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등을 펴주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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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등을 펴주시는 하느님
  • 문지온
  • 승인 2023.05.23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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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온의 심온재 이야기

심온재에서 가장 애정하는 공간은 안방 옆에 있는 작은 마루예요. 동그란 탁자에 의자 두 개가 놓여있는 한 평 반쯤 되는 공간. 손님들이 찾아오면 주로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요. 쿠키를 곁들인 차를 마시거나 소찬일망정 따뜻하게 지은 밥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요. 이야기의 내용과 깊이는 사람에 따라 달라요. 자주 만나도 가볍게 수다만 떨다가 헤어지는 사람도 있고 처음 만나도 내면의 깊은 상처와 고통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대개는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마음이 열리면서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고통과 상실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지만요. 고흥에서 만나 좋은 인연으로 가고 있는 김기석 빈첸시오 선생님처럼 말이예요.

빈첸시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고흥에 온 지 두어 달쯤 되었을 때예요. 지인의 초대를 받아 갔던 점심 식사 자리에서였지요. 소처럼 크고 선한 눈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그분을 보는 순간 “선(善)한 사람이구나. 착해서 혼자 참아 받는 일이 많고, 혼자 끙끙 앓기에 사는 게 더 힘들고 무거울 사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식사 중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통해 알았어요. 그분이 전주에서 오랜 직장 생활을 했고, 아내와 두 아들은 전주에 살고 있으며, 2년 전에 퇴직을 하고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고흥에 내려왔지만 지금은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인근 공소에서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다는 것을.

“마음이 답답하거나 누군가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할 땐 심온재로 오세요. 제가 맥 아담스의 이야기 심리학을 바탕으로 성인 대상 스토리텔링 강의를 몇 년 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살아온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능한 편이예요.”

진심을 담아 말했던 것은 지인과 함께 그를 두어 번 더 만났을 때예요. 듬직한 체구에 말수가 적고 점잖은 사람인데 앞으로 살짝 굽은 어깨와 등이 ‘어딘지 모르게 위축된 것 같았고, 무언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좀 풀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사실, 이때만 해도 저는 그동안 제가 공부했던 심리학 지식과 스토리텔링 강의를 하면서 훈련했던 스킬(적극적인 경청과 공감)을 가지고 그를 돕고 싶고, 또 도울 수 있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분을 통해 제가 하느님의 손길을 보고 느끼게 될 거란 생각은 못했어요. 언제나 지인과 동행해서 심온재를 찾았던 그분이 처음으로 혼자 심온재를 찾아와 무겁고 힘든 마음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그날, 우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차를 마시고 햇살을 즐기며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이야기는 주로 빈첸시오 님이 했고 저는 마음을 기울여 듣는 편이었지요. 처음에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단순한 개인사(個人史)로 들었어요. 그러니까 한 남자가 어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겪었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지금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분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찾으려 애썼지요. 그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노력인지도 모른 채.

그런데 어느 순간, 그분의 이야기가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약육강식의 법칙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이끌고 돌보고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는 가장의 문제였죠. 잔인한 조직에서 비인간적인 대접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몸이 망가질 때까지 참고, 견디고, 희생해온 “한 가장(家長)의 서사” 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분의 얼굴에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거든요. 평생을 가족을 돌보느라 무거운 책임감에 시달리며 살았던 칠순의 오라버니들과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하다가 무거운 얼굴로 자신의 꿈을 내려놓던 마흔 즈음의 후배들...

사랑한다면서, 아낀다면서, 가장으로서 그들이 감당하고 겪어야 했던 희생과 고통을 한 번도 진지하게 들여다보거나 살피지 않았던 제 모습이 보이면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아 오르더군요. 아주 복잡한 감정이었어요. 미안함과 고마움이 가장 컸지만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빈첸시오 님의 이야기를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야기이자 후배와 동생들의 이야기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듣기 시작한 것은. 듣는 자세가 달라졌기 때문일까요?

그때부터 온전히 그분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고 공감하려는 노력 없이 그분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어요.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 당장에 때려치우고 나왔을 직장에서 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온갖 수치와 모욕을 받으면서도 견뎠던 그분의 이야기엔 같이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었고, 혈기 있고 대쪽 같은 본래의 성격으론 연이어 찾아오는 우환에서 가족들을 지킬 수 없기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 보니 지금은 성격 자체가 바뀐 것 같다는 그분의 말엔 “하...!” 소리로 그가 겪었을 아픔에 공감하면서 가족을 위한 그의 노력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을 표현할 수 있었어요.

“어?! 굽은 등이 펴졌네!”

깜짝 놀라 혼잣말을 한 것은 마을회관 앞에서였어요. 이야기를 하고 나니 답답하고 무겁던 마음의 70%가 가벼워졌다며 고마워하는 빈첸시오 님에게 저도 오라버니들을 더많이 이해하게 해주어 고맙다는 말로 두 시간이 넘는 이야기를 끝내고 배웅을 위해 나갔던 길이었지요. 자동차 문을 여는 빈첸시오 님의 뒷모습을 보는데 스틸컷처럼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어요. 다리미로 다린 듯 반듯하게 펴져 있는 그분의 등이었어요. ‘마음의 짐을 덜어내면 몸도 달라지는구나. 신기하다!’ 생각하는데 마치 누군가 제 머리 속에 불어넣은 것처럼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어요. “굽은 등을 펴주시는 하느님!”

“아!” 탄성과 함께 ‘우리의 대화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절로 기도가 흘러나오더군요. 우리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며 앞으로도 마음의 짐을 갖고 심온재를 찾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과 이야기하는 자리에 오늘처럼 함께 해주십사 하구요. 사실, 저는 알고 있거든요. 제가 공감적이기보다는 분석적인 사람이고 지치거나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기보다는 분석하고 판단해서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요. 그러니 우리와 함께 계시고 굽은 등을 펴주시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할 수밖에요!

 

문지온 아가다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방송작가로 활동하면서 몇몇 문학상을 수상했다. "글을 통해 따뜻함에 이른다"는 뜻으로 필명을 문지온으로 정했다. <남은 자들을 위한 800km>(ekfrma, 2016)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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