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처럼,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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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처럼, 기적처럼
  • 최태선 칼럼
  • 승인 2024.04.29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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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나는 여간해서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 물론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가급적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나고 보니 결국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카인의 후예로서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내 이런 말을 아전인수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만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하셨다. 물론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나는 늘 주의한다.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가장 잘 한다고 생각한 것, 내가 가장 확실하게 하느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그 반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계속해나갈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할 수 있다. 내가 할 일은 언제나 분명하다. 나는 나 자신을 비우고 내 인생여정에 필요한 것들을 가급적 줄이는 일에 몰두하면 된다. 내게 무엇이라도 남아 있다면 결국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세상에 거할 처소를 마련하는 것일뿐이다.

요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민들레 홀씨처럼 속절없이 날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주님은 나를 온전히 인도하실 수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남겨둔다면 주님은 나를 날려 보내실 수 없다. 성령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임하고 움직이신다. 결국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가벼워지는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성령은 참 힘이 없으신 분이다.

언제부터인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내 옆자리가 비어도 젊은 여성들이 앉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슬픔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노년은 그래서 슬픈 인생의 시기다. 많은 돈을 지니고 있으면 그 슬픔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불의한 일이다. 결국 내 욕망은 불의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년을 기쁘게 받아 잘 살 수 있는 길은 비움이다. 나는 내 자녀들에게 나를 위해 더 이상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부탁을 자주 한다. 누릴 것을 다 누렸으며, 이미 모든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내가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거기에 더해 무언가 그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가 내겐 가장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다.

다행히 나는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다. 물론 맛집 음식처럼 누구라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맛과 호불호를 아는 나는 큰돈을 드리지 않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장만할 수 있다. 식구들도 식구들이라서 평가에 박절하지 않다. 그냥 립서비스겠지만 장사를 해야 한다거나 팔아야 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음식의 맛이나 종류에 상관없이 함께 자리를 같이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지덕지다. 그렇게 모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그렇게 나는 다른 방식으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섬김이며 사랑이다. 성서가 말하는 섬김과 사랑은 내가 없어야 가능하다. 나를 부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모든 섬김과 사랑은 결국 욕망의 포로가 하는 일이 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길어도 70이 넘으면 은퇴를 한다. 70이 되면 비로소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되는데 교회는 노인들을 뒷전으로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가 욕망의 용광로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할수록 내게 주어진 가난은 가장 큰 은총이다. 가난은 모든 것을 감내하게 만든다. 너무도 억울해서 한동안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참고 또 참으면서 나도 모르게 참는 것에 익숙해지고, 참는 법을 배운다. 인내가 형성되는 것이다. 만일 내가 가난해지지 않고 교회 또한 휴면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의 내가 가지게 된 인내조차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인내야말로 내가 복음대로 살 수 있는 초석이다. 이젠 어떤 일을 당하거나 겪게 되어도 좌절하지 않는다. 또 그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내게 일어나도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다지 못 견딜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포도’가 아니다. 신맛을 오히려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신맛을 감사할 수 있게 되어야 쓴맛도 즐길 수 있고, 단맛이나 고소한 맛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생 자체를 비로소 받아드리고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운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젊음이 줄 수 있는 힘과 쾌락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그것들을 향유했고,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바란다는 것은 도를 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어느 정도 자족의 비밀을 배운 것 같다. 그렇다면 자족의 비밀은 늙어서야 배울 수 있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티브이에서 김민기님의 이야기를 보았다. 새삼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도 그처럼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처럼 살지 못했다. 나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히려 그런 삶을 의미 없는 것이거나 피해야 하는 삶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었다.

그곳에서 김민기님이 반주도 없이 장송곡으로 부른 “상록수”를 들으며 그의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가 그처럼 애지중지하던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우리 시대에는 공순이 공돌이로 부르며 멸시하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누구보다 앞장 서 그런 사람들을 무시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오랜 가난을 통해 비로소 그런 사람들이 내가 섬겨야 할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며 내가 더 오래 살아야 할 이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이 기적일 수 있겠는가.

바울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받지 않고 일한 이유를 나도 알 것 같다. 나는 여생 동안 바울처럼 살아야 한다. 내 비참한 과거를 위해서라도 잘 살아야 하고,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해 김민기님처럼 살아야 한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은 것 역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성공한 목사였다면 깨닫지 못했을 일이다. 그런 경우를 상상해보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능멸하는 일이다.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 마음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그는 신약성서 대부분을 기록한 성서기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죽었지만 그는 오늘도 살아서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영원히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이제 내게도 그렇게 부어드리는 제물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새삼 그의 존재가 길임을 절감한다. 그것을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내 엉망이었던 과거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오히려 가치 있는 삶이 된다. 이제야 비로소 나도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는 바울 사도의 말을 내 삶으로 고백하게 된다. 눈물이 난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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