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사랑하는 ‘친구’ 평신도 여러분
상태바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사랑하는 ‘친구’ 평신도 여러분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8.19 14: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적 세속화 시대, 성직자 권위주의에 대한 유감-4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4년 8월 14일 방한 첫날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강당, 한국 주교들을 만난 자리에서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6일 꽃동네 영성원에서 열린 평신도사도직 단체와 만난 자리에서는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이라고 말했다. 주교들을 ‘형제’라고 부른 이유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주교직무를 수행하는 자임을 확인하려는 것이고, 이 주교직무의 핵심은 복음서의 표현대로 “(평신도인)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임을 한국교회 주교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과연 주교들과 주교의 사목대리인인 사제들이 신자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성직은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목숨을 바쳐 자기 백성을 섬겨야 하는 자리다. 결국 이런 형식으로 형제인 주교와 사제들은 ‘유사(類似) 주님’의 자리에서 백성들의 친구가 된다.

여기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영성은 ‘주님에 대한 사랑’일뿐 아니라 ‘벗에 대한 사랑’이다. 사실상 벗에 대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영성이다. 예수는 가난한 백성들의 약점을 잡고 ‘주님’이 되고자 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저 섬약하고 슬픈 눈동자를 가진 이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우리들의 친구로 죽었다. 여기서 우정이 발생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친구일 뿐 아니라 연인이기를 자청하신다면, 그래서 연인의 눈높이에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셨다면, 가장 남루한 모습으로 그처럼 남루한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아파하시고 상처를 매만져 주셨다면, 마침내 연인을 위해 목숨을 내주셨다면, 그 사랑의 깊이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전달하시는 매체가 예수였음을 발견한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을 볼 도리가 없다. 그런데 예수가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으니, 가난한 이들 속에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도 하느님을 만나 볼 도리가 없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