것인지 있다면누구에게 있는지 질문해 본다. 철학자 데리다는 “환대는 미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난민들을 어떠한 혐오나 배제나 조건 없이 환대하려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존엄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들에 대한 어떤 의심, 비난, 경멸, 혐오의 눈길이 아니라 믿음과 존중과 미소를 가진 ‘무조건적 환대‘만이 그들이 환대받을 권리를 가능케하고 우리는 환대할 용기를 가지게 된다. 또 하나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 역시 언제든지 난민이나 이주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가슴에 품고 받아들이는 인식론적 ’겸허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 속에 명대사가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 “중요한 건 뭔가를 함께 한다는 거야”라는 말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기도지향으로 난민 이주민들에 대한 환대를 지속적으로 관심갖기를 촉구하고 계신다. 의정부 교구 <엑소더스>라는 센터에서 활동가들이 난민과 이주민을 환대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것처럼 서울대교구와 많은 교구들이 관심을 갖고 ’뭔가를 함께 한다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무조건적 환대‘가 가능할 날이 오지 않을까?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