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투신하는 ‘두려움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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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투신하는 ‘두려움 없는 사랑’
  • 한상봉
  • 승인 2016.08.2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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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세속화 시대, 성직자 권위주의에 대한 유감-4

[행동하는 사랑-한상봉]

참된 신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역대 교황들은 바티칸에 머물며 황제다운 위용을 과시해 왔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프란치스코 교종은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세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봉사직’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성찰했다. 교회가 아직도 봉건제적 유습을 버리지 못했어도 자각한 사람들이 먼저 프란치스코처럼 옷을 벗고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주위의 시선을 잠시 접어두고 복음적 확신 안에서 거닐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사진=한상봉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하기로 작심한 ‘하느님 백성’ 되어야

복음은 현실 앞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중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일부 주교들은 “신자들이 모두 다 같은 생각이 아니라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 없다고 변명해 왔다. 물론 교구 신자들 가운데 정치적 견해와 사안에 대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처럼 과격한 발언으로 사제들의 사회참여적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침묵하고 있지만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사제란 ‘복음적 진정성’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며, 신자들의 동의를 반드시 구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의 생각이 아니라, 복음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하느님이지, 신자가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하기로 작심한 ‘하느님 백성’이다. 때로 설득의 대상이기도 한 다른 주교와 사제, 평신도에게 알아서 미리 ‘투항’하는 일부 사제와 주교들을 보면, 복음에 대한 충실성을 의심하게 한다. 교도권이란 신자들의 의견이 갈릴 때일수록 효력과 효용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제주교구의 강우일 주교는 그동안 여러 기회를 통해 ‘신앙의 재구성’을 요구해 왔다. 이 요구는 단지 신자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주교와 사제, 수도자들에게도 ‘신앙의 재구성’이 요청된다. 절박한 시대의 요구 앞에서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면 응당 스승 예수와 운명을 나누어 가져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광뿐 아니라 십자가도 나눠 가져야 한다. 주교와 사제들이 “만일 예수가 나였다면...” 하고 묻지 않는 것은 절실한 기도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수, 명상과 기도와 영신적인 수련에만 몰두하신 분 아니다

주교들과 사제, 수도자들이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전례를 행하고, 성체조배를 하고, 묵주기도에 열성을 드리지만, 정작 성경에 드러난 예수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비추어 보며 개별적이고 고유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분에게서 해답을 찾지 않는 신앙이라면, 아무리 수천만 단의 묵주기도를 봉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금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그분과 견주어 생각하지 않는 한, 그 기도가 나와 하느님, 나와 예수와의 관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강우일 주교는 「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라는 글에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 높은 곳에 좌정하고 계신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갖고 다가오시며 개입해 들어오시는 분”이라고 전했다. 강 주교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과는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고 초연하게 산야에 묻혀서 명상과 기도와 영신적인 수련에만 몰두하신 분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면서, 그 시대의 세상이 차별하고 억압하고 외면하였던 보잘것없는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 분이다.”

예수는 탐욕과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지고 억압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사제이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에 포함된 불의와 고통, 슬픔과 연민, 다툼과 평화를 다 함께 끌어안는 것”이다.

회심은 '혁명의 개인판'...신비가는 혁명가

헨리 나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분도출판사, 2001)라는 책에서 우리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신비와 혁명의 통합이라고 제시한 바 있다. 회심은 ‘혁명의 개인판’이며, “진정한 혁명가는 모두 그 마음속에 신비가가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 두 가지는 우리를 무력한 신앙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수도자들에게는 관상과 활동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많이 언급되어 왔지만, 신비와 혁명의 통합이라는 표현은 관상과 활동의 방향을 내포하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징표와 관계가 깊다. 신비는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침범할 수 없는 중심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예언]은 그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발언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신비가가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만사만인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이 특별히 고통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망설일 틈이 없이 투신하게 된다. 연인을 향한 ‘두려움 없는 사랑’이 그를 현장으로 내닫게 만든다. 무력한 신앙은 그렇게 이슬처럼 말라버리고 생동하는 신앙으로 거듭난다.

이 신앙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복음화의 길에서 취해야 하는 ‘마리아 방식’이라고 추천한 “온유한 사랑의 혁명이 지닌 힘을 믿는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여종”이라고 부를 만큼 겸손하면서 또한 용감하다. 마니피캇은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내치시는” 하느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바로 그분께서 정의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따스한 온기를 가져다주시는 분”임을 깨닫는다고 교종은 말한다. 마리아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 성령의 자취를 알아보는 법”을 알고 계시며,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깃든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본다.” 그리고 마리아는 나자렛에서 기도하시고 일하시는 여인이며, 또한 “다른 이들을 도우시고자 ‘서둘러’ 당신 마을을 떠나시는 도움의 성모”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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