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정릉천 근처였을 것입니다. 비가 억세게 내려 개울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데, 천변에 있던 어느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시인을 만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꿈결 같은 그 밤에 천주교 사회운동을 하던 선배들과 어울린 자리였습니다. 그 어슴푸레한 기억속에서만 만났던 시인이 이승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경림 시인입니다. 후배 문인들에게 그렇게 다정했다는 시인은 몸이 아픈 따님을 걱정하며, 식구들이 정릉 근처에 모두 모여 살았다고 이경자 작가는 전합니다. 시인은 <낙타>라는 시에서 이승과 저승을 드나드는 꿈을 꾸었더군요.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저승길은 어쩔 수 없이 ‘낙타를 타고’ 가지만,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은 ‘낙타가 되어’ 가겠다고 합니다. 시름 많은 세상이 참 고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승길에는 이 생에서 얻은 슬픔도 아픔을 까맣게 잊었노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도 내 비루한 육신을 떠안고 살아온 낙타에게 미안해서, 다음 생애에는 ‘낙타가 되어’ 남의 시름을 덜어줄 요량입니다. 이 시인의 소박한 인정이 그리운 사람들이 꽤 많았던 모양인지, 문상객들이 참으로 많았다고 전합니다. 이승에서 아스라한 인연밖에 없었던 장례식에 가지 않고 먼 눈빛으로 배웅했습니다.
가난한 사랑 노래
가까이서 인연을 엮어왔던 소설가 이경자는 평생 가난에서 멀지 않았던 시인은 “길음시장에서 싸구려 바지와 셔츠를 사 입으시고 정릉 가는 길 삼거리에 있는 봉화묵밥 집에서 몇천원짜리 식사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길음동 시장 끝자락에 있는 허름한 주점에서 외상술을 마시던 시인이 딸이 결혼할 때 지어준 시가 ‘가난한 사랑 노래’라고 합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신경림 시인은 백석과 임화, 이용악과 오장환, 정지용 등 금기로 묶여 있던 월북작가나 납북 문인들의 시를 읽었고,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는 ‘갈대’라는 시가 문예지 <문학예술>에 추천되어 등단했지만, 초기작 네댓 편을 발표한 뒤로 낙향해서 10년 가까이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합니다. “글 한 줄 안 쓰고 책 한 권 안 읽으며” 살았다고 말하는 신경림은 한때 문학을 버릴까도 고민했다는데, “고단한 낭인생활 속에서 보았던 가난한 서민들의 힘든 삶이 그를 다시 문학으로 이끌었다”고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전합니다.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그는 한동안 시골을 돌며 약초나 약재를 거두어 서울 한약상에 파는 사람들의 길안내를 했는데, 충청도와 강원도의 후미진 산골길을 하루에도 백여 리씩 걸었다고 합니다. 저녁에 여인숙에 들어 양말을 벗어보면 발이 벌겋게 부어 있고 물집이 잡혀 있었다고 하지요. 그대 그 자리에서 만난 이들을 보며 ‘파장’이란 시에서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합니다. 시골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난했고 세상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수심과 체념으로 조금씩 비뚤어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혀 그들 탓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때 시를 그만두려다 쓰기 시작하면서, 고생하면서 어렵게 사는 내 이웃들의 생각과 뜻을 내 시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신경림은 마지막 시집이었던 <사진관집 이층>에 실린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가난하지만 행복한
신경림을 두고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민중시인”이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종교가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라고 하니, 마침내 기댈 언덕을 지니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시인의 뒷모습에서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스스로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는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갈릴래아의 흙바람 속에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걷던 그분은 가난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고, 심지어 “하느님 나라가 그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대 없이 사랑할 줄 아는 자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이미 하늘이 그이의 품에 들어와 있으니, 하느님을 말하지 않아도 그이는 이미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신경림은 마침내 “내가 살고 싶은 땅에 가서...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고 말합니다. “돌아가길 단념하고 낯선 길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고 합니다. 지나가는 행인이 던져주는 동전이 떨어질 검은 손바닥에 그어진 그어진 손금의 뜻을 모른다 해도 낯선 길 처마 밑에 쪼그려 앉자고 합니다. ‘裸木’이라는 시에서 하는 말입니다. 생애의 의미는 접어두고, 가장 낮은 곳에 머물고 싶었던 시인의 마음입니다. 그이가 하늘을 말하지 않아도 하늘을 매만지며 살았던 사람이라는 걸 아는 이들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하느님의 시어를 읽고 있습니다.
*<경향잡지> 2024년 7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