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대첩, 덜어냄의 미학을 보다
상태바
한식대첩, 덜어냄의 미학을 보다
  • 이송희일
  • 승인 2024.09.22 21: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연히 요리 예능을 보는데,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왼쪽은 한식대첩 우승자이고, 오른쪽은 젊은 패기와 실력으로 뭉친 다크호스로 호명되는 한식 요리사라고 한다.

두 사람이 동일한 음식 주제로 요리 경연을 벌인다. 심사위원들이 눈을 가린 채 음식을 먹고 평가를 하는 블라인드 심사가 경연 룰이다. 온전히 맛으로만 평가한다.

보다시피 왼쪽 명인은 달랑 그릇 한 접시를 내놓았고 오른쪽의 젊은 요리사는 온갖 식재료로 꾸민 화려한 상차림을 내놓았다. 요리 과정에서 왼쪽의 명인은 채소 맛을 우려내 국물맛에 깊이를 내는데 주력한 반면에, 오른쪽 요리사는 다양한 식재료를 마구 뒤섞어 볼거리와 맛거리의 상찬을 준비했다. 한식 명인은 오로지 일점의 요리맛에 집중했고, 패기의 젊은 요리사는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포부로 자신의 필살기를 모두 투여했다.

승자는 만장일치로 왼쪽의 한식 명인.

평가가 끝난 후 안대를 벗은 심사위원들은 두 음식의 모양새를 보고 놀란다. 소소한 접시와 화려한 냄비. 만약 눈을 뜨고 평가했다면 오른쪽의 화려한 상차림 때문에 평가가 어려웠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 오직 혀로만 평가를 하니까 담백하고 깊은 국물맛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패배 후 인터뷰에서 오른쪽의 젊은 요리사는 이렇게 술회한다.

"제가 10년 동안 되게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덜어냄의 미학을 몰랐다는 걸 오늘 정말 크게 깨달았습니다."

덜어냄의 미학, 딱 절묘한 표현일 것이다. 명인의 저 작고 아담한 국그릇이 품고 있는 어떤 세계, 욕심과 자기애를 피하고 오로지 대상에만 집중하는 간결하고 선명한 미학.

요리는 확실히 삶의 기예다. 명인의 저 투박한 그릇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덜어냄의 미학이 필요하구나 깨닫게 된다. 자꾸 덜어낼수록 더 무거워진다는 것.

 

이송희일
1999년 첫 단편영화 <언제나 일요일같이>를 시작으로 20년 이상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다. 성소수자들의 슬픔, 10대들의 외로움과 아픔,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 등을 섬세하면서 강렬한 연출로 그려온 그는, 2006년 <후회하지 않아>로 독립영화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을 이끌어 한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후회하지 않아>, <백야>, <야간비행>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홍세화 선생과 대담집 <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등을 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