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의 전성시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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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의 전성시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 김선주
  • 승인 2024.06.1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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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여보, 어머님 댁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
보일러 회사의 이 광고 카피는 한때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유행어는 시대의 문제를 담지하기도 하고 당대인들의 사유를 표상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이 말이 유행할 때는 독거노인으로 시골에 홀로 사는 부모님을 배려하는 자식의 마음이 당대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혈통을 통해 세대를 이어가는 가족 서사가 남아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때만 해도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운명적인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끈적거리는 가족 서사는 증발됐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라는 말은 진부하고 촌스러워졌습니다. 가족의 자리에 반려동물이 들어왔습니다. 가족이라 불리는 사람 사이의 불편함보다 반려동물에게서 얻는 정서적 편안함이 더 좋아진 것입니다. 이해관계로 인한 충돌이나 세계관과 견해의 차이 때문에 겪는 마찰이 반려동물에게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2023년 KB경영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 반려동물보고서>에 따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반려가구)는 552만입니다. 4가구 중 한 가구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개와 함께 살고 있는 가구 수는 394만으로 71.4%에 해당합니다. 가히 개들의 전성시대입니다.

개들이 이렇게 사랑받게 된 이유는 인간과 정서적 친밀성과 유대감이 다른 동물에 비해 높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는 개에 비해 개성이 강하고 때로는 야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는 고양이보다 충성도가 높으며 순종적입니다. 주인과 정서적으로 잘 동화되는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과 문명의 피로감이 누적된 심신을 위로받기 위해서는 고양이 발톱처럼 날선 개성보다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 순종형 동물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개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고 싶을 때 가족과 공동체를 떠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위로받고 싶을 때 개와 함께 삽니다. 사회적 관계망을 벗어난 은밀한 곳(가정)에서 개를 양육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식을 양육하는 것보다, 어머니 아버지를 돌보는 것보다, 형제와 우애를 나누는 것보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는 것보다 개와 함께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삶이 가족 공동체를 통한 연대감과 책임감에 비해 훨씬 수월하고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개는 사람이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를 먹는 하등동물이 아닙니다. 마루 밑이나 마당 구석에 한뎃잠을 자고 멍멍이, 워리, 도꾸, 메리 같이 의미없는 이름으로 마구 불리는 하찮은 가축이 아닙니다. 사람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부모형제에게 쏟던 에너지와 경제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족입니다. 개는 개가 아니라 이제 고상한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가족입니다.

갈수록 개와 사람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대통령 부인은 입법 권한이 없음에도 ‘개고기식용금지법’을 제정하여 그 법령에 자기 이름을 붙이도록 나설 정도입니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이름의 ‘애견인’이란 신조어도 나왔습니다. 개를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할 인격적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애견인들은 사회적으로 개화되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교양인처럼 말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개에 빗대어 말하면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낍니다. ‘개새끼’, ‘개 같은 놈’, ‘개가 되다’ 등과 같은 말이 욕설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와 가장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동물인데 사람의 좋지 않은 행실이나 악덕을 빗댈 때 개에 비유합니다. 그것은 개가 아무리 사람과 친근하고 가까워도 사람에게는 개가 행할 수 없는 고도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가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개가 아무리 사랑스럽고 개를 아무리 존중해도 사람이 품고 있는 고도의 인격성과 사회적 윤리를 공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견인들조차도 자신을 개에 빗대어 말하면 모욕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기자들에게 ‘검찰의 애완견(lapdog)’이란 말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기자협회는 성명을 내고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애완견처럼 행동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못 느끼는 자들이 애완견이라는 말에는 수치심을 느낀 것입니다. 이것은 욕설의 기표(記票. signifier)를 자신들이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발생된 의미(記意. signifiant)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속뜻보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에 천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가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인격적 소통의 결과가 아닙니다. 먹을 것이라는 단순한 이미지를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사료로 먹는 개는 주인이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먹을거리를 준다는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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