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 그리워하는 자는 끝내 기다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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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 그리워하는 자는 끝내 기다리는 사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7.0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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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주말마다 서울역에서 숭례문에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 요즘, 어처구니없는 정권이 민주주의를 희롱하는 시절에 한가롭게 ‘그리움’을 떠올리는 심사는 어떤 것일까요. 굳이 노무현이나 노회찬이 아니어도 마음에 연정 하나 품고 살지 않는 인생이란 얼마나 덧없는 일일까 싶습니다. 얼마 전에 신경림 시인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키 작은 한 시인의 죽음에 천여 명의 조문객들이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이가 참 잘 살았구나, 싶습니다. 시보다 착하게 살았구나, 싶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영혼이었구나, 싶습니다. 거룩함이 그렇게 깃들어 한 인생을 곱들이고 있구나, 싶습니다.

청마 유치환

이참에 신경림 시인이 애정했던 시인들을 소개한 <시인을 찾아서>(신경림, 우리교육, 2004)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정지용, 조지훈, 신석정, 김종삼, 신동엽, … 한용운, 백석, 박목월, 김수영, 천상병, … 도종환, 강은교, 이선관, 이해인, 정호승, 김용택, 안도현까지. 그 이름들 가운데 청마 유치환도 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입니다. 산맥과 같은 시어와 가랑비 같은 언어가 마주 걸었던 시인으로 기억합니다.

“오늘 인민의 모가지를 천정에 달아매고/나라의 앞길은 안팎으로 어둡기만 하니//먼 후일 오직 역사만이/너희의 곡직을 단죄할 것이라 치더라도/쓸개 있거든 듣거라/이 오탁과 도탄의 시궁창에서/끝끝내 인민만 우롱할 것이냐”(‘개헌안 시비’ 부분) 하고 자유당 정권을 비판한 참여시인입니다. 한편에선 “오늘은 바람이 불고/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뇨”(‘그리움’ 전문) 하던 서정시인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진정 나는 행복하였네라” 하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이라니, 그의 가슴팍에 바람이 불어도 아름다운 영혼이구나, 생각합니다. ‘행복’이라는 이 시가 쓰인 배경은 우체국입니다.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이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는 곳, 지금이야 아무도 이런 이유로 우체국을 찾지 않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은 우체국으로 걸어가는 동안에 이미 편지보다 먼저 연인에게로 가고 닿고 있었겠지요.

유치환은 바닷가 작은 우체국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곳에서 그리움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사랑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이를 향한 내 사랑을 타전하는 것이지, 그이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우편국’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드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랏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이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상이 누구여도 좋습니다. 신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비아, 2013)에서 “믿는다는 말은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뜻뿐 아니라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나를 믿나요?” 하는 말은 “나를 사랑하나요?”라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살았던 신비가들은 그리스도를 ‘연인’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사랑 그 자체이신’ 그분을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랑은 하느님을 사모하는 마음에 대한 은유인 셈입니다. 믿음이란 교리적 진술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그분께 연정(戀情)을 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이후로 그이가 경험하는 우주는 그분을 중심으로 돌게 됩니다. 그분과 상관 있는 모든 것에 의미가 생기고, 그분 때문에 내가 변합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제가 애송하는 청마 유치환의 시는 ‘선한 나무’입니다. 유치환은 선한 나무 한 그루에서 ‘하느님의 음성’(신운, 神韻)을 들었노라고 고백합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합니다.

내 언제고 지나치는 길가에 한 그루 남아 선 노송(老松)있어 바람 있음을 조금도 깨달을 수 없는 날씨에도 아무렇게나 뻗어 높이 치어든 그 검은 가지는 추추히 탄식하듯 울고 있어, 내 항상 그 아래 한 때를 머물러 아득히 생각을 그 소리 따라 천애(天涯)에 노닐기를 즐겨하였거니, 하룻날 다시 와서 그 나무 이미 무참히도 베어 넘겨졌음을 보았나니,

진실로 현실은 이 한 그루 나무 그늘을 길가에 세워 바람에 울리느니보다 빠개어 육신의 더움을 취함에 미치지 못하겠거늘, 내 애석하여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虛空)에 올려 보았으나, 그러나 어찌 나의 손바닥에 그 유현(幽玄)한 솔바람소리 생길 리 있으랴.

그러나 나의 머리 위, 저 묘막(渺漠)한 천공(天空)에 시방도 오고 가는 신운(神韻)이 없음이 아닐지니, 오직 그를 증거할 선(善)한 나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시인은 선한 나무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에 올려” 봅니다. 하지만 그 소리 들을 수 없어 안타까와합니다. 비록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드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랏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더라도, 시인은 거듭 새삼 그 길가에 서 있기를 즐겨하였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제 사랑을 몹시 그리워하는 자는 끝내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공평과 정의가 참담해지고, 사랑과 자비가 가라앉은 세상일수록 시인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 속에 깃든 시인이 나를 새삼 불러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꺾인 무릎을 세워 다시 세상으로 나가게 할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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