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한국천주교 신앙인의 고백과 다짐 (초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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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한국천주교 신앙인의 고백과 다짐 (초안 전문)
  • 함께 걷는 예수의 길
  • 승인 2024.09.0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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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와 교회의 참회를 위해 행동하는 천주교인들의 서명운동을 제안합니다

*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한국천주교 신앙인의 고백과 다짐>에 공감하는
   천주교인은 아래 주소를 통해 서명운동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명하기]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한국천주교 신앙인의 고백과 다짐 (google.com)

 

가난한 겨레를 백성으로 삼으신 하느님

1. 세무변호사였던 노무현이 인권변호사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 역시 만민이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신앙인들이 인정하는 것은 국가권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이며, 그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정치뿐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이 아니라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입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교회를 ‘제도권력’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 백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2. 하느님은 그 ‘백성’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고통 받는 형제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말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중립을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서 계신 분입니다. <탈출기>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고, 그들의 고통에 응답하시고, 그들의 해방을 이끄시며, 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 편을 드는 대신에 노예들의 편을 들기로 작심하신 분입니다. 거룩한 하느님은 사막의 불타는 덤불에서 그들을 억압에서 해방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7.9-10)

3. 이스라엘의 하느님,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은 예언서와 시편과 잠언에서도 사회적 불의를 준엄하게 비판하고,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따뜻한 확신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한결같이 가난한 자들 편에 선 하느님께 합류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은 성전에서 바치는 번제물에 싫증이 났으며,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4) 하고 명령합니다. 가난과 압제는 하느님의 뜻을 좌절시키는 것이기에, 예언자들은 예배와 단식 같은 개인적 희생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을 해방하라고 명령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이사야, 58,6-8)

4.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이집트 제국이 상징하는 모든 탐욕과 억압에서 우리가 해방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들이 이스라엘 평등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이 탈출하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은 마음이 달라져, “우리를 섬기던 이스라엘을 내보내다니, 우리가 무슨 짓을 하였는가?” 하고, 600대의 병거를 이끌고 정예 부대를 보내 노예들의 뒤를 쫓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제국의 군대를 모조리 갈대바다에 수장시켜 버렸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들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금을 모아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절을 하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탈출 32,8)라고 고백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면서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윽고 모세는 “그들이 만든 수송아지를 가져다 불에 태우고,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 물에 뿌리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마시게”(32,20) 합니다. 그리고 레위의 후손들에게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각자 허리에 칼을 차고, 진영의 이 대문에서 저 대문으로 오가면서, 저마다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죽여라.’”(32,27)하고 명령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핍박하던 이집트 제국의 군대를 몰살시켰을 뿐 아니라, 떠나온 우상을 다시 섬기려는 백성들을 단죄하셨습니다. 이는 노예적 근성과 제국의 잔재를 당신 백성들 안에서 청산하려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히브리인들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에 정착해 이스라엘을 세울 수 있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참된 해방은 이처럼 과거청산을 통하여 새로운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식민지 청년 예수

5. 2024년 8월 25일,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문수가 인사청문회에서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나라를 뺏겼으니 당연히 우리 선조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은 당연히 내란죄에 해당하는 불법행위가 됩니다. 하지만 실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인과 대등한 국민감정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한국인들도 ‘황국신민’이라고 강박하였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인 ‘조센진’으로 부르며 차별대우 했습니다. 김문수의 견해를 따른다면, 예수님도 로마인인 셈입니다. 하지만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이스라엘이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유대인은 여전히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아래 놓인 속주(식민지) 백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6. 로마제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에 군사력에 의한 제국의 평화(Pax Romana)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대리통치인에게 맡겨 다스렸는데, 팔레스타인 전역을 다스리던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4년경 죽자 그의 세 아들들인 아르켈라우스(Archelaus),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 필립포스(Philip)등이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때는 헤로데 대왕의 죽음 이후로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났던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기원전 4년에 에제키아스(Ezekias)의 아들 유다(Judas)는 세포리스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로마제국은 시리아의 로마 총독 바루스(Varus)의 군단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궁중노예 출신이었던 시몬과 목자였던 아트롱게스를 비롯해 비천한 농민들이 반란의 주역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들을 진압하고 2000명이나 십자가형에 처형했다고 전해집니다. 세포리스 인근에 있는 나자렛에서는 오랫동안 ‘로마인이 들이닥친 날’을 끔찍하게 기억합니다. 이 아프고 쓸쓸한 ‘위험한’ 기억 한가운데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7. 로마제국의 식민지를 사는 백성들을 두고 루카복음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1,79)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제국과 그 대리인인 헤로데 안티파스와 성전세력들, 그리고 식민통치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던 서기관(율법학자)들을 왜 그토록 혐오하셨는지 알만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벽두에 이사야 예언서를 빌어 당신 사명을 공적으로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19)

마리아의 노래에서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다.”(1,51-53)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8. 예수님이 누구인지,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말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라는 언급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삶의 변방으로 밀려난 가난한 이들의 친구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굶주린 자와 목마른 자, 나그네와 헐벗은 자, 병든자와 감옥에 갇힌 자를 얼마나 돌보아 주었는지가 심판의 잣대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현실에서 용기 있게 시류를 거슬러 권력에 도전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은 언제나 고난과 죽음뿐입니다. 식민지 청년이었던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의인이 겪어야 할 불가피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분은 당대의 정치-종교권력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분은 제국과 그 대리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불순세력’으로 몰리고, ‘역적’으로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의인’으로 부활시키셨다고 믿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제국의 힘을 거부하고 맞섰던 예수님을 우리는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정의는 연민의 사회적 표현이며, 사랑은 정의의 영혼이고, 정의는 사랑이 몸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백성들에 대한 열정을 안중근 의사의 모습에서도 발견합니다.

한국교회와 민족해방운동

9.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의병항쟁을 비롯해 많은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천주교회의 인사들 가운데도 의분을 참지 못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평신도를 비롯해 사제와 신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이미 친일로 돌아선 교회지도부의 거부로 종교적-정치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0. 이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분이 안중근 토마스(1879-1910)입니다. 그는 황해도 신천 청계동에서 빌렘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선교활동을 도왔으며,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07년부터는 무장 독립투쟁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1908년 러시아령 연해주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 의병 부대의 참모중장으로 활동하면서, 1909년 10월 26일,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지목되던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여 겨레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1910년 2월 14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안중근은 항소하는 대신에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가 서론만 쓴 채 1910년 3월 26일 처형되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지녔던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뮈텔 주교는 안중근이 천주교인이라는 사실마저 부인하다가, 결국 그의 행동이 애국적이긴 하지만 ‘살인은 안 된다’고 단죄하면서 병자성사를 해달라던 안중근의 요구마저 거부했습니다. 이에 빌렘 신부가 교구장의 뜻을 거슬러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에게 병자성사를 베풀자, 뮈텔 주교는 그에게 2개월간의 성무집행정지 처분과 일시적인 성사권 박탈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결국 빌렘 신부는 교구장 및 다른 성직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1914년 프랑스로 송환되었습니다.

 

2009년 10월 22일 열린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김권정 교수의 글에 따르면, 안중근이 일제의 식민정책의 합법성을 부인하기 위해 교리를 인용하거나 종교에 호소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개인적으로 이토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의병장의 이름으로, 개인적 원한으로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의 행동으로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안중근이 천주교회에 호소하지 않은 이유는 “일제와 정치적 타협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제도권 교회로서 천주교회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안중근은 제도권 천주교회에 대한 거듭된 실망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천주에 대한’ 개인적 신앙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김권정 교수는 안중근이 “제도권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고통당하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책무를 다하면서도 천주신앙에 대해서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11.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1879-1928)은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황해도 안악, 신천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 총독의 암살을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경성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밀고로 안명근은 1911년 7월 헌병대에 체포되어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강도 및 강도 미수죄’로 종신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그와 모의한 천주교 신자 한순직, 원행섭도 징역 15년형이 구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제에 의해 ‘105인 사건’으로 날조되어, 천주교 신자 이기당 안토니오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1913년 석방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무송현에서 광제회를 조직하고, 통화현에서는 3,5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자치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병학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에 일제가 체포령을 내리자, 의주성당 서병익 신부가 1916년 10월 5일자로 그를 파문하고, 이 사실을 일본 경찰과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무장투쟁이 교회의 존립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신자들을 고발하거나 파문하였습니다.

12.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읽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천주교 신자는 없었지만, 천주교인 역시 겨레의 독립을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았습니다. 3월 5일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학생 60여 명은 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운동장에 모여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립가’를 불렀습니다. 8일에는 대구 시내에서 열리는 군중 시위에 대비하여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 측이 독립선언문을 압수하고, 9일에는 교구장인 드망쥐 주교가 신학교를 방문해 신학생들에게 순명을 요구하며, 이에 응하지 않는 학생들은 퇴학시키고 신학교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결국 신학생들은 4월 3일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며, 드망쥐 주교는 5월 1일에 조기방학 조치를 내렸습니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도 3월 23일에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자 교구장인 뮈텔 주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만세운동 참여를 금지하고, 그러지 않으면 학교를 떠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해 서품식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시위를 주도한 신학생들은 퇴학당했으며, 이후 대부분 신학생들은 만세운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한편 기록에 따르면, 교구 소속의 인천 박문학교와 대구 해성학교 학생들은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기도 했고, 안성에서는 안성본당 공베르 신부가 만세운동으로 일본인들에게 쫓기던 주민들을 성당에 들여보내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그해 5월 말까지 서울, 원산, 신의주, 평양, 해주, 공주, 대구 등 7개 도시의 감옥에 53명의 천주교인이 수감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전체 수감자 9천여 명 중 0.6%에 지나지 않지만, 기록에 잡히지 않은 신자들도 꽤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당시 천주교회의 주교들은 한결같이 민족의 거사였던 3.1운동을 단죄하였습니다. 뮈텔 주교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고 하였으며, 대구 교구장이던 드망쥐 주교는 “일본 정부는 합법적 정부이므로 우리 가톨릭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쳤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13. 한편 한국인 사제 가운데 민족운동에 협조적인 분이 있었습니다. 풍수원성당의 첫 한국인 사제였던 정규하 신부(1863-1943)입니다. 1910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정규하 신부는 일본군에 쫓겨 풍수원성당으로 피신한 의병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성당 사랑방을 빌려 이 의병들과 본당 신자들을 모아 삼위학당(三位學堂)을 설립했습니다. 이때 교사로 충남 논산에서 박 토마씨를 초빙하여 한글과 한문,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습니다. 특히 역사 교재로 <월남망국사>를 채택, 베트남의 예를 들어 독립의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아 이 교재는 일본 관헌에 압수당하고, 박 토마는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또한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는 이 삼위학당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강원도에서는 처음으로 횡성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안학만 신부(1889~1944)는 용인의 압고지성당에서 본당사목을 하다가 일부 신자들의 모함으로 성무집행을 정지당하자, 이 처분의 부당함을 원 라리보 주교에게 전하고 1930년 만주로 떠나 1937년까지 독립운동을 하다 총상을 입고 귀국한 경우도 있습니다.

14. 한편 북간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주축이 된 용정촌에서는, 1919년 3월 13일 정오에 울린 성당 종소리를 신호로 1만여 명의 군중들이 시내에 모여 ‘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때 김영학 회장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를 벌이면서 중국 경찰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했습니다. 교우촌인 대교동의 교향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3월 16일에는 장백현의 천주교 신자 30여 명이 압록강 대안에 있는 혜산의 일본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 원산대목구가 설정되고, 1928년 연길대목구가 설정되기까지 비교적 교회제도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던 간도지역에선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방우룡이 대표를 맡아 1920년 3월 23일 연길현 다조구에서 천주교인으로 구성된 무장독립단체인 ‘대한의민단’이 창설되었습니다. 방우룡은 1914년 연길에서 천주교 학교를 운영하였고, 다른 천주교인들과 함께 1919년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재간도대한민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대한의민당은 교우들의 헌금으로 재정을 충당했으며, 최대 200명의 군인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의민단은 1920년 7월 북간도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동도독군부를 창설할 때 대한독립군과 함께 제2대대(대대장 방우룡)로 편성되었고, 소명월구에 있던 방우룡의 집과 천주교회 건물을 군사령부로 썼다고 합니다. 의민단은 이후 김좌진, 홍범도 장군으로 유명해진 북로군정서에 합류합니다.

15 사실상 교계제도로 꽉 짜여진 한국천주교회를 주도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을 단호히 금지하는 상황에서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1919년 10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 명의로 ‘통유’ 제1호에 <천주교 동포여>라는 포고문이 게재됩니다. “여러분은 대한민족이 아니뇨. ... 전 한족이 다 일어나 피를 흘리고 자유를 부르짖을 때에 어찌하여 삼십만 명 천주교 동포의 소리가 없나뇨. ... 여러분의 종교를 보아 주교는 여러분의 두목이라 하더라도 민족으로 보아 여러분은 저 일인(日人)의 학살을 당하는 남녀의 형제자매가 아니뇨. 천주교의 동포가 언제까지든지 가만히 있다 하면 이천만 대한민족은 여러분을 일인(日人)보다 더 가증한 적으로 알 것이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천주교 제도권의 통제 아래 있는 천주교인의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는 애달픈 호소입니다.

당시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 치릴로와 안공근 요한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했는데, 안정근은 1920년 5월 임시정부 특파위원으로 북간도에 파견되었고 대한적십자사 부회장을 맡았습니다. 안공근은 1921년 4월 임시정부 외무차장으로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한편 곽연성 요셉은 1923년 천주교 대표로 국민대표대회에 참석하였으며, 한국노병회와 길림 독립운동단체 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16. 윤예원 신부는 황해도 은율성당 본당신부인데,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임 빌리버라는 청년을 만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임 빌리버는 임시정부에서 설립을 인가한 대한적십자회 회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1919년 10월 황해도 매화동 본당에서 열린 사제회의에서 윤예원 신부를 만나 천주교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한 <천주교 동포여>라는 권고문 500부를 전달하였습니다. 윤 신부는 이 권고문을 배포하면서 동시에 동료사제들과 신자들에게 적십자 회비를 거두어들였는데, 이 적십자 회비는 사실상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뮈텔 주교에게 알려지면서 경고를 받았으며, 문책성 인사로 경기도 하우현성당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후로도 윤예원 신부는 1925년 고향인 부여의 땅을 팔아서 성당 아래에 ‘애경강습소’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지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강원도 대화성당에 재임할 때는 미사 강론 중에 좌석에 순사가 앉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 일왕을 “귀머거리요 소경”이라고 언급하여 한 주일 동안 투옥된 적이 있었습니다.

 

제6대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1935년 9월 덕원수도원을 방문했을 대 활영한 기념사진. 수도원 입구에 일장기가 걸려 있다.
제6대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1935년 9월 덕원수도원을 방문했을 대 활영한 기념사진. 수도원 입구에 일장기가 걸려 있다.

한국교회의 친일행적

17. 일제강점기 천주교회에서는 사제와 신학생, 평신도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바 있으나, 이는 대부분 개별적 참여에 그치고 있습니다. 정작 교회지도부는 국권이 일제에 침탈당하는 매 순간 일제와 깊숙이 결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항 이후 한국천주교회 지도부의 일관된 사목정책은 ‘정교분리원칙’이었으며, 이는 교회가 지배적 정치권력과 마찰을 피하고 교회를 보호하려는 조치였습니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한국천주교회 지도층의 관심은 오로지 안전하게 천주교회를 유지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18.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때 뮈텔 주교는 이렇게 ‘1907년도 보고서’에 적었습니다.

“조선 황제의 양위(讓位)와 조선 군대의 해산은 여러 지방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군인들은 생활을 위해 일하려 하지 않고 항쟁으로 들어가 이미 전국을 휩쓸고 있는 소위 ‘의병’들과 합세하였습니다. 선의의 소수 애국자들을 제외하면 자칭 이들 ‘의병’들의 대부분은 약탈자이거나 산적들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옛날의 도적행위를 계속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들의 애국심을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습니다.”

의병들을 도적이나 약탈자로 규정한 사실은 뮈텔 주교가 왜 대한의병 참모중장이었던 안중근을 혐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뮈텔 주교와 선교사들은 일본을 문명국으로, 조선을 비문명국으로 간주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환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뮈텔 주교는 ‘1908년도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은 일본인들의 지도 아래 발전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개화되기 위해 바지를 입고 어깨에 양복을 걸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조선인들 중에도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화문명이라는 것은 윤리적 덕행의 실천에 있으므로 현재는 스승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생도들에게 별로 가르쳐 줄 것이 없습니다.”

19. 신사참배와 관련해 일본과 한국의 천주교회는 1925년 교리교사들을 위한 <교리교수지침서>와 최루수 신부가 지은 <천주교요리>에서 “신사참배라는 것은 확실히 이단이니 아주 금하는 것”이라며 거부하였습니다. 하지만 1931년 만주사변으로 전시체제가 확대되면서 1932년 일본천주교회가 신사참배가 ‘애국심과 충성심을 드러내는 시민적 예식’이라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받아들여 교황청의 재가를 얻어 신사참배를 수용하였고, 마렐라 주일 교황대사가 조선천주교회에 <국체명징에 관한 감상>이라는 신사참배 권유서를 발송함으로써, 오랜 논란 끝에 조선천주교회도 1940년 ‘조선 성교회 8교구 주교회의 사목교서’를 통해 “신사참배가 각국의 전통적 관례를 존중하려는 교황청의 뜻에 부합한다”고 밝히면서 교회의 결정에 순명하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뮈텔 주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계속 거부할 경우 새로운 박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염려해 "신사참배가 비록 그 시작은 종교적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일반의 인정과 관계 당국의 성명에 의해 국가의 한 예식으로 됐다"며 신사참배를 용인했다.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경성연맹 결성식 보도 기사([매일신보], 1939. 5. 16) 노기남주교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거나 집회를 주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교단의 협력을 주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노기남은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경성연맹 결성식에서도 이사로 선임되었다.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경성연맹 결성식 보도 기사([매일신보], 1939. 5. 16) 노기남주교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각종 행사에 참석하거나 집회를 주재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교단의 협력을 주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노기남은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경성연맹 결성식에서도 이사로 선임되었다.

20. 한편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한국천주교회는 좀 더 적극적인 부일(附日)행동에 나섭니다. 원 라리보 주교의 ‘1938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천주교회는 총독부와 합의를 통해 성당 입구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경례와 선서를 하도록 했으며, 국가의 번영과 천황의 지향에 따라 공동기도를 드리고, 일본 군대와 전쟁 희생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헌금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38년 2월 13일에 거행된 목포천주교회의 미사를 살펴보자면, 먼저 성당 밖에서 개식사와 일장기 게양, 국가합창, 항거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하고,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미사를 봉헌하고서, 연회를 열고서 출정장병의 가정을 위로 방문했다고 합니다.

중일전쟁 1주년이 되던 1938년 7월 7일 결성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참여한 경성교구는 원 라리보 주교 이름으로 “본 교구 소속 교회의 성직자와 신도는 총동원하여 지금 전시체제 아래의 황국신민으로서 총후(銃後)의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행사계획을 전교본부에 보냈습니다. 이에 따르면. 매일 아침마다 황실의 안위와 무운장구를 위한 기도하고, 매주일 무운장구를 위해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매월 첫 번째 일요일에는 신도들에게 시국에 대한 인식과 총후국민으로서 각오를 일층 굳세게 하기 위하여 기원제례와 설교를 행하고, 연중행사로 4대절(大節)과 교회대첨례에는 교회당에서 장엄한 기원제를 거행하고, 제식 후에 출정군인 가족과 부상병을 위문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근로저축에 힘써 국방헌금과 부상병 위문금을 헌납하라고 제시되어 있습니다.

21. 한국교회는 순교정신마저 왜곡시켰습니다. 1939년 기해순교 100주년 기념으로 결성된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대식에서는 성명서를 통해 “우리 순교자들이 우리 신앙을 강화시키고 가톨릭 진리를 선전하는 것은 자기와 타인의 구원, 그리고 교회의 발전상 크게 유익할 것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이것은 훌륭한 보국운동이 됨을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니 현재 제국에서는 흥아대업을 목표로 하고 나아가는 비상시국에 처하여 ... 순교정신으로 일제에 보국하라!”고 말합니다. 이 순교자현양회의 임원은 노기남 신부와 장면을 중심으로, <가톨릭청년>을 맡았던 장발, 정지용 그리고 해방 이후에 한국교회에 관한 통사를 처음 집필했던 유홍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2. 1940년 6월 13일에는 ‘조선성교회 8교구 연차 주교회의’에서 ‘오늘의 감목교서’를 발표하여 “여러 지방이 동란중에 빠져있고 여러 지방이 장해 밑에 눌러있으나 우리는 평화 중에 거룩한 일을 계속하고 있는지라 ... 국가의 선정으로 바른 질서가 유지되는 동시 우리는 그로부터 허다한 은혜를 받게 되니 이 어찌 이 지방에 나리는 천은이 아니랴. 교우된 본분을 충실히 행함은 곧 착한 국민이 되는 유일한 방도임을 잊지말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하였습니다. 그해에 경성교구는 ‘애국행사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발표합니다.

“경성교구 49지방에서 1937년 7월 7일부터 1939년 12월 30일까지 행하여온 애국행사를 보면 동양의 평화, 황군무운장구, 전몰장병의 위령을 위한 각종 기원성제 2만 9천 6백 22회, 동상 목적을 위한 기도 5만 9천 4백 52회, 국방헌금 3천 6백 24원 23전, 제일선에 보내는 장병위문금 9백 32원 4전, 병기헌납보조금 4백 22원 39전 ... 시국을 위한 강연회와 좌담회 1만 1천 5백 92회 ... 기타 각종 행사 1백 62회로써 어느 때나 진중한 천주교회는 비록 겉으로 떠들어 남의 이목을 끄는 일은 별로 아니할지라도 당면한 책임은 얼마나 은근하고 충실하게 꾸준히 계속 시행하여 나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3. 1940년 10월 16일에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 ‘국민총력연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천주교회 역시 11월 10일에 명동성당에서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을 새로이 결성하고 노기남 신부를 이사장으로 선출하고, 1941년부터 매월 첫 번째 주일을 ‘교회 애국일’로 정했습니다. 노기남 경성교구연맹 이사장 이름으로 발표된 취지문은 이렇습니다.

“... 우리는 다른 국민보다도 특별한 신분으로 즉 천주교 신자라는 신분으로 제국의 국민이 되어 다만 일개 국민으로서만 천황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도 또한 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만일 오늘이라도 폐하와 제국의 엄연현명한 통치가 없었던들 우리가 천주교회 신자로서 교회의 모든 본분을 안온하게 지켜가고 있었을지가 의문입니다. ... 이런 사실을 보더라도 한 국가 안에 있어 종교는 종교로서도 국가의 혜택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 이러한 취지에서 우리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은 매월 제 일주일을 교회애국일로 정한 것입니다.

애국주일을 위하여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 현금 국책수행을 위하여 정부당국에서 명하는 일체 행사는 물론이요, 교회당국으로부터도 교회행정을 위해서나 시국극복을 위하여 명하는 행사가 있을 때에 사적 개인적 무슨 불편이 다소 있을지라도 봉사봉공의 정신을 가지고 솔선하여 모든 행사에 협력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교회 애국주일의 행사를 말하면 특히 이날에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거행할 것과 미사 전후하여 애국식을 거행할 것과 미사 중 시국에 대한 강론과 미사 후 신궁 혹은 신사참배를 단체로 할 것과 교회저축조합저금을 수합할 것 등 이런 행사들입니다. ...”

이후 경성교구는 ‘군기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는데, 1942년 1월 15일자 <경향잡지>에 따르면, 매월 일인일전(一人一錢)운동을 벌여 일제에 1만 원의 달하는 현금을 헌납했음을 자랑하며 연맹 이사장 노기남 신부가 이 때문에 조선군 사령부와 일제 당국자를 감격시켰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노기남 신부는 일찍 창씨개명하였는데, 오카모토 가네하루(岡本鐵治) 신부로 불렸다.  

24. 1941년 12월 8일 일제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경성교구연맹은 “제국은 동양의 영원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숙적 국가인 영·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제국황군은 도처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 이번 전쟁이야말로 우리 제국으로서 아니 할 수 없는 전쟁이고 반드시 이겨야 할 전쟁입니다. 또는 개전 후 전과로 보아 이미 최후승리는 결정된 사실입니다. 이때에 있어서 우리는 정부당국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각각 자기 본분을 완수함으로 지역봉공, 일치단결의 정신을 일층 굳세게 다지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특히 우리 천주교 신자는 모든 총후국민의 의무에 있어 솔선하여 나가고 타인의 모범이 되기로 노력하기 경요하는 바”라고 밝혔습니다. 이 낯 뜨거운 발언에서 일제강점기 천주교회의 부역을 일제의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는 변명은 설득력을 잃어버립니다.

더욱이 1942년 1월 18일, 경성교구 새감목(교구장)으로 명동성당 보좌신부이며 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이었던 노기남 바오로 신부가 취임하자, 경성교구연맹은 ‘대동아 전쟁 기구문’을 반포하여 미사 끝에 합송하고, 아침, 저녁기도를 바칠 때마다 일본황실과 동양의 평화, 그리고 전몰장병을 위해 기도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후 노기남 주교는 교구장 업무가 많아지면서 총독부를 상대로 하는 대외업무를 관장할 경성교구연맹 이사장으로 남상철을 임명하고, 자신은 회장으로 남아 교회 내 관련사무만 총괄하게 됩니다.

25. 1943년 일제가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하게 되면서 경성교구연맹은 “반도청년들이 군문에 들어가는 날에는 반도동포(조선인)도 내지동포(일본인)와 추호도 다름없는 완전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갖출 것”이라면서, 남상철 이사장과 신인식 신부 등이 순회강연을 통해 신자들이 지원병과 학도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한편 학도병 독려를 위해 종교단체들이 연합해 ‘조선종교 전시보국회’를 결성하고 대표위원으로 노기남 주교와 김한수 등 11명의 천주교인이 참여합니다. 이 때문에 한공렬 신부 등 학병으로 끌려간 사제들도 있었고, 박성춘 신부처럼 일본의 탄광으로 징용을 간 이들도 있습니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명동대성당 성체 난간도 본래 쇠로 된 것이었는데, 일제가 거두어가는 바람에 그때 나무로 바뀌었습니다. 이를 두고 경성교구연맹은 “우리가 날마다 애용하던 식기를 헌납하여 이것이 어뢰가 되어 적국의 군함을 격침시키고 우리의 자녀들이 밥을 먹던 수저가 헌납되어 이것이 포탄도 되고 폭탄도 되어 혹은 적국의 비행기를 떨어트리는 혹은 적군의 진지를 괴멸시키고 하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얼마나 통쾌하며 얼마나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가! 이런 쾌감은 그 자체로 보아도 우리가 금속품을 남모르게 감추고 비밀히 애지중지하는 그 애착심에 비하여 훨씬 고상하고 깨끗하고 대장부다운 맛이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일제의 침략전쟁에 도취되어 있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26. “흰 바탕에 붉은 해를 그린 국기는 대일본제국의 표징으로서 그 의장은 간단하나마 심장한 의미가 있고, 또 극히 아름다워 모든 나라의 국기를 멀리 초월한다”고 했던 경성교구연맹은 ‘비행기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특별지원병으로 나선 청년들을 위해 대대적인 행사를 열었습니다. 1944년 1월 2일 명동대성당에서 장행회가 개최되었는데, <경향잡지>는 1944년 2월 15일자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합니다.

“오전 10시 오까모도 주교께서 10여명의 지원병들이 특별한 좌석에 참례하는 중 교구내 모든 특별지원병들을 위하여 미사성제를 거행하시고 성체를 영하여 주셨으며 아직 견진성사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견진성사를 영하여 주시고 또 성모패를 특별히 강복하셔서 각 지원병들에게 친히 매어주시고 주교 특별강복을 베푸셨으며...”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오면서, <경향잡지>는 1945년 5월호 마지막으로 실린 ‘국민총력’란에 조선헌병대 사령부 가와에 중좌의 ‘마음을 무장하라’는 내용의 방송연설을 실었습니다.

 

정부수립 후 1948년 한때, 이승만과 나란히 선 노기남 주교. (사진 출처/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정부수립 후 1948년 한때, 이승만과 나란히 선 노기남 주교. (사진 출처/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해방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의 태도

27.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한국교회의 노기남 대주교는 8월 16일 <공문고유(公文告喩)>를 통하여 “세계의 참담한 전쟁이 그치고 이제 조선에도 새로운 질서가 성립됨에 이르른 현금 시국은 우리 앞길에 중대한 관계를 좌우하는 열쇠를 잡고 있는지라 그러므로 경솔한 언어와 행동을 삼가 피하여 극력 자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교회 입장에서 조선의 해방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1949년 연두사에서 노기남 주교는 “회고하면 우리 민족이 일본 제정 밑에 잡혀 있을 때에는 우리의 해방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었으나, 천주의 안배는 실로 오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기회로 우리는 해방되었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8. 일제강점기에 일사분란하게 행했던 교회의 부일행동은 해방공간에서 교회의 처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구세주처럼 찾아온 것이 미군입니다. 9월 9일 오전 10시 미군 군종사제장 자격으로 입국한 스펠만 대주교의 요청으로, 미군 등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황군의 무운장구를 빌던 명동대성당에서 미군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된 것은 역설적인 일입니다. 이 무렵 2~3명의 장군을 포함해 400여 명의 미군장병들이 주일마다 명동성당을 찾아와 미사를 드렸으며, 미군정 장관 아놀드 소장도 가톨릭신자였습니다. 그리고 9월 26일 ‘한국 천주교 79위 순교복자 대축일’에는 미군환영대회가 명동성당에서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애국가 제창, 미국국가 취주, 미군 환영사, 미군 대표 답사, 기념품 증정, 조선독립만세 삼창, 미군승전만세 삼창을 하였습니다. 한 달 전의 교회 사정을 생각하면 낯 뜨거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군정청의 하지 중장 및 아놀드 소장과 긴밀히 교제하던 노기남 주교와 천주교회는 해방공간에서 안전한 지원군을 얻은 셈입니다.

29. 당시 미군정은 한국천주교회에 행정관리나 ‘행정고문회의’에 참여할 인사들에 대한 추천을 외뢰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인재양성에 관심이 없었던 천주교회에는 내세울 사람이 별로 없었고, 결국 한국민주당 소속의 개신교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스펠만 대주교의 잦은 한국 방문과 1947년 5월 로마 교황사절로 임명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방 주교(Byrle, J. Patrick)와 미국 메리놀회의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면서 ‘조선인 미국통’이 부족했던 천주교회의 약점을 채워주었습니다. 이들은 명동성당에 머물며 미 8군사령부 등 미군정 당국과 연계된 교회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30. 당시 미군정은 맥아더 사령부와 긴밀히 협의하고 있었는데, 맥아더는 소련의 위협을 막고 반공의 방벽을 남한에 세우기 위해 협력세력을 찾았고, 그들이 곧 이승만과 친일파가 주류를 이루는 한민당 세력이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인 가톨릭교회의 반공노선에 따라서 한민당을 지지하고, 노기남 주교는 1946년 10월 6일 <경향신문>을 창간하면서 “유물 공산주의 극좌 악질분자들의 선전을 봉쇄하고 국민의 정신을 계몽 선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나는 생각했다”고 밝혔습니다. 사실상 해방공간에서 점령군으로 와 있는 미군정기에 교회와 친일파들의 반공주의는 자신들의 친일 전력을 덮어버릴 수 있는 보증수표가 되었습니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삼팔선 이남에서 친일잔재의 청산에 사실상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일제강점기의 경찰과 관료들을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친일파로 몰린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미군정을 뒷배로 삼고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천주교회로 개종한 지식인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울러 부일활동에 몰두했던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와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에서 활동했던 남상철 등 인사들은 여전히 교회 안팎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순교자현양회 임원이면서 원 라리보 주교의 시국강연 원고를 대필해 주었다는 장면은 교회와 이승만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국회에서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31. 제헌국회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된 것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처벌에 관한 법률 제정이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수뇌부가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로 채워져 있는 상태에서 친일문제는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입장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P.R..K라는 필명을 가진 이는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에서 “해방 조선에는 독립보다 환급히 논의되었던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일제 36년간 그들과 협력하여 동족을 못살게 하였던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처단 문제였다. 해방과 같이 초래된 38 양단 군정의 실시는 우리에게 자주적 입장을 용허하지 않으므로 여론에만 그쳤을 뿐 아무런 실질적 처단은 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으나, 제헌국회 선거가 끝나자 같은 <가톨릭청년> 7월호에서는 “과거 일정 시대에 우리의 독립을 방해한 반역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정 시대의 고관이나 공직자라 하여 모조리 공민권을 박탈하여 매장해 버리는 것은 그 진의가 어디 있는가. ... 우리나라는 국토는 적으나 대도량을 가져야 한다. 적국에서라도 그 장점을 수입하여야 하거늘 동포 중에서 유능한 인재를 모두 매장해 놓고 정권과 영예를 독점하려 하니 이런 야심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국가의 운영이 이상적으로 진전되기 어렵다”며 친일파와 반민족자를 색출하고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즉, 이승만 정권을 문제 삼는 (좌파적) 국회의원들이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32. 결국 제헌국회가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10월 22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설치되어 예비조사에 들어가 7,000여 명의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하고, 친일파들을 체포하여 법정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처벌을 비난하는 담화문을 여러 차례 발표하고, 이승만의 입장에 고무된 친일 세력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좌절시키기 위해 친일 경찰과 공모하여 반민특위 관계자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합니다. 경찰에 의한 특경대의 강제 해산으로 사실상 반민특위의 활동은 마비되었고, 활동기한을 1949년 8월 말까지로 단축한다는 내용의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51년 2월에 폐지되어 친일파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반민특위 활동 시간 중 실제로 재판을 받아 형이 선고된 반민법 해당자는 악질적인 10여 명뿐이었고, 그중 5명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실제 형을 받은 사람은 고작 7명입니다. 그 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친일파 문제는 역사의 수면 위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친일인명사전>과 한국교회의 죄책 고백

33. 친일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다시 떠오른 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8일에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때문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을사늑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한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를 친일파로 규정했는데, 사전에 수록된 전체 인물은 4,776명입니다. 숱한 논란 속에서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된 당일 효창공원 안의 백범 묘소에서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에서 김병상 신부(이사장)는 “한민족을 유린한 일제의 침략자들과 손을 잡은 자들로 인해 민족의 피가 더럽혀졌다. 이제 친일사전 발간으로 상처와 아픔을 걷어내고 이 땅을 순수한 혈통으로 가꿔야 한다.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정신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애쓴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한다”고 인사했습니다.

34. 이날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은 “반민특위 해체 후 60여 년 만에 이룩한 쾌거”라고 전했는데, 사전에 수록된 인물 가운데 천주교인은 노기남 대주교, 김명제 신부, 김윤근 신부, 신인식 신부, 오기선 신부, 장면, 남상철 등 7명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교구는 민족문제연구소에 보낸 공문을 통해 “노기남 대주교 등 가톨릭 인사 7명이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명단에 포함된 것은 대부분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연맹,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등 단체에 간부로 속해 있었기 때문”이며, “전쟁 마지막 시기에 종교 등 각 단체 책임을 진 인물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만든 총동원 단체의 장이 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변호했으며, “이들이 형식적으로는 이 단체에 속해 있지만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한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로 보기는 어렵다”며 정상 참작을 요청했습니다. 덧붙여 “당시 노 주교의 행동은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회 수장’으로서 교회와 교인들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였다는 점에서 다른 친일 행위자들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35. 한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사람들 가운데 개신교는 56명(목회자 42명, 평신도 14명)으로 나타났는데, 천주교 인사가 7명에 불과한 것은 “천주교회의 친일행적이 개별적인 행위보다는 교단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국민정신총동원과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등의 이사장 및 이사급 등 책임자로 한정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평신도인 장면과 남상철 등은 천주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 친일행적이 있는 인물로 사전에 등재되었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해제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조선 천주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총독부와 관계가 원만한 편이었다고 전합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약간의 갈등이 없진 않았으나, 이 문제도 1932년 교리문답의 수정과 1936년 교황청 포교성의 지시에 순응함으로써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36. 하지만 한국교회가 일제강점기 친일행적에 대하여 고백하고 성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2000년 3월 12일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내 바실리카 성당에서 봉헌된 미사에서 예수 탄생 2000년을 기념하는 대희년을 선포하면서 <회상과 화해-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문서는 중세의 종교재판, 십자군 원정, 유대인 박해,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방조, 아랍세계에 대한 약탈, 그리스도교인들의 분파, 여성에 대한 억압 등 일곱 가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교종은 이날 강론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교인들의 회개를 받아들여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얼굴로 삼천년대를 맞이하려는 교황청의 용기있는 태도였습니다.

그해 12월 3일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역시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한국천주교회의 2000년 ‘쇄신과 화해’>라는 문서를 발표했는데,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천주교회의 친일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뿐 아니라 참회의 말도 아예 없었습니다. 그저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때로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라는 유감 표명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일본천주교회의 죄책고백에 비교한다면 오히려 참담한 수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37. 일본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이케나가 준 대주교는 2010년 8월 6일부터 시작된 ‘평화주간’에 담화문을 발표해 “한일합병 100년을 맞아 일본 자국이 행한 일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히면서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대한 시기에 우리 가톨릭교회의 책임을 포함하여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일본교회가 교회 자신과 일본정부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은 “두 번 다시 같은 비극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는 맹세인 동시에 미래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일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하느님 앞에서 용기를 갖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참된 인간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며,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는 적의라고 하는 장애의 벽을 헐어버리고 참된 화해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38 일본천주교회는 평화주간 개회전례에서 일본 천주교 사이타마 교구장 타니 다이지 주교가 “일본은 무력에 의한 침략과 동화정책을 기축으로 한 식민지 정책으로 식민지에서 생명과 생활, 문화 독자성을 파괴하고 막대한 고통을 줬다”고 반성하였으며, “황민화 정책은 현인신(現人神)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신도라고 하는 종교를 일본뿐 아니라 식민지에도 철저히 적용하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일본의 황민화 교육을 비판했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와 국회를 향해 “1904년 1차 한일늑약으로부터 1910년 한일합병늑약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늑약이 불법이며 부당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죄책을 사과할 것”을 촉구하고,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과 조선인 강제연행, 강제노동, 일본군 성 노예로 취급된 위안부들에 대한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만들고 보상법을 제정하며, 재일 한국ㆍ조선인과 후손들에 영주권을 보장하고 국제인권규약이 정하는 민족적 소수자로서 지위와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일본교회가 대신한 것입니다.

39. 경술국치 100년을 기념해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벌어진 범죄에 대해 논의하는 한-일 교회간 평화주간 심포지움에는 일본교회 측과 달리 한국교회에서는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어떤 주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원 양요순 수녀와 간사 안희영 수녀가 참석했을 뿐입니다. 친일과 전쟁범죄를 다루는 한국교회의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평화주간에 앞서 일본교회 순례단은 2010년 3월 하얼빈역과 뤼순 감옥 등을 돌아보고, 3월 26일 중국 다롄 성당에서 한국, 중국 천주교와 함께 안중근 순국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한 바 있습니다. 6월에는 정의평화위원장 마쓰우라 고로 주교를 중심으로 순례단을 꾸려 안중근의 위패가 있는 미야기현 구리하라시 다이린지(大林寺)를 방문하고, 조선인 징용자들이 끌려갔던 센다이시 호소쿠라(細倉) 광산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일본의 재무장화를 꾀하는 극우 정치세력에 맞서 ‘평화헌법’을 지키는 운동을 해왔던 일본천주교회의 예언자적 모습입니다.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2007년 5월 19일 가톨릭뉴라이트 창립식이 열렸다. "가톨릭뉴라이트가 사랑과 희생 그리고 믿음의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뉴라이트전국연합(상임의장 김진홍)의 종교조직인 가톨릭뉴라이트(상임의장 김현욱, 상임대표 김태우)가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기반으로 알려져 있다.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www.catholicnews.co.kr)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2007년 5월 19일 가톨릭뉴라이트 창립식이 열렸다. "가톨릭뉴라이트가 사랑과 희생 그리고 믿음의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뉴라이트전국연합(상임의장 김진홍)의 종교조직인 가톨릭뉴라이트(상임의장 김현욱, 상임대표 김태우)가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기반으로 알려져 있다.

윤석열 뉴라이트 정부와 친일문제

40. 윤석열 정부 들어서 뉴라이트 세력이 다시 사회적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모든 정치세력이 그러하듯이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기에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반북-반공주의를 내세우고 친미-친일 사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개인적 이득을 탐하는 자들’이라고 에둘러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이 아직도 한국사회 안에서 득세할 수 있는 배경은 근본적으로 ‘친일잔재의 미청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친일행적을 지닌 세력은 자신을 보위하기 위하여 반공-애국주의를 표방하고 친미적 태도를 통해 기득권을 확보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윤석열로 이어지는 보수적 정치세력을 숙주로 기생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친일행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소극적으로는 자신들과 대극적 위치에 있는 삼일만세운동과 독립운동을 바탕으로 하는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훼손하기 위해 건국절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적극적으로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은 일본제국의 지배하에서 각종의 근대적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사회 간접 자본이 확충되는 등 유·무형적 근대(modern) 문물이 이식되어 경제·사회·문화·사상에서 폭넓은 변화를 경험하였고, 이것이 광복 이후 한국 경제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식민 근대화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일제의 전쟁범죄를 접어두고 한미일 삼각동맹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41. 한국사회는 2024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점으로 윤석열 정부의 ‘친일정권’ 논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광복회와 독립운동 관련단체들이 뉴라이트 사관을 가진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반발해 정부 광복절 행사에 불참한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형석 관장은 기자회견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류가 있다. 잘못된 기술에 의해 억울하게 친일로 매도되는 분들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이를 두고 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은 “뉴라이트들이 이명박 정부 때는 건국절 논란을 일으켰고, 박근혜 정부 때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 하는데, 아마도 윤석열 정부를 마지막 기회로 보는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를 입증해 주려는 듯, 윤석열 정부는 역사·교육 관련 국가기관에 뉴라이트 성향의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김주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허동현 국사편찬위원장,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 등을 임명했습니다. 최근에 대통령이 여론을 거슬러 임명한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 김용현 국방부 장관도 예외가 아닙니다. 김문수 장관은 “일제강점기 시절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말했으며,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한·일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 발언은 윤석열 대통령이 왜 일본과 관련된 발언을 할 때마다 국민정서를 거슬러 함부로 발언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 국민들의 견해와 마음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42.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4월 24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100년 전 일을 가지고 (일본인들이) 무조건 무릎 꿇어야 한다는 건,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이 더 이상 과거사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발걸음 더 나가서 윤 대통령은 2023년 3월 21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려고 했을 때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들이 주장했던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제105주년 3.1절 기념사에서는 독도영유권을 포함한 한일 양국간의 쟁점과 과거사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지금 한일 양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새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유, 인권, 법치의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입장을 반영하듯이, 최근에 국방부는 군 정신교육 교재를 새로 발간하면서 홍범도,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모두 뺐습니다. 올해 광복절 당일에 공영방송 KBS는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을 중계하면서 ‘기미가요’를 내보냈고, 서울교통공사 등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시청역 등에 설치된 독도조형물을 철거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윤석열 정부가 친일논란을 일으킨 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2023년 3월에 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변제 방안을 제시하기고 했고, 8월에는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방치하고, 2023년 8월 에는 육군사관학교 안 홍범도 장군 등 독립운동가 흉상 이전, 2024년 7월 일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찬성 등이 이어져 왔습니다.

43. 2023년과 2024년에 집중적으로 윤석열 정부의 친일적 행태가 드러나는 것은 1965년 맺어진 한일기본조약과 국교정상화 60주년이 2025년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한일 양국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양국 정상이 새로운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대통령실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함께 바라보는 비전도 지리적으로 훨씬 확장이 돼야 한다”면서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일) 3개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주도권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미래적 가치가 불분명하지만, 그것이 중국과 러시아, 북한에 대한 배타성을 기초로 하는 동아시아 패권국가로 되려는 야심이라면, 이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초래할 수 있으며, 우리가 희망하는 온전한 의미의 ‘정의로운 평화’를 담보할 수 없으리라 예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44. 문규현 신부는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빛두레, 1994)에서 “회개란 깨진 양심, 은폐된 진실, 짓밟힌 정의를 본래의 자리로 회복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한국교회의 어둡고 안타까운 역사적 진실을 정직하고 겸손하게 밝히고, 그 어둠 한가운데를 주어진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생애를 바쳐 걸어온 사제의 말이니 믿을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 부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역사의 제단 앞에서 우리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온 겨레가 일제의 식민통치로 고통받고 있을 때, 무딘 양심으로 십자가 대신에 안온한 교회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친일행적으로 상처를 남긴 교회의 죄는 마땅히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겠으나, 또한 죄의 연대성 안에서 교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참회해야 할 공동의 죄입니다.

하지만 죄의 연대성 안에서 참회하는 자에게는 은총의 힘이 작용합니다. 문규현 신부는 “하느님과 민족 앞에서 부끄러운 우리의 잘못을 낱낱이 밝혀내고 고백하는 것이 하느님 앞에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평화를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들의 눈물을 씻어주시며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교회는 겨레의 아픔을 제 것으로 삼아 슬퍼하며, 그 백성들과 함께 기꺼이 남아있는 여정을 걸어가는 교회일 것입니다. 신동엽 시인과 더불어 “껍데기는 가라/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노래할 줄 아는 교회일 것입니다. 묵은 시대의 성전 휘장을 두폭으로 찢어놓으신 예수님의이 죽음을 기억하면서, 그 죽음 안에서 오히려 희망을 발견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45. 교회는 당연히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다시금 겨레의 삶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세력이 삼키려 할 때, 우리는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과 타협하며 연명하는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습니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한 지 70년이 넘었는데, 외세와 간통한 자들이 천연덕스럽게 독립영웅들을 우롱하고, ‘일본의 마음’을 거론하고 있는 참담한 현실입니다. 자기 안에 그늘이 있는 자는 빛을 함부로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공적으로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빛 가운데서 가벼운 영혼으로 겨레의 가슴에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만!”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지금은 지성소에서 광장으로 나가야 할 시간입니다.

46, 하느님께서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탈출 3,7)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자리가 하느님의 자리이고,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그곳에 제대를 세워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 백성들과 더불어 예수님처럼 길 위에 서는 교회를 기대합니다. 그 길에서 참된 해방을 맛보고 자유롭게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을 기대합니다.

47.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는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사형을 구형받았을 때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며 일제를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면회하러 가지 않았던 조마리아는 아들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냅니다.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어머니의 말씀처럼, 안중근은 교회로부터 버림받았으나 마지막까지 독실한 신앙인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내 시신을 국내에 옮기지 마라.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그곳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안중근의 시신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마치 히브리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모세의 무덤을 찾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 인심과 교회 사정이 제 이득을 탐하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제 몸조차 제 것이라 여기지 않았던 안중근을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한국천주교회가 행한 부끄러운 부일행적에 대해 고백하고 참회하며 겨레 앞에서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는 한국사회 안에 온존해 있는 일제 잔재가 완전히 청산될 때까지 선의의 모든 세력들과 연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윤석열 정부 안팎에 도사리고 있는 반민족적인 뉴라이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한국천주교 신앙인의 고백과 다짐>에 공감하는 분은 아래 주소를 통해 서명운동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명하기]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한국천주교 신앙인의 고백과 다짐 (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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