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금) 오늘은 늦잠 자도 되는 날이다. 1985년에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마돈나하우스의 설립자 캐서린 도허티의 22번째 기일. 평소보다 늦게 아침 10시 30분 추모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하루 종일 일하지 않고 기도와 묵상이 이어지는 특별한 날. 모두들 정성들여 옷을 입었다. 나도 침대 옆자리 친구 카타리나의 검은 체크무늬 모직 스커트를 빌려 입었다.
저벅저벅. 투명하게 쏟아지는 오전 햇살의 받으며 눈길을 걸어갔다. ‘세인트 메리’에서의 미사. 함께 부르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The Cry of The Poor)의 가사와 멜로디가 마음을 울렸다.
미천한 이들이 듣고 기뻐하리라
주님이 그들의 간청을 들어 주시며
마음을 다친 이들 가까이 그분이 있다네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려고
모든 상처받은 영혼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대속하여
그들이 두려워할 때 안식처가 되어준다네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려고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는 주님에 대한 노래.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가난하고 단순한 삶이 곧 내 안의 하느님을 만나는 삶이다.” 이 정신을 강조하며 마돈나하우스를 설립했던 캐서린 도허티.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캐서린 도허티, 마돈나하우스를 설립하기까지
그는 1896년 러시아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어린 시절 많은 곳을 여행했던 그는 15세에 사촌 보리스 휴엑과 결혼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엔 러시아 전선에서 남편은 엔지니어로, 캐서린은 간호사로 일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후 두 사람은 영국을 거쳐 1921년 캐나다로 이주했고 아들을 낳았다. 몇 년 후 남편 보리스와 이혼한 캐서린은 1930년대 초 토론토의 빈민가에서 평신도 사도로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시작했다. 당시엔 평신도 사도직이 초기 단계였다. 이 분야의 선구자였던 미국의 도로시 데이는 캐서린을 이해하고 응원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캐서린이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의 영성을 삶에서 구현하는 급진적인 복음의 삶을 실천하면서 젊은 남녀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그 공동체의 이름은 ‘우정의 집’이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시기에 ‘우정의 집’ 회원들은 음식과 옷을 기부 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사회포럼>이라는 신문도 발간했다. 그러나 캐서린 도허티는 러시아 이민자라는 이유로 오해와 비방을 받았고, 결국 ‘우정의 집’은 1936년 문을 닫아야 했다.
토론토를 떠난 캐서린을 초대했던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민권운동 지도자 존 라파지 신부였다. 캐서린에게 뉴욕 북부의 할렘에 ‘우정의 집’을 열자는 것이었다. 할렘에서 ‘우정의 집’을 새로 시작한 캐서린은 전국을 다니며 인종차별 규탄 운동을 했다. 당시 뉴욕의 추기경의 지지를 얻었고 그녀를 중심으로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우정의 집’은 다시 실패로 끝났다. 운동가들 사이의 분열이 큰 원인이었다.
1943년 미국인 기자 에디 도허티와 두 번째 결혼을 한 캐서린은 1947년 캐나다 온타리오의 컴버미어로 왔다. 당시 캐서린은 ‘우정의 집’ 실패의 트라우마 때문에 은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컴버미어 지역의 이웃들에게 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는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훈련센터를 열었다. (그가 조직한 가톨릭 행동의 여름학교에 1950년 존 캘러핸 신부가 결합했고, 그의 지도아래 1951년 마리아를 통해 예수께 봉헌했다.) 1951년 로마에서 열린 첫 번째 평신도 대회에 참석한 캐서린.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격려했다.
1954년 4월, 청빈, 순결, 순명의 약속과 함께 영구적인 성소, 마돈나하우스 공동체를 설립했다. 이듬해 캐서린과 그 남편 에디는 순결 서약을 한 후 공동체 안에서 독신생활을 했다.
캐서린 도허티의 종교적 비전
마돈나하우스가 설립됐던 1954년은 이미 탈종교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시기. 그러나 캐서린에겐 신앙의 비전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방정교의 영적 직관을 북미 가톨릭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 비전에 따라 캐서린은 1960년대에 서구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뿌스띠니아(Poustinia)를 소개했다. 러시아어로 ‘사막’을 뜻하는 뿌스띠니아는 고독, 기도, 금식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며, 자신을 비우는 곳이다.
사제와 남녀 평신도들은 마돈나하우스에서 ‘나자렛의 삶’을 살았다. 일상의 삶과 신앙을 연결하는 것도 그의 중요한 비전 중 하나였다. 농업, 목공, 요리와 세탁, 신학과 철학, 과학, 미술, 연극 모두가 기도하는 삶이었다. 필요한 것은 구걸하고 나머지는 기꺼이 내주는 삶이었다. 그리고 주교들의 초대에 의해 북미, 남미,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서인도제도의 농촌과 도시에 지부를 열었다.
캐서린 도허티는 왕성한 집필가이자, 강연자였다. 직접 집필하거나 녹취한 책이 십여 종, 강연록의 분량은 차고 넘친다. 단순 명쾌하면서도 시적인 것이 특징인 그의 말과 문장. 그 중에서 나에게 특별히 와 닿았던 부분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출처 : www.catherinedoherty.org)
“현재 교회는 너무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그 구조로부터 해방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입니다. 노래입니다. 교회는 온 인류의 눈물입니다. 교회는 어린아이의 미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기쁨과 위안, 희망을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우리의 일상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의 회복을 위해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나는 가난을 자신의 여인이라 불렀던 성 프란치스코를 기억합니다. 나에게 가난은 내가 걷는 곳에서 걷고 내가 먹는 곳에서 먹고, 내가 자는 곳에서 잠을 자는 쌍둥이 자매에 가깝습니다. 가난은 마음의 순결과 관련 있습니다. 마음의 순결은 끊임없이 넘어지는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약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약하고 넘어집니다. 약한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 하느님이 오셨으며, 마음이 깨끗한 자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약한 자들 안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마음의 순결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능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마침내 약한 자들과 타락한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볼 때, 그 시선 또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순수한 마음은 내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내가 말하는 가난은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통해 오는 사랑의 열매, 즉 마음이 순결한 모든 이에게 오는 거대하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것은 가난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난해져야 합니다! 평범한 삶을 살되, 하느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으로 살아갑시다. 십자가 모양처럼 한 손은 하느님에게, 다른 한 손은 이웃에게 내미세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혁명이 될 것이며, 사랑의 혁명이 될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말했듯이 특정종교가 없다. 그러나 종교적 공간은 어디든 다 좋아한다. 요즘말로 종교는 없지만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 다만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절에 가면 언제나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다. 정서적인 불자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중학교,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에 다니며 매주 채플에 참여하고 성경 수업을 들었기에 기독교문화가 낯설지 않다. 그런데 캐서린 도허티처럼 가난과 사랑을 하느님의 삶과 연결하는 이야기는 마돈나하우스에서 처음 접했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려는 이들의 마음이 실제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고, 어떤 성과와 결과로 이어지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 마음을 공동체의 핵심 키워드로 살아가려는 태도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감동이 밀려왔다.
내 안에서 간절한 기도가
캐서린의 기일은 평소보다 더 깊고 고요하게 묵상하며 지내는 자유로운 하루였다. 브런치를 마친 후 사람들은 각자 조용히 채플에서 묵상을 했다.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숙소에서 쉬는 사람도 있었다. 이 분위기를 뭐라고 해야 할까? 고독, 침묵, 웃음, 사랑이 함께하는 따뜻함과 편안함. 그렇게 영성 가득한 공기 탓인지, 나도 숲 속 작은 채플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간절한 기도가 내 안에서 올라왔다.
“마돈나하우스에서 말이 잘 안 통해도 사랑으로 소통하며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경험. 감사합니다. 이 시간이 내 인생에 소중하고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하지만 간절한 기도였다.
“부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을 갖도록 도와주세요. 내 건강, 내 성격, 내 특성, 내 한계를 자각하고 존중하되 그것을 고집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나’에 갇히지 않고 ‘참 나’를 확장하기를 기도합니다. 가족, 친구, 일터는 물론 나의 발이 닿는 곳에 사랑과 자비심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작은 나’에 갇혀 그것을 ‘진정한 나’로 착각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무한한 나, 없는 나, 비어 있는 나로 다시 태어나게 도와주세요.”
기도를 마치고 산책을 했다. 넓고 넓은 설원.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 호수 같은 강이 펼쳐졌다. 강가로 가고 싶지만 30센티 넘게 내린 눈 때문에 발이 푹푹 빠졌다. 걸어갈 수가 없었다. 추워서 눈물 콧물이 났다. ‘세인트 메리’ 안으로 들어오는데, 홍콩계 청년 앤드류가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창가로 설원이 내다보이는 호젓한 방. 벽난로 옆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앤드류는 완벽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평화로웠다. 내가 들어가면서 그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을 만큼.
미사가 끝나고, 저녁식사를 하러 메인하우스로 돌아가는 길. 신발 갈아 신는데 키에렌 신부님이 말을 건넸다. “차타고 갈래요?” 걸어서 5분 거리지만, 춥고 지친 나에게는 반가운 배려였다. 차에 타니 운전석에는 중고품 가게 ‘세인트 조셉’에서 일하는 죠안이 있었다. 죠안은 체코에서 온 20대 후반의 여자. 두 사람 모두 고마웠다.
유머와 웃음 가득한 추도식
저녁 식사 후 다시 세인트 메리의 강당에 모두 모였다. 캐서린 도허티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 자신의 오래전 기억을 꺼내놓았다.
“캐서린이 마돈나하우스에 작은 공방들의 작업장 ‘세인트 라파엘’(Saint Raphael)을 만들자고 했을 때 나는 반대했어요. 그런데 내게 캐서린이 말하더군요. 당신은 예술가의 영혼을 가졌어요.”(웃음)
총 디렉터 수잔. 수학교사를 그만두고 마돈나하우스에 왔다는 그의 추억담에 이어 데이비드 신부가 말했다.
“내가 언젠가 피자를 먹는데, 하나 둘 셋 넷 권하는 대로 다 먹었죠. 그때 캐서린이 내게 말하더군요. ‘그 피자 먹으면서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어요?’(폭소)”
또 다른 60, 70대 스탭들이 연단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말이 빨라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인상 깊었던 것이 있었다. 캐서린 도허티가 사망한 지 22년. 추도식 때마다 거의 비슷한 기억을 꺼내놓고 있을 텐데. 어쩌면 남녀노소 저토록 깔깔 웃으며 즐거울 수 있을까? 따뜻한 유머와 웃음 가득한 추도회. 우리나라의 엄숙하고 무거운 추도회와 너무도 달랐다.
캐서린 도허티의 기일은 마돈나하우스에서 보낸 8주의 시간 동안 가장 의미 있고 인상 깊었던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깊은 기도가 터져 나왔고, 마돈나하우스의 설립자 캐서린 도허티를 더 깊이 만났으니.
귀국하기 전까지 내게 남은 시간은 열흘 남짓. 이젠 이곳을 더 깊이 만나고 더 즐겨보자.’ 내 안에서 새로운 소망 하나가 움트기 시작했다.
주은경
1980년대 인천에서 노동자교육활동을 했다.
1994년부터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KBS <추적60분> <인물현대사> <역사스페셜> 등을 집필했다.
1999년 성공회대학교 사회교육원 기획실장으로
노동대학 첫 5년의 기반을 닦았다.
2008년부터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민주주의학교, 인문학교, 시민예술학교를 기획 운영하다
2020년 말 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현재 시민교육연구소 ‘또랑’ 소장.
지은 책으로 <어른에게도 놀이터가 필요하다>,
함께 쓴 책으로 <독일 정치교육 현장에 가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