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천주교는 무엇인가?
상태바
한국(인)에게 천주교는 무엇인가?
  • 김유철
  • 승인 2016.09.13 14:42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유철의 Heaven's door] 

10%의 종교, 10% 이상의 영향력

그리스도교가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하는 의미라고 한다면, 여기서는 천주교에 한정해 말을 하고자 한다. 개신교에 대한 생각까지 펼치기에는 필자의 한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1784년 신앙공동체의 구성 이후 230여년의 교회사를 통하여 한국천주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이 평신도로 시작한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은 2015년 말 565만여 명의 신자와 19개 교구, 1706개 본당, 761개 공소를 지니고 있다. 사제, 수도회 혹은 교계 병원이나 학교 등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고 그 숫자가 적지 않음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인) 안에 미치고 있는 천주교회의 영향력은 인구 10%의 종교로서는 10%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고자 하는 질문 하나는 한국(인)에게 천주교는 무엇인가? 이다.

과연 천주교는 230여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한국(인) 사회에 이른바 경착륙 한 것인가? 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선교사의 혜택(?)을 받은 일본의 기리스탄(吉利支丹, 切支丹, 그리스도교) 교회는 오랜 시간 지하화를 거쳐 현재도 인구대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쟁쟁한 선교사가 거쳐 간 중국의 천주교회는 중국정부와 바티칸의 줄다리기 사이에서 애국교회 등으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는 것에 비해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가장 늦게 그것도 자발적으로 시작한 한국천주교회는 탄탄대로에서 제자리를 잡고 있는 것인지 되물어 볼 시간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국(인)에게 천주교는 무엇인가? 이다.

사진=한상봉

이 땅에서 천주교는 사교(邪敎)였다

한 때 한국(인)에게 천주교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였다. ‘조정’(朝政)이라 일컫던 당시의 정부와 국민들에게 천주교는 사교(邪敎)였으며 오가작통법이 적용되는 감시와 고발의 대상이었다. 그것이 불과 200여 년 전의 일이다. 박해가 개화 이전의 사건이거나 천주교에 대한 오해 혹은 붕당정치와 관련된 정치적인 일이었다고 넘어 갈 일이 아니다. 세월로서 모든 것을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천주교와 한국(인)의 관계를 보다 근원적으로 조명해 보아야하고 또 그것을 토대로 지금의 교회와 한국(인)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 필요한 일이다. 한국(인)은 이 땅에 계속 뿌리박고 살아갈 것이고 천주교 역시 오래도록 이 땅에서 ‘진리’를 선포할 것이기에 더욱 더 그러하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을 떠올린다. 서자로 태어난 그에게 당시 조선의 신분제도는 억울하고 부당한 것이었다. 그가 광해군 시절 문과에 급제하고 공주 목사와 예조판서를 지냈지만 그는 평생 ‘어떤’ 혁명을 꿈꾸었다. 결국 그는 가슴에 품은 혁명 때문에 형(刑) 중에서 가장 참혹한 형인 능지처사로 생을 마감했다. 한때 조선 유학자 중 유몽인, 이수광, 안정복, 박지원 등은 그를 최초의 ‘천주학 창도자’ 혹은 ‘전파자’로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허균은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기 170여 년 전인 1618년 조선에서 살다간 사람이다. 그의 소설 속 페르소나 홍길동이 꿈꾸었던 ‘만민평등’과 ‘율도국’은 끝내 조선에서는 이루지 못했지만 21세기 한국의 후손들은 이루고 사는 것일까? 한국 천주교는 그의 꿈을 이해하기는 하는 것일까? 단지 혹세무민이었을까?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修德者)로 손꼽히는 분이 홍유한(1726-1785)이다. 일찍이 당시의 대학자 성호 이익의 문하생으로서 스승과 함께 접한 <천주실의>와 <칠극> 등의 한역서학서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스스로 터득한 신앙생활로 평생 기도와 묵상, 정절의 덕을 실천하였다. 그는 천주교 세례도, 이른바 피의 순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앙적 실천은 천주교인의 귀감으로서 안동교구는 교구 전사(前史)에 소개하며 그의 안장지인 경북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에 우곡성지를 조성하고 그의 덕을 추모하며 기리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달레 신부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축일표도 없이, 기도책도 없이 7일마다 주일이 온다는 것을 알고 매월 음력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경건하게 일을 쉬고, 이런 날에는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했다”고 그를 소개했다. 홍유한의 생애는 한국 천주교 공동체 구성 이전의 일이다. 그런 극기와 덕행의 실천, 즉 개인의 종교적 삶은 한국(인)에게 무엇이었을까?

천주교회는 ‘터무니’ 있게 존재하고 있는가

한국 천주교에서 가장 유명한 명동성당이 1898년에 건립되었으니 114년이 되었다. 전국에 그 즈음 생긴 본당들이 100년을 넘겼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생겨난 본당들도 50년을 넘어섰다. 물론 최근에 생겨난 본당들도 있지만 건물 위주로 말하는 성당과 달리 지역 위주로 말하는 본당의 경우 당연히 본당이 위치한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대다수의 본당 이름이 행정단위의 동(洞) 이름을 취하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과연 그 본당들은 지역과 지역민에게 어떤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100년 혹은 50년을 지역의 이름으로 존재하면서 천주교인 ‘끼리’가 아닌 지역과 지역민에게 어떤 선한 영향력이 있었는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한국천주교의 과제이기도 하다.

지역에 천주교회 즉, 본당이 있음으로서 지역이 조금 더 밝아지고, 건전해지고, 평화로워지고, 사랑이 오고가는 지역이 되었는지 혹은 그 지역에서 아무런 존재의 가치 없이 ‘종교단체’로서 나이살만 먹고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터무니’ 없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터’의 무늬가 없는 존재는 뿌리 없는, 이질적인 손님의 존재인 것이다. 거듭 물어보아야한다. 지역과 지역민에게 천주교는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꼬박 100여년에 걸쳐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지만 천주교인들은 잘도 견뎠고 그러한 박해로 인한 도피와 유배를 통해 천주교의 씨앗은 반도 곳곳에 퍼졌다. 참으로 오묘한 세상사이다. 단지 하나, 민족사적으로 불행한 일은 천주교 박해를 펼친 정조부터 고종까지의 역사, 이른바 정․순․헌․철․고․순종의 역사는 조선 망국사였다.

천주교가 종교의 자유를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을사늑약(1905년)과 경술국치(1910년)로 조선왕조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물론 천주교회는 조선패망과는 관계없이 살아남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순교’로서 이어온 한국천주교회에게 ‘순교’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순교’는 오래전 과거지사가 되었고, 그런 일들은 ‘불가역적’인 사건이며, 살아있는 이들의 기념과 행사와 성지와 시성시복의 대상에 되었을 뿐이다.

오늘의 한국천주교가 바라보는 세상은 고요하고 시대는 잔잔한가? 한국천주교가 놓친, 아니 외면한 숱한 시대의 주름 앞에, 앞으로 거듭거듭 밀려올 시대의 손짓을 앞에 둔 한국(인)에게 천주교는 과연 무엇인가?

사진=한상봉

한민족의 DNA는 천주교회보다 더 근원적이다

파리외방전교회 달레 신부가 “조선 백성의 눈동자를 찌른 일”이라고 표현 할 정도로 충격을 준 교회 최상층부의 명령은 다름 아닌 ‘제사금지령’(1790년)이다. 유럽 천주교인들의 신학적, 문화적 입장에서 내려진 이 금지령은 동아시아 각국 정부에게 박해의 빌미가 되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미 제사금지령은 한국천주교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오래전인 1715년 교황 클레멘스11세가 칙서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를 내려 ‘강경한’ 금지를 했다. 이후 선교 수도회들 사이에서 신학적, 문화적 논쟁이 치열하자 1742년 교황 베네딕토14세는 칙서<엑스 궈 싱굴라리>(Ex quo singulari)를 통해 중국의례 논의 자체를 금지시키고 중국내 모든 선교사들에게 칙서 준수에 대한 서약을 강요했다. 이른바 제사에 대해서 재갈을 물린 것이다.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한 당시의 조선 평신도들에게 그것은 청천벽력이었다. 한민족은 그 때는 물론이지만 지금 역시 유교적 풍습이 짙게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다. 굳이 그것을 ‘유교적’ 이라고 하지 않아도 웅녀로 시작한 한민족의 DNA속에 있는 혈연 문화적인 것을 230여 년 전 수용되고 이식된 천주교회가 넘어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전히 한국(인)에게 천주교는 무엇인가? 이다.

한국천주교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혹은 ‘종교 자유 이전’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한국천주교의 초기 역사를 만들어가고 쓰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불과 200여 년 된 신흥종교의 구성원들이다. 역사는 이미 만들어진 것을 유지,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새로운 바통을 이어 가면서 쓰여 지고 있다. 500년 후 혹은 1000년 이후 이곳에서 천주교와 관계없이 살고 있을 사람들과 천주교인으로 살고 있을 사람들에게 21세기 초반을 살아간 사람들이 한민족의 지역과 시대와 문화 앞에서 한국(인)들에게 천주교는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분명히 기록하고 전달해 주어야 한다. 천주교인들도 기뻐하는 갈라진 한민족 남북 모두의 명절 추석한가위다.

 

김유철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J 2016-09-16 00:08:02
목숨을 위협해도 안되니까.. 방법들을 다양화 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