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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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최충언
  • 승인 2016.08.2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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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용길

[최충언 칼럼] 

"죽음 앞에서 인간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아픔과 꺼져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할 뿐 아니라 영원한 소멸의 공포에 더더욱 괴로워한다.”(사목헌장 18항)

저는 규모 400병상의 요양병원에서 동료의사 아홉 명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병원 근처에 숲이 있어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한창입니다. 병원 등나무에서 우렁차게 울어대는 매미를 봅니다. 수컷매미의 울림판 대신 암컷매미에게는 산란관이 주어져 있어서 암컷은 울지 못한다지요. 매미의 일생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7년 전 나뭇가지 속에 암컷매미가 알을 남겨놓습니다. 이듬해 6월에 알에서 깨어나 땅속에 스스로 들어가서 나무뿌리의 즙을 빨아먹으며 자랍니다. 7년 만에 땅 속을 나와 우화를 거쳐 어른매미가 되지만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고작 2주~4주라네요. 문득 매미울음을 들으며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여름입니다.

요양병원은 주로 치매나 파킨슨병, 그리고 뇌혈관 질환의 후유증을 가진 노인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말기 암환자들도 있습니다. 고령사회가 저출산 문제와 더불어 우리사회의 커다란 의제가 되었지요. 2026년이 되면 일본처럼 초고령사회로 진입한다고 합니다. 제가 담당하는 환자분들이 50명 안팎입니다. 100세가 넘은 어르신이 두 분이나 계십니다. 고령이다 보니까 돌아가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망진단서를 작성하는 일이 잦아지니 저는 자연스레 호스피스나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됩니다.

호스피스(Hospice)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돌보는 것을 말합니다. 호스피스라는 어원은 중세기 때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이 하룻밤 쉬어갈 수 있도록 마련한 숙소를 일컫던 말이지요. 요즘은 삶의 마지막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쉬어가도록 돌봐 주는 것을 뜻하며, 특히 말기 암환자를 전적으로 돌보는 것을 호스피스라고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선종봉사라고 부르지요. 육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서적, 영적문제를 전인적으로 다루며 사랑으로 돌봐줄 때 그것을 호스피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호스피스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다’는 말을 언어생활에서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나무가 시드는 것을 “나무가 죽는다.” 소리가 낮아지는 것을 “소리가 죽는다.” 기가 꺾이는 것을 “기가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눈을 감다, 세상을 등지다, 세상을 뜨다”처럼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에둘러 표현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라는 속담처럼 우리나라 사람에게 죽음은 정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속도를 추구하고 서로 간의 경쟁을 강요받는 현대인들은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화를 낼 때도 “나가 죽어라”, 후레자식이 노부모에게 “나가 뒈져버려!” 합니다. 서로 다툴 때도 “니, 죽고 싶나?”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죽음 속에서도 우리는 실제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김용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로마황제들이 전쟁에 이겨 잔치를 베풀 때 전사한 적들의 시체를 잔치 마당에 늘어놓고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며 건배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살아서 잔치를 벌이지만, 언제 저 해골 꼴이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으로 외쳤다고 합니다. 거꾸로 ‘삶을 기억하라’는 절박한 외침으로 들립니다.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경구이겠지요. 죽음을 잊으면 삶마저 잊히는 걸까요? 죽음을 가까이 둘 수 있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의 의미가 더욱 값지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에 대해 곰곰 생각하다 보니 예수의 죽음이 떠올랐고, 성금요일이 기억났습니다. 성금요일은 교회가 미사를 드리지 않는 유일한 날입니다. 미사뿐만 아니라 성사도 집행하지 않는데, 이것은 성사가 그리스도의 행위이기 때문에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기 위한 것이지요. 여러 해 전에 주보에 실린 생명 환경사목위원회의 글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성금요일의 새로운 의미와 지구를 생각하는 고백성사>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성금요일의 전통은 창조질서보전의 원칙에도 맞습니다. 채식을 해온 한반도 사람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지만, 유럽에서의 금요일은 성금요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금육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대의 금육은, 전 지구적 환경문제와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실천입니다. 가축을 키우는 과정 자체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자연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쇠고기 한 근을 생산하려면 6킬로의 곡물과 콩, 1만 리터의 물이 드는 데, 그 비용이면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채식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숲을 베어 만든 목장에서는 제초제에 절은 곡물을 먹고 온갖 성장 촉진 호르몬을 맞으며 자란 가축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도살됩니다.

채식위주의 식단은 나와 가족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그에 비해 육류는 심장질환과 고혈압, 뇌졸중과 비만 그리고 암 발생률을 높이는 음식으로 분류됩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에는 그동안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귀속감을 거스른 행동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환경보호에 충분한 정성을 쏟지 못했습니다. 생일에 과다한 음식을 준비하여 다 먹지 못해서 버렸습니다.’ 이런 식의 고해를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제는 ‘뒷동산의 쓰레기를 청소하십시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신학이 요구하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종교적 영성의 새로운 감각은 분명히 이런 식의 흐름과 일치합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고통 받는 모든 민중들의 죽음이 나자렛 청년 예수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교회는 정작 예수의 죽음을 상징 속에서만 느끼며 전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 인간의 마지막 실재라면,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인간의 삶은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라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의 죽음 사건 속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의미와 해답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렇다면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일 겁니다. 예수 때문에 나의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가? 만일 찾지 못했거나 찾으려고 열심하지 않았다면 신앙이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이겠죠.

우리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제3자의 것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면 뭔가 눈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구원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가 아닐까요?

사람에게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고, 불확실한 것은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생물학적인 죽음은 인간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지요. 과학은 그 죽음의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늦추려는 기술을 터득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가급적 떼어놓고 싶어 하는 지도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아름답다는 것은 단지 역설에 불과할까요?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멋지게 잘 사는 것은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비록 짧아도 하느님께 허락 받은 것이니, 그렇게 살 일이다. 이것이 인생이 누릴 몫이다.”(전도서 5, 17)

매미의 일생을 생각하다 죽음에 대한 단상을 떠올렸네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찡그린 얼굴을 펴고 웃음을 지어 봅시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러하답니다. 모두들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나십시다.


최충언 플라치도
외과의사.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단팥빵-어느 외과의사의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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