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기다리며 줄을 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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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기다리며 줄을 서는 사람들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6.08.22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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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환대의 집-3

원탁토론회의 열띤 토론 속에서 밤 시간 대부분을 보냈고 시간에 개의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오늘 아침 빵배급 담당을 하기 위해 새벽 5시에 기어나올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졸음을 잊는 가장 빠른 방법은 침대에서 나와서 세수를 하고 상점에 있는 라디오를 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였다.

환대의 집...빵을 자르고 커피를 끓이고

산더미 같은 빵을 자르는 것과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힘이 든다. 그 일을 끝내기까지는 여러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나는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깥에 줄서는 사람들의 눈은 여기는 추워요, 혹은 지금 먹을 준비가 다 됐어요? 라고 계속 말하고 있다. 모든 빵이 준비가 되었고 약 6시 15분에 스코티는 1차로 100갤론의 끓는 커피를 준비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문을 연다.

이처럼 추운 아침에 나는 모트가 바로 아래와 카날가 모퉁이에 나타나는 긴 줄을 따라 흐르는 희망의 물결을 상상 할 수 있게 된다. 컵들이 점점 없어지고, 우리의 친구들을 먹이는 세 시간 동안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나는 그 얼굴들을 바라 볼 수 있으며 나이와 피로와 근심이 서린 그 긴 줄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감사함을 볼 수 있다.

애드 베쑨의 그림들은 항상 사람들의 주의를 잠시동안 끌어당긴다. 아무리 그들이 커피통에 빨리 도달하려고 서두른다해도 벽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은 항상 있다. 많은 이들은 매일 아침마다 나타나는 낯익은 얼굴들이다. 나는 한 사람을 ‘추기경’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테두리가 너무나 닳아빠지고 형편없는 손으로 짠 보라색 모자가 마치 추기경의 모자와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친절하게 말한다. 언제나처럼 나의 일본인 친구는 일찍 온다. 그 또한 항상 인사를 한다.

오늘 막 덥수룩한 머리와 쪼글쪼글한 옷에 매우 피곤해 보이는 세 명의 젊은이들이 왔다. 씻을 곳도, 옷을 세탁할 수도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기에 이곳은 그들에게 새로운 곳이다. 젊음과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그들의 조건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지막의 몇 개 안되는 소유물들을 채운 쇼핑가방과 꾸러미들을 가지고 다니는 몇몇 사람들도 매일 아침 온다. 그들은 뜨거운 커피와 커다란 빵을 더 잘 잡기 위해서 탁자 밑에 짐들을 놓아둔다.

꾸러미를 들고 뒤뚱거리는 한 정규적인 방문자가 오늘 아침엔 새 외투를 입었다. 겨울내내 그는 많은 밤을 바깥에서 지내느라 진흙이 묻고 또 불을 쬐느라고 연기를 쐰 육중한 참호용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의 새 외투는 극단적으로 유행을 쫓는 멋부리는 젊은 청년들의 외투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새 외투를 입은 그는 더 나아 보였으며, 따뜻한 외투 때문에 더 자신 있게 보였다.

아침미사를 가고 오고... 그들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지금 나는 굶주리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반드시 통과하는 것을 의미하는 미사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특히 날씨가 춥거나 습기가 있는 어떤 아침들은 오래 걷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는 길에 빵을 먹으러 와서 우리를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기도 한다. 나는 그들의 긴 하루동안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 곁을 지나가며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빵배급 줄은 보행자들이 지나가도록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모퉁이에서 끊긴다. 카날가의 서쪽으로 늘어서는 줄은 약 200피트 정도이다. 그렇다면 미사중에 그들을 잊는다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미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친근한 모자들과 외투들, 신발들 그리고 정규적으로 오는 사람들의 잘 맞지 않는 옷들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일이다. 추운 날씨에 몇 시간동안이나 밖에 있으므로 그들 모두는 날씨에 대항하여 몸을 웅크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 길 건너편으로 세 명이 상자를 찢어서 지핀 불을 쬐고 있다. 그렇지만 솟아오른 큰 불길은 곧 사그러질 것이다. 그들은 한 명의 흑인과 두 명의 백인노인들이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며 다만 불길을 응시하고 불기를 쬐며 아마도 지나가 버린 좋은 시절을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낯익은 친구들 중 한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다. 그는 매력적으로 느린 말투의 중서부사람이다. 그는 지하철에서 밤을 보낸다. 기차에서 신문들을 줏어 주머니 속에 넣고 와서 우리에게 주곤 한다. 그것은 실로 작은 선물이지만 진정한 감사로부터 우러나온 선물이다. 그는 검게 그을렀는데 왜냐하면 어느 따뜻한 날에 새봄의 햇볕을 받으며 공원에 앉아 단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가장 부드러운 빵을 요구할 작은 아일랜드사람이 온다. 그는 이가 없기 때문에 호밀 빵의 껍질을 씹을 수가 없다. 우리가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에 감사하면서 그는 우리가 약간의 부드러운 빵을 준비할 것임을 안다.

어떤 손들은 나이와 병과 술로 인해 떨고 있다

그들은 계속하여 온다. 내가 땅콩 버터를 빵에 바르느라 바빠서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때에도 빵을 건네 받기 위하여 내미는 손을 보면 알아 볼 수 있다. 그들이 입은 옷들의 익숙한 특징들을 모두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떤 손들은 나이와 병과 술로 인해 떨고 있다. 이제 거의 끝날 시간이 되면 줄이 얇아진다.

그들은 이제 포장도로처럼 딱딱하고 차거운 마음들을 지닌 사람들이 가득한 것 같은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며 하루종일 걸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공원에 앉아있으면 날씨가 따뜻할 때 경찰이 그들을 내쫓기 때문에 걸어야만 한다. 그리고 나면 다음 끼니와 그날 밤 잠잘 곳에 대한 걱정이 있다. 갈바리의 십자가길처럼 그들의 긴 고통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들은 그 여정에서 피곤함을 덜어줄 베로니카를 만나지도 못하며 십자가의 짐을 대신해 줄 키레네의 시몬도 없다. 이런 일이 내일 또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름끼치게 두려운 일이다.

때때로 우리가 더 넓은 공간을 가질수록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러 오는 것 같았으므로 우리의 자리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꾸려나갔다. 온갖 특징의 그리고 삶의 온갖 모퉁이에서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 모두를 우리는 환영하였다. 그들은 여러 방식으로 가톨릭 일꾼과 ‘맺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와 일년을 머물 작정으로 옷가방을 가지고 왔는데, 우리의 가난에 충격을 받고선 겨우 하루밤을 새우고 가버렸다. 또 다른 이들은 주말만 있기 위해서 왔다가 수년간 계속 머물렀다. 어떤 이들은 그저 가톨릭 일꾼 신문의 글에 나타난 몇가지 “측면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왔다가 공동체의 영원한 구성원이 되곤 하였다. 70세 노인인 브린씨는 어느날 만년필을 가지고 지팡이를 짚으며 성큼성큼 와서는, 말 한마디 없이 식탁에 앉아, 멋들어진 글씨로 많은 편지들에 답장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을 끝낸후에 그는 언제까지나 머물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들은 잠시 왔다가 영원히 머물렀다
여기서도 인종차별주의 다툼은 일어나고...

브린씨는 우리가 곧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직 신문기자였기에 그의 말은 ‘유태인들’, ‘유색인들’ 그리고 ‘이태리인들’ 같은 말들로 가득찼으며, 그는 그의 집안 배경과 교육과 필적에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모두 죽었으며, 70세에 그는 시가 마련한 거주지에 사는 오갈 데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해 겨울 뉴욕에서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있을 곳의 도움을 받았는데, 브린씨의 가장 큰 고통은 흑인들과 함께 시의 도움을 나누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시 숙박소에서 쫓겨났는데 그가 항상 지팡이로 시의 조사자들을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인종차별적인 태도 때문에 임대주택에서 어느날 밤 상해를 당했다(거기에선 나이도 어떤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 다음날 아침 주위를 떠돌아다니던 중에 그는 우리를 발견하였다.

브린씨의 인종차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는 우리에게 어려움들을 가져왔지만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평화를 실천하는 기회를 주었다. 그가 올 때 쯤에 한 흑인이 왔다. 그는 깊고 그윽한 목소리를 지닌 풍채가 좋고 야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큰소리로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커다란 포부는 라디오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인종차별과 정의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을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손으로 하는 모든 노동 이상의 능력을 가졌다고 느꼈는데, 그래서 타자를 치거나 서류를 분류하는 일 등의 사무적인 일들을 했지만 엉망으로 해놓곤 했다. 우리 백인들에 의해서 그의 백성들(흑인)이 고통받으며 경멸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집단적인 죄책감은 우리로 하여금 때때로 참기 어려운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첫번 만남에서부터 브린씨는 그를 모욕하는 일을 즐기었다. 흑인인 로즈씨는 즉시 그에 맞서는 경멸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내가 없을 때 그는 내 책상에 앉아서 발을 올려놓고서 백인 여자들이 유색인들에게 하듯이 브린씨를 조롱하였다. 내가 돌아오면 브린 씨는 나를 ‘깜둥이 애인’이라고 부르면서 나에게 울화를 터트리곤 하였다.

집안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브린씨가 고함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우리는 뻔뻔스럽게 책상에 앉아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것 같은 로즈씨를 보았으며, 반면에 브린씨는 그의 더러운 백발을 움켜쥐며 벌벌떠는 얼굴 밖으로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분노에 차서 말하며 그에게 대들었다(브린씨는 실제로 그해 겨울 몇 번이고 발작했으며, 한번은 겨우 죽음을 피했다).

그는 조그만 침실에서 살았으며 모든 종류의 신문을 읽는 신문기자의 오랜 습관이 있었는데, 신문을 다 읽고 나서 그 자리에 그냥 떨어뜨려 놓았다. 그렇게 하는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우리는 할 수 있는한 최대로 그가 버린 신문들을 주웠으나, 그가 성냥과 담배를 사용하는 것은 지킬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에 성냥불을 끌 수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신문지들 사이로 떨어 뜨렸는데 성냥불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문지에 불이 붙었다. 다행스럽게도 한 손님이 그때에 그 옆에 있었는데 우리는 그가 이름이 프리맨이며 랍비였는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말한 것 말고는 그에 대하여 아는게 없었다. 그는 브린씨를 구하려고 하였는데 그 노인은 오히려 지팡이로 그를 때리면서 ‘빌어먹을 유태인’ 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프리맨씨는 어쨋든 그를 구해주었다.

브린씨는 죽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지냈다. 그의 임종 때에 우리는 모두 로사리오 기도를 돌아가며 침대가에 앉았다. 마지막 순간에 브린씨는 우리를 올려다보며 “이 세상에 남길 유일한 소유물은 내 지팡이이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갖기를 바란다. 그것으로 이 집에 있는 잡종들의 목을 감아 버리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복된 미소를 띠며 우리에게 돌아섰다. 그는 약한 음성으로 “하느님께선 나에게 잘 해주셨어”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그는 죽었다.

스탠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후에는 “적의의 집”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때때로 우리 집들이 우리가 찾고 있는 사랑보다는 미움과 분노의 말들로 더 가득찬 것 같을 때 정말로 슬펐다.

그러나 십자가의 성요한은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주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꺼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라 전체에 환대의 집이 생기다

우리는 가톨릭 일꾼 신문에 환대의 집을 시도한 것에 대하여 기사를 써왔는데, 얼마되지 않아서 곧 다른 환대의 집들이 나라 전체에서 생겨났다. 예를 들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사크라멘토, 시카고, 디트로이트, 크리브랜드, 보스턴, 멤피스, 피츠버어그 그리고 영국의 런던과 위간을 포함해서 다른 20개의 도시들이었다. 한때는 40개까지 있었다. 이 모든 가톨릭 환대의 집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한 도시에서 두번째로 생긴 경쟁적인 환대의 집은 첫번째 환대의 집인 “엘리아스 형제들”집에 반대하며 “영성가들”이라고 그들 스스로를 부르면서 문을 열었다. 매우 의미 있는 뜻인 ‘영성가들’의 집은 손님들과 평등하다는 환희감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들의 부담으로 술을 마시면서 밤을 지새웠으며 그러다가 너무나 지쳐서 몇개월 만에 환대의 집을 닫아야 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그 영적 지도자들은 그들의 행복한 부담이 이웃교회의 자선함을 훔쳐서 된 것임이 발각되어 결국 그 집을 운영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포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환대의 집들은 참으로 성공적이었기에 많은 경우 주교들은 그것들이 더 많아지길 원하였다. 환대의 집들은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던 소위 부스러기 같고 끝장난 사람들을 위하여 살 곳을 마련하는 고유한 일을 하였다. 여행사들, 도시 병원들, 경찰, 사회사업가들, 심리분석가들, 의사들, 사제들, 평신자들 등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집없는 이들에게 거주할 곳을 마련해주는 일을 돕기 위해서 환대의 집들을 방문하였다.

예를 들어, 뉴욕의 우리는 우리에게 아들을 맡기며 그에게 무엇이든 시키라고 부탁하는 아르헨티나의 한 비행청소년의 아버지 편지를 받았다. 시카고에 있는 신학생은 우리들에게 장애인 학생을 보냈으며 빙햄튼의 한 선의를 지닌 주부로부터는 하반신 불구자를 부탁받았다. 피츠버그에선 실연당한 알콜중독 소녀가 수리중이었던 교회의 발판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했는데, 그녀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 누군가가 등에 버팀대를 댄 그녀를 피츠버그에서 뉴욕까지 데려와 우리에게 부탁하였다. 그날 밤 나는 뉴버그에 있는 우리의 농장 경당에 앉아서 피츠버그에 그 젊은 여자를 맡아줄 수 있는 자식이 없고 애정이 넘치는 가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서로서로 교대를 할 수 있으며 어려운 상황에 대처 할 수 있는 한 그룹의 사람들 즉 공동체였다.

어떤 환대의 집들도 모두 똑같을 수가 없다. 집의 관리자들은 품성도 많이 다르고 일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어서도 매우 달랐다. 다만 가난의 문제는 어느 곳에서도 같았지만, 각 공동체 안의 가난의 상태들은 또 다양했으며, 그에 따른 후원자들과 교구지도자들의 응답과 지원 또한 달랐던 것이다.

세계 제2차 대전의 발발로 너무도 많은 젊은이들이 징집되었기에, 환대의 집의 구성원들은 감소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소위 “완전 고용”의 시기 동안에 군에 갔던 많은 사람들이 풀려나 돌아갈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또 다른 이들은 군대의 도움으로 대학에 갔다. 더군다나 실업보험과 같은 종류의 사회 법률제정, 아이들과 사회보장을 돕기 위한 이 법률은 지금 시행되고 있다. 많은 이들은 환대의 집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던 병든 이들과 피폐된 이들을 이러한 제도들이 대규모 차원에서 돕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대의 집들은 공동의 목적과 공동체의 정신으로 고유하게 남아있게 되었다. 우리가 자동화의 그늘 아래 나타나는 새로운 실업의 위협에 직면하고 세계적인 파괴의 테러에 매일 직면할 때에 무슨 이름이든, 무슨 모습으로든지 형제애의 정신으로 상호 도움을 주는 센터들은 지금보다도 더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없었던 것이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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