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 자살각?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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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망? 자살각?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나요?
  • 윤영석 신부
  • 승인 2016.09.07 16: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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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 신부 칼럼]

이생망? 자살각? 혹시 들어본 표현인지 모르겠다. 나는 주로 소셜미디어로 한국의 상황을 접하는데 비슷한 표현이 몇 개월째 심심찮게 보인다. ‘이생망'은 ‘이번 생(生)은 망했다'를 줄인 말이고, ‘자살각(角)’은 ‘판세를 보니 자살하기 적절한 상황이다'를 뜻한다. 그에 따라 ‘한강 수온 체크’, 한강에 투신하기 전 물 온도를 확인하라는 응용(?) 표현도 있다. 이런 섬뜩한 표현을 농담으로 한다며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일거든 잠시 멈춰보자. 비난한다고 이생망이 이생흥(興)으로 변하지 않을 테니까.

난 정말 망한 걸까?

지난 해 12월 <경향신문>이 청년 1000명을 대상으로 이번 생이 망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지, 있다면 이번 생이 망한 시점과 원인, 그리고 다음 생에 원하는 것을 조사했다. 그 결과, 41.3%가 망했다고 응답했다. 그 시점은 ‘대학교 재학/휴학 기간’이 24.4%, ‘취업 준비’가 17.6%였다. 원인은 ‘본인’으로 64.6%가 지목했고 그 뒤로 ‘사회’가 58.4%를 차지했다.(복수응답) 내세에는 국적, 성별(86.8%가 여성)을 바꾸거나 ‘금수저,’ ‘태어나고 싶지 않다,’ ‘돌덩이' 등이었다.

개인적으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조사 결과가 흥미로웠다. 비록 한국에 살지는 않지만 나도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이생망'을 외쳤는지도…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생망'을 읖조림은 더 안좋은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고 미리 준비시키려는, 자기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로서 생존 본능을 드러내는 건 아니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이 무서워 대학원으로 도망갔고, 대학원 졸업 후엔 취업 준비에 남아도는 시간이 ‘헬' 같았다. 철학자 강신주는 어느 방송에서 ‘인생은 본디 고통스럽다'는 전제하에 ‘바닥을 치고 나면 그제야 보이는 작은 행복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맞는 말이다. 다만 바닥을 치고 일어나서 행복이든 뭐든 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난 정말 망한 걸까?

사진=한상봉

어떤 고통도 시체 앞에선 무력하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표현은 새로운 게 아니다. ‘이생망'의 문을 통하지 않고선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없다. 바울로 성인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공동번역 로마서 6:3-4)

세례를 통해 우리는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또 바울로 성인은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됐다”고 했다. 바닥을 치고 제대로 망한 사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남은 건 없다. 죽은 몸, 말그대로 시체에겐 어떤 형벌도 필요하지 않다. 어떤 고통도 시체 앞에선 무력하다. 모든 게 끝났기 때문에.

내가 죽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에게 죽음을 던진다. 예수는 성스럽고 도덕적인 행동으로 은총을 얻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은총은 인간 모두에게 주어졌고, 그걸 받아들이는 자유가 주어졌다. 내 공덕이나 지식과 신분, 인종, 계급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비롯한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걸 믿는 일. 어떤 수치심과 죄책감이 나를 옭아매도 은총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고 믿는 일. 내가 죽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또 누가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 은총은 유효하다. 내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이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동일하게 주어졌다고 믿는 일. 억울하고 얄밉고 공평하지 않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은총이 여전히 그에게 남아있다고 믿는 일, 역시나 내가 죽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은총은 값이 없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들으면 하느님의 은총을 ‘값싼 은총'으로 만들었다고 호통을 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은총은 값이 없다. 싸지도 비싸지도 않다. 공짜다. 이 말도 안되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일(聖事), 은총 앞에서 내 모든 걸 버리고 끊임없이 비우시는 예수와 함께 죽는 일,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 바로 세례다. 초대교회 세례 예식에서 예비자는 모든 껍데기를 벗은 채 나체로 거대한 세례대에 침수한다. 아마도 ‘이번 생은 망했어'라며 차가운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이생망'이 실제 생물적 죽음을 말하지 않듯이 세례도 마찬가지다. 4세기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실제로 죽지 않았다. 실제로 묻히지도 않았다. 실제로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방한 건 상징적이지만 우리의 구원은 실재(實在)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참으로 묻히시고 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 (Cyril of Jerusalem, “(<The Baptismal Rite, The Awe Inspiring Rites of initiation>, Edward Yarnold, SJ, pp. 76-77)

미사에 참여하면서, 특히 니케이 신경 혹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우리는 ‘이생망’을 마주한다. 이번 생이 끝났음을 기억하고 그곳에 더이상 머무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을 여전히 ‘헬'인 장소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주신 죽음과 삶을 몸에 새긴 채 살아간다. 죽지 못해 사는 몸이 아니라 이미 죽어 새 삶을 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이다. 은총이 모두에게 주어졌듯이 은총의 몸이 있어야 할 자리는 ‘이생망’이 쉴 새 없이 농담을 가장한채 주문처럼 외워지는 곳이다.

 

윤영석(바울로) 신부
미국성공회 뉴왁교구 소속 사제
NewYork-Presbyterian Hospital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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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 2017-04-10 01:21:08
'이생망'의 근원은 당신이 이글을 쓰는 컴퓨터의 Reset버튼입니다. 컴퓨터가 버벅였을 때 Reset을 누르면 새로 시작하는 컴퓨터처럼 이번 부팅 후 작업은 문제가 있었으니 Reset해서 다시해보자라는 말일듯. 예수님의 말보다 불교의 윤회설에 가까울진데 사회적 문제를 자신의 작은 소견으로 해석해보려는 아전인수이시네요. 일기장에나 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