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와 노동자를 위한 농경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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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와 노동자를 위한 농경대학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6.09.05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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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공동 농장-1

피터 모린은 1930년대 중반에 이미 그의 생각들 중 두 가지가 실현된 것을 보았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지속적인 관심사였다. 신문은 매달 발행됐으며 발행부수는 매호마다 늘어났고 곧 10만부를 넘어서게 되었다. 뉴욕에 있는 환대의 집에 대하여 쓴 글에 고무되어 다른 환대의 집들이 미국 전역에 생겨났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피터의 또 다른 생각 즉 공동농장과 농업대학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피터는 공동농장과 농경대학 속에서 모든 아픈 이들 즉 실업, 범죄, 빈곤한 노인계층, 뿌리 뽑힌 사람, 가족들의 성장에 필요한 방의 부족, 굶주림의 해결책을 보았던 것이다.

피터의 이 생각은 1935년 겨울 가톨릭 일꾼에 관계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나는 여성들이 그 생각에 설득 되리라곤 믿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생각에 그다지 열광적이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 당시 내 딸은 8살쯤이었으며, 나는 나의 집을 더 좋아했다. 나는 도시 생활을 좋아하였다. 특히 나는 이스트 사이드 아래지역 생활을 좋아했는데, 그곳엔 나의 이웃들이 살고 있었으며 모든 이태리식 뒤뜰엔 무화과 나무와 포도나무가 있었다.

피터가 도시의 자갈로 된 길 위에 자라고 있는 풀에 대하여 말했을 때, 그것은 도시의 빈터에서 햇빛을 향하여 뻗고 있는 굳센 식물들을 보았을 때 항상 느꼈던 희열을 내 마음에 전해 주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브룩클린에 있는 배쓰 해변에서(우리는 아버지가 이동이 많은 신문기자로 일하셨기에 여러 도시에서 살았다) 이탈리아인 주부들을 흉내내곤 했고 봄에는 첫 번째 민들레들을 모으기 위해 밖에 나가곤 했다.

나는 도시의 야생동물을 늘 갈망하는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미사에 가기 위해 그랜드가를 걸어내려갈 때면 거대한 아파트단지 옆에 남아있는 빈터에서 너무나 풍요롭게 자라고 있는 “어린양의 영역”이라고 부르는 잡초를 찾고 있으며, 경제 공항기간 동안에 그 잡초를 섞어서 만든 음식들을 기억하곤 한다.

도시의 대한 나의 애정은 결코 사그라진적이 없다. 나는 피터에게 “천국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그려지고 있어요”라고 그리워하며 말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5년 그해 봄에 우리는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우리의 첫 “공동 농장”을 마련하였다. 맨하탄 중심가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항구인 스테이튼 아일랜드는 비록 뉴욕시 경계 안에 행정적으로 속해 있어도 열린 공간과 농토가 풍부하다.

우리의 공동농장은 피터가 그렸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사실, 그 장소는 너무 작아서 “공동 정원”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그곳을 앞으로 생길 더 넓은 농장에 대비하는 의미가 깊은 훈련하는 자리로 여겼다. 나는 우리가 너무나 욕심을 많이 갖고 일을 추진하며 적합한 연구와 계획 없이 일로 뛰어드는 경향이 강하다고 피터가 느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젊었으며, 피터가 늙었다고(그는 그 당시에 60세였다) 느꼈다.

그는 최근에 우리가 땅에 대해 실패했을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참을성 있게 우리의 이런 충동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우리가 크든 작든 하려했던 모든 것이 그가 만들기 원했던 몇 가지 “핵심”들을 보여주었다고 느꼈다.

그 정원농장은 약 1에이커의 땅이었다. 집은 침실이 여덟 개나 되는 큰 집이었다. 부엌이 딸린 1층엔 방 3개가 L자형으로 지어졌다. 그것들은 모임방으로 사용되었다. 넓은 현관이 집 주위를 모두 에워싸고 있었는데, 집은 라리탄만이 내려다보는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집 뒤에는 일 마일이나 길게 뻗은 땅이 있었는데 지금은 늑대샘 공원이 되었으며, 그 옆엔 아름드리 나무숲들이 있다.

실제로 그 1에이커의 땅이 우리가 경작하고 준비한 전부였다. 우리는 우리가 먹을 것과 뉴욕에 있는 환대의 집에 필요한 만큼의 채소들을 그 땅에서 재배할 수 있었다. 곧바로 뉴욕의 환대의 집에서 노동할 수 있는 몇몇 사람이 공동농장으로 이주하였다. 그들에겐 온갖 종류의 배경이 있었고 각자가 나름대로의 이유를 지니고 왔다.

노동자들과 학자들이 모두 함께 너무도 비비적거리며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있었던 오래된 갈등이 즉시 나타났다. 노동자들은 오직 자신들의 손으로 노동해서 가시적인 결과물을 생산하기를 원하였다. 학자들도 이러한 것들을 원했지만 그들은 또한 그들만의 소명감을 갖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학자들이 주로 원했던 것이 주말에 멈추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은 주말에 비육체적인 종류의 매우 힘이 드는 노력들 즉 토론그룹을 조직하고 강사들을 초빙하며 흥미있는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학자들의 행동을 결코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주말 모임의 즐거움을 감사로 표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내놓는 기부금으로 농장일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학자들에게 점수를 별로 주지 않았고 동시에 그들도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우리의 철학은 노동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이러한 노력은 다만 노동자들로 하여금 지휘권을 잡고 자존심을 내세우도록 함으로써 겸허함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학자는 권한을 행사하는데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노동자는 공동선에 대한 생각 대신에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가는데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자들 역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너무도 자주 다른 이들에게 판단받지 않으려고 침묵 속으로 움추러들곤 하였다. 노동자들이 학자를 따르는 것을 방해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통교가 되지 않는 학자들의 무능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조용하고 차갑거나 혹은 유창하게 표현하는 사람보다는 다정한 친구를 원했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피터는 학생들을 정원으로 내보내길 좋아했으며, 콩밭사이 고랑에서 손에 호미를 들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폰 케틀러 주교는 우리가 우리의 잉여 재화로 가난한 형제의 절실한 요구를 구제해 주어야 하는 대죄의 고통아래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의 잉여재산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은 하얀 코끼리들을 세운다. 우리는 우리의 잉여재산으로 권력을 증가시키는 권력의 집들을 건설하기 때문에 실업을 증가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잉여 재산으로 학생들에게 어떻게 변화로부터 세상을 지키는지 혹은 어떻게 대학졸업자들에게 어울리는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말하지 않고 변화하는 세상 속으로 학생들을 내모는 대학들을 건설한다.”

피터의 이러한 강의들은 애덕, 개인적 책임 그리고 정부의 책임, 기계화시대, 그리고 실업, 수공업들과 마을 산업 그리고 탈 중심화, 세계의 대학 졸업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등등 하루동안 충분히 토론 할 꺼리를 주었다.

피터의 청중은 학자들처럼 줄어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익숙치 않은 일 때문에 근육이 피로했고 콩밭으로부터 떠나 어슬렁거렸다. 그래서 그는 손에 책을 들고 우리를 독서 속으로 진지하게 빠져들게 함으로써 그의 생각들을 강화시켰다. 그가 추천한 독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는 돈 루이지 스투르조와 그의 공동협력질서의 사상이 법인정부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소개해 주었으며, 뿐만아니라 크로포트킨을 알게 해 주었다.

그러한 독서는 우리를 이스라엘의 키부츠와 협력적이고, 집단적이며, 공동적인 다양한 형태들 그리고 전 세계의 관대한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정부농장들에 대한 연구로 이끌었다. 에리히 프롬과 <유토피아에 이르는 작은 길>을 지은 마틴부버, 인도의 비노바 바베 그리고 다닐로 돌치와 같은 이들은 피터가 찾고있었던 새로운 종합에 지금 다가서고 있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은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피터는 말하곤 하였다. 자발적 가난이 기본인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것, 가난하게 시작하는 것, 심지어 빈약한 수단으로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녹색 혁명”을 출발시키게 하는 것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하게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마치 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는 것처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들 중 대부분은 가난부인이 추녀이며 성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여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잉여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길 거절하는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훔쳐서 바오로에게 주는 소매치기처럼 돌아다니면서 정치가들이 가난한 이들을 부양하게 하는 것이다.”

농장의 젊은 지성인들과 대학생들은 왜 우리가 도시에서 걱정꺼리들이 되어버린 “쓸모 없는 빈곤한 이들”(그들은 빵 배급을 받는 사람들을 이렇게 생각하였다)에게 돈을 “써버리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가 나라 전체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방법을 가르켜 주는 선도적인 사업과 같은 공동농장에 돈을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의 공동 정원에 매력을 느끼고 사람들이 의심할 바 없는 토대를 만들고 모범을 보이며 혹은 길을 이끌어갈 수 있는 이 세계의 마지막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습관은 극복했지만 빈곤상태로 추락한 한 때 마약중독자였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몇 나라 말을 알고 있었으므로 피터는 그에게 불어와 스페인어 교실을 열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지 않았으며 에스페란토와 같은 새롭고도 보편적인 말을 발명하는데 그의 온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의 큰 기쁨은 해변을 걷는 것이었으며,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축축한 부목과 낡은 신발을 주어서 연료를 절약했으며 그것들을 겨울내내 난로 속에 던졌다. 이런 그의 행위는 자주 불을 꺼트리게 하였으며 그래서 집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한번은 마치 무거운 종이라 여겨서 석면으로 난로를 가득 채웠다.

침대에 누워서 간호 받아야만 했던 심장병으로 죽어 가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사랑의 상처에서 회복되기 위하여 우리에게 왔던 한 교사가 있었는데 여전히 그녀는 그 상처에 매달렸다. 해변을 따라가며 그 기슭에서 찰흙을 모으곤 했던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접시들과 사발들을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들이 수공예를 연습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것은 그들이 늘상 찰흙과 도구들을 씻고 부엌 싱크대에서 손을 씻으면서 종종 하수구를 막히게 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해가 안 되고 평온한 일로 보였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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