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는 내가 제일 잘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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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노는 내가 제일 잘 만들어!
  • 김광남
  • 승인 2024.06.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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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남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전업 번역자 생활 초기에 어느 신생 출판사로부터 번역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출판사 대표와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물었다. "지금 대표님이 하시려고 하는 출판의 방향이 기존 출판사들의 그것과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해서 승산이 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대표가 당황하며 말했다. "이래봬도 내가 다른 출판사에서 경험이 꽤 있습니다. 신생이기는 하지만 오래된 출판사들 못지 않게 좋은 책을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저 한번 믿어 주세요."

완벽한 동문서답이었다. 그때 나는 출판의 '방향'에 대해 물었던 것인데, 대표는 자신의 오랜 경험과 숙련된 '노하우'에 대해 말했다. 그 출판사는, 대표가 공언했던 것처럼, 실제로 책을 꽤 잘 만들었다. 기존의 어느 출판사 못지 않게 잘 만들었다. 그럼에도 얼마 후 곧 문을 닫았다. 그 출판사가 내는 것과 같은 종류의 책들은 시장에 이미 차고도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교회 전체가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에 '아메리카노'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하거나 요구하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도 너 나 할 것 없이 주구장창 아메리카노를 제공하면서 "아메리카노는 내가 제일 잘 만들어!" 하고 있는... 교회 스스로 시장을 레드오션으로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살아남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다. 이왕 망할 거면 무언가 새로운 시도라도 한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뭐, 아는 게 아메리카노 제조법 하나뿐이라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김광남
종교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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