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일제 식민지처럼, 한국교회는 로마의 식민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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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는 일제 식민지처럼, 한국교회는 로마의 식민지처럼
  • 김경집
  • 승인 2016.08.2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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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국보1호가 무엇인지 대한민국 국민이면 거의 다 안다. 보물1호가 무엇인지까지 아는 이들도 꽤 된다. 그러나 사적1호가 무엇인지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국보나 보물은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가 높은 반면 사적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사실 국보1호와 보물1호의 내막을 알면 그리 탐탁지 않다는 걸 경험하게 된다. 일제 때 그것을 정했다. 1934년 조선총독부는 보물1호로 ‘남대문’(숭례문이라는 이름조차 지우고)을, 보물2호로 ‘동대문’(흥인지문이 아니라)을 지정했다. 국보가 없는 건 식민지 땅이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문이 나란히 앞 번호를 받은 건 물론 그 자체로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기는 했겠지만 일본인들의 속셈은 달랐다. 임진왜란 때 숭례문으로는 가토의 군대가 흥인지문으로는 고니시의 군대가 입성했기 때문이다. 즉 그 두 개의 문은 일본군대의 승전을 목격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이다.

사진출처=http://mechanic.egloos.com/

왜 ‘포석정지(址)’가 아니라 ‘포석정’이냐

이쯤 되면 사적1호가 궁금하지 않은가? 바로 경주 ‘포석정’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문제가 있다. 하나는 왜 포석정이냐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지금 거기에는 아무런 정자가 없는데 왜 ‘포석정지(址)’가 아니라 ‘포석정’이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여전히 포석정 하면 경애왕이 적의 침략을 받은 상태에서도 거기에서 무희들과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사로잡혀 죽임을 당한 곳이라는 설명을 떠올린다. 과연 그럴까? 조선총독부는 포석정을 고적(사적이 아니다. ‘사적’은 역사적 유적이라는 뜻이지만 ‘고적’은 그저 오래 된 유적이라는 뜻이다)1호로 지정했다. 그리고 그 의도는 대단히 음험한 것이었다. 왕이라는 자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음주가무나 즐겼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일에는 정작 무관심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삼국유사>에서 그 대목만 달랑 도려내서 그 역사적 평가를 정당화하면서.

그러나 <삼국유사> ‘경애왕 편’ 전체를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견훤이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한 것이 9월이었고, 10월에 지금의 영천 지방을 점령했으며, 11월에 경주를 함락시켰다. 고려시대의 문헌이니 당연히 음력이었고 그것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경주 함락은 12월이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아무리 음주가무를 즐긴 왕이라 하더라도 엄동설한에 그것도 궁내가 아니라 궁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가서 방탕하게 놀았을까!

우리는 ‘포석정’ 하면 ‘정자’는 생각지도 않고 ‘유상곡수’만 떠올린다. 그게 아방궁처럼 거대한 오락장도 아니고 그저 아담한 물길에 격조 있게 술잔 돌린 것에 불과하다. 문노라는 화랑을 모신 포석사(鮑石祠)에 행차하여 제사를 지내고 대신들과 함께 원로들을 초청하여 환담하던 시설이다. 화려함이나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여전히 정자가 없는데도 ‘포석정지’가 아니라 ‘포석정’이라고 부르는 건 일본인들의 의도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니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정자는 놀고 쉬는 곳이다. 그렇게 유희적 의미로 희석시키기 위해 여전히 포석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편의적으로 뽑은 부분적 기술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은 모르는 채. 결국 일본이 말하고 싶은 건 우리는 왕까지 그 지경이니 자치 능력이 없다는 걸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적1호로 지정했다.

사진=김용길

한국교회는 로마교회의 식민지인가?

해방 후 보물1호는 국보1호로, 보물2호는 보물1호로, 고적1호는 사적1호로 이름만 살짝 바꿨을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식민지 조선의 영재들이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일본인들에게 배웠다. 당연히 역사는 식민사관을 토대로 한 공부였다. 착실하고 공부 잘 하는 학생이 조교를 거쳐 제국대학 교수가 되거나 총독부의 역사편수관 등의 자리를 얻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국립서울대학교 교수나 정부의 역사편찬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들은 해방 조국의 전문 지식인이 되어 새롭게 문화재 정비의 일을 맡았다. 나름대로 고민은 했겠지만 배운 방식대로 반응하였을 것이고 그렇게 국보, 보물, 사적 각1호는 일제가 정한 배열에게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로마에 충실하다. 오죽하면 “로마보다 더 로마적”이라는 말까지 들을까! 사실 ‘가톨릭’이란 말이 ‘보편적’이라는 뜻이니 보편교회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물론 교회의 제도와 구성이 로마교회를 정점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습속을 벗지 못하고 있다.

주세페 안젤로 론칼리 신부..후일 요한 23세 교종이 되었다.

똑똑한 신학생들은 거의 다 로마로 유학하고 대부분의 주교들도 그 출신들이다. 물론 겉으로는 독립된 교회며 자신은 로마에 종속되는 성향이 전혀 없다고 강변하겠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태도에는 그게 그대로 묻어난다. 오죽하면 우리가 과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묻는 지경일까.

교회의 제도와 체계를 비난하는 것도 로마에서 공부하는 것도 허물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과연 지금 한국 가톨릭교회가 보편교회로서 그리고 독립된 교회로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 겸허하게 성찰해야 할 때다. 부정적 의미로서의 도그마조차 문자 본디의 의미로 착각하는 일이 사제 신자 할 것 없이 일반적이지 않은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시대정신을 알아듣는 주교가 얼마나 되나

조금만 고까운 소리를 해도 눈을 흘기고 ‘니들이 게 맛을 알아?’ 하듯 신자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청맹과니쯤으로 여기는 행태가 교회에 엄존하고 있다는 점을 아프게 고백해야 한다. 교회가, 주교가, 사제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게 시대착오적인 도그마는 아닌지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사적1호가 포석정지도 아닌 포석정이며 임금이 방탕하게 음주가무를 즐기다 나라를 망친 곳으로 여기는 역사적 오류가 지속되는 일과 다르지 않게 된다.

시대정신과 미래의제를 짚어내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교회는 존재의미가 없다. 예언자의 통찰력과 용기가 없다면 제사장으로서의 올바른 품격과 존경이나마 제대로 받아야 한다. 과연 지금 그런 존경이나마 제대로 받는 주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프더라도 짚어봐야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한 요한23세가 안젤로 론칼리 신부였을 때, 첫 소임은 베르가모 교구의 라디니 테데스키 주교의 비서였다. 테데스키 주교는 억압받던 노동자들을 위해 자기 반지를 빼서 “도움이 되게 써달라”며 론칼리 신부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주었다. 이 때문에 당시 베르가모 교구의 테데스키 주교는 공산주의자로 몰렸고, 그 비서였던 론칼리 신부에게도 따가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것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나중에 주교로 서품되어 불가리아에 파견된 론칼리 주교는, 불가리아에서 지진으로 붕괴한 정교회의 재건을 위해 주교관의 미술품들을 담보로 돈을 빌려서 논란이 되었다.

지금 교회가 그것을 비난하는가? 그러나 당시에는 분명 그랬다. 혹시라도 지금의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이 베르가모의 테데스키 주교와 론칼리 신부 같은 이를 경원하고 어느 구석진 임지로 내몰고 있지는 않는지 엄중하게 자문해야 한다.

역사는 분명 승자의 기록물이다. 그러나 아무리 왜곡하고 덮어도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그게 역사의 힘이다. 그러려면 제대로 역사를 읽어내야 한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주교도 사제도 신자들도 그 점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는 ‘사적1호 포석정’을 안고 산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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