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고상한 돼지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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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고상한 돼지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아니다
  • 최태선
  • 승인 2023.06.0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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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어쩔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인 한 현실타개에 대한 반응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다.

디오게네스가 생각난다. 그에게 알렉산더가 다가왔을 때 그는 현실의 모든 필요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필요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비치는 해를 가리지 말라고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일화가 정말 사실이었을까? 그렇게 현실에 초연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을까? 알렉산더와 같이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무심한(무례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 정말 그는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대로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대로 산 사람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디오게네스처럼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현실의 문제에 연연하는 소시민일 뿐이다. 꽉 막힌 현실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담하고 무엇이든 그것을 타개해줄 수 있는 것을 찾고 또 찾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상상할 수 없다. 나는 배부른 돼지는 아니어도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나는 돼지 생각을 하지 않는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좋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상하게도 돼지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깊이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현실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자신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

늘 노란 조끼를 입고 있던 수산시장의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분은 젓갈 장사를 해서 번 돈 수억 원을 대학에 기부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상을 받을 때 함께 받은 노란 조끼를 언제나 제복처럼 입었다. 자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 돼지라는 오명이나 혐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노란 조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배고픈 소크라테스라는 일종의 주장이다.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그분은 진정한 의미의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고상한 돼지일 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일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한계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부인한 사람들이다. 자기라는 의식 자체가 무의미해져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바울로는 그 상태를 아주 잘 표현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이 아니라 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처럼 살게 된다. 바울로처럼 위대한 신앙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된다. 애초에 하느님 나라에는 위대한 신앙인이라는 타이틀 따위는 없다. 모두가 동등하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이름을 알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향점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배부른 돼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찾는다.

그 노력이 바로 자선과 선행이다. 자선과 선행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사는 것’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정승같이 사는 것 역시 그리스도인들의 덕목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처럼 살아서는 안 되지만 개 같은 사람을 만나면 개처럼 되어야 하고 개보다도 더 못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개 같은 삶이 아니라 섬기는 삶이고 사랑 때문에 희생하는 삶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처럼 사는 삶의 요체를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요체는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처럼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처럼 살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에서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볼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아느냐고 반문한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다 알지 못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신실한 사람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지향하는 그냥 사람들이다.

그들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내세우는 주장의 논거는 익명의 기부나 남는 돈을 적선하거나 사회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공동선”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말하는 “공동선”은 하느님의 정의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만 모든 인간들이 향수처럼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에 대한 노력일 뿐이다.

하느님의 아들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공동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그런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익명의 기부나, 남는 돈을 적선하거나 사회사업에 참여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선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애에 기초한 예언자적 행위로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경제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아들을 증언하는 증인들이며 그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는 존재 자체로 복음을 증언하는 공동체이다.

내 설명이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분명히 깨닫고 있는 것을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이 내가 지니는 한계이다. 하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매일 글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그런 상태여야 내가 쓰는 글이 의미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 단계에서 벗어나면 내가 쓰는 글의 내용이 法語처럼 화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는 화두가 아니라 모든 말씀이 일상의 내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서에서 말하는 “증인”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다.

증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과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공동체인 교회는 하느나님의 아들처럼 사랑하는 삶을 보여주고, 그들 가운데 임한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자 장소가 된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공동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이다.

주님이 지금 이곳에 계시다면 그분은 “그 차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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