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언 수행, 침묵의 시간을 잠식하는 핸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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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 수행, 침묵의 시간을 잠식하는 핸드폰
  • 최태선
  • 승인 2024.05.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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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Jozef Israëls - Jong meisje aan het raam
Jozef Israëls - Jong meisje aan het raam

나는 매일 아침 글을 하나씩 쓴다. 그것이 이제는 내 일과가 되었다. 그렇게 쓴 글들 가운데 어떤 글들은 칼럼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 매체에 실린다. 내게는 과분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의도한 적이 없다. 내 글이 실리는 곳은 모두 자발적으로 내게 게재를 허락받고 임의로 내 글들을 가져다 올린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는 시간은 수행의 시간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시간에 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하는 대신 생각을 글로 적는 것이다. 이 시간이 내게 소중한 것은 이 시간을 통해 내가 침묵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물론 유념적 관상과 무념적 관상처럼 생각 자체를 멈추는 경지에 다다르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유념적 관상이 무념적 관상보다 낮은 수준의 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념적 관상이 소중한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내게 이루어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전철을 타보면 늙은이건 젊은이건 모두 핸드폰을 보고 있다. 자는 사람을 제외하고 핸드폰을 보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더더욱 없다. 그렇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핸드폰을 보는 일로 침묵의 시간을 잠식했다.

서양의 어느 마을에서는 한 달에 한 번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날이 있다고 한다. 그날이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하루 동안 텔레비전을 켜지 않는다고 한다.

텔레비전을 켜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은 심심해 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책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온종일 책만 볼 수는 없다. 그래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심드렁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사람들은 집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처럼 텔레비전을 켜지 않자 주변을 정리하고, 책을 읽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웃들과 한자리에 앉아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그런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침묵은 단순히 이웃과의 관계만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다. 신앙인에게 침묵은 자기 자신은 물론 신과의 관계 역시 열어준다. 나는 신앙에 있어 침묵은 이웃과의 관계보다 더욱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침묵하지 않는 사람은 신과 조우할 수 없다. 침묵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조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중독에 빠져 있는가. 사실 핸드폰을 보고,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한 것이 일중독의 가장 명확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은 자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깨우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 가운데 생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존경하는 인물이 없다. 존경하는 인물이 없다는 것은 인생의 본이 없다는 의미이고 인생의 본이 없는 인간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은 인류의 역사와 지혜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젊은이들은 그런 것들을 공유하지 않는다.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모두가 독불장군들이 된 것이고, 이런 사태야말로 오늘날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과 마귀의 하는 일을 떠올릴 수 있다. 성령의 일은 하나 되게 하는 것이고 마귀의 일은 결별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각각 존재하는 오늘날의 세태는 이 시대가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인가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러니 한 달에 한 번, 혹은 휴일을 이용해 묵언수행을 해보라. 수행에는 금식, 잠 안 자기,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가운데 말하지 않는 묵언수행이 가장 쉬워 보이지만 막상 해보면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길어진다. 배도 고프지 않다. 말하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어마어마하게 에너지를 사용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만나고 나면 피곤해진다. 그것은 오가는 길이 멀어서가 아니라 말하는 것 자체에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특히 설교를 한 날에는 아무리 사소한 설교였다고 해도 나는 가장 피곤함을 느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은 말을 한다는 행위 자체가 영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퀘이커의 예배에 주목해왔다. 오늘날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이와 완전히 반대다. 침묵하는 시간을 줄이고 무언가에 집중하도록 끊임없이 교인들을 몰아간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침묵과는 반대로 일중독을 조장하는 곳이 되었다. 그런 사람들의 영적인 수준이 유아의 상태이고, 욕망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영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퀘이커의 예배는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침묵하는 것이다. 그들은 침묵의 시간을 이용하여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물론 전광훈처럼 듣는 것은 아니다. 전광훈은 자기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퀘이커의 경우는 침묵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아니 그냥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매우 어렵다. 그래서 묵언 수행을 하는 동안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써보는 것도 좋은 수행의 방법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선을 수행하는 이들은 이것이 선의 도입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안소니 드 멜로 같은 이는 이것을 원숭이들이 바나나를 보고 뛰어다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실감이 나는 표현이다. 그렇게 중구난방,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써보면 그것이 곧 가르침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그런 시간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는 시간, 혹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인식하는 순간이 된다.

목회를 하지 않는 가난한 목사가 된 나는 말을 하려고 해도 말할 상대가 없다. 아내가 있지만 아내의 경우는 가급적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배웠다. 결국 티브이를 켜거나 넷플릭스와 같은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시간은 침묵이 아니라 생각의 전원을 뽑은 시간이 되고, 나는 그 시간이야말로 내 삶을 기생충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매일 한 시간씩 텃밭을 돌보며 침묵수행을 한다. 자전거를 타는 시간도 침묵의 시간이다. 그럴 때 나는 내 인생 전체를 관조하고, 과거의 잘못들을 본다. 그래서 침묵의 시간은 내 삶을 정리하는 시간이며 자복하고 통회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그 시간이 내겐 그 어떤 영광의 순간보다 소중한 시간이 된다.

나는 그것이 내 마음의 소리라는 사실을 안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며 내 삶을 맑게 하는 옹달샘의 물을 마시는 시간이다. 그렇게 나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맑은 삶을 만들어나간다. 그렇게 나는 침묵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온전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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