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이 성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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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이 성인이지
  • 한상봉
  • 승인 2023.05.1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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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이영문 선배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파주 광탄에 있는 도시농부 텃밭을 맡아놨으니, 함께 경작하자는 제안입니다. 의정부 교구는 광탄 성당 뒤편에 있는 부지에 텃밭을 마련해 생태농업에 참여할 사람을 찾고, 농부학교를 열고 있습니다. 저는 박달산 텃밭이 시작되던 초기부터 참여해 왔지만, 작년 한 해는 텃밭농사를 쉬고 그 참에 홈리스행동 야학 교사로 일했습니다. <가톨릭일꾼> 신문을 만들고, 이런저런 강좌를 열고, 본당에서 교육담당 선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쩌지 못하는 영적 갈망 때문에 농사일이든 홈리스 활동이든 현장에서 몸으로 때우는 부분이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특별히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일수록 사람 냄새, 흙냄새를 맡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신학은 수증기 같아서 처음엔 뜨거운 열기로 뭐든지 알 것 같고 무엇이든 할 것 같지만, 이것도 구체적인 쓰임새가 마땅히 없으면 금방 증발해 버립니다. 신학은 영적 허기와 같아서, 몸을 얻지 못하면 종교적 허위의식만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당신의 천막을 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이라는 책에서 로버트 엘스버그는 “사랑을 꿈꾸는 것만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없다. 우리는 실제로 사랑하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갈망하는 것만으로 하느님께 이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참여해야,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 닿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데 집요한 사람

제가 일산과 파주에 살면서 만났던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랑을 하라고 매달리듯 거듭 새삼 보채던 분이 이영문 선배입니다. 그분이 한사코 밀고 끌고 당기지 않았다면, 소심한 제 성격에 하지 못했을 일이 참 많습니다. 이영문 선배는 한마디로 ‘사랑하는데 집요한 사람’입니다. 일산에서 생각하지 않았던 본당 사목회 일을 맡았던 것도 그분 덕분입니다. 그곳에서 신자교육을 매개로 참 많은 분들을 만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의정부교구 뿔나팔 정의평화 월례미사가 있는 날이면, 굳이 한 사람이라도 더 연락을 해서 자기 차로 ‘모시고’ 갑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영문 선배는 생계로 하는 우리농 매장 승합차인 ‘다마스’를 타고 다닙니다. 언제 고장 날지 모를 만큼 낡은 조그만 승합차였는데, 그 차 옆자리에 앉을 때마다, 무주와 경주에서 살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전라도 무주로 귀농해서 농사를 지으며 한 주일에 한 번 전라도 광주로 나가서 ‘표현예술심리치료’를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본업이 농사라서, 광주로 화물차를 끌고 다니며 공부를 했습니다. 급기야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과 예술치료과정 강사가 되었을 때도 화물차를 끌고 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학교 교수나 강사 중에 화물차 타고 다니던 사람은 저밖에 없었고, 대학 들머리 언덕바지를 오를 때, 학생들은 신기한 듯 화물칸에 올라타고 싶어 했지요. 자동차 광고에서는 승용차의 품격이 그 사람의 품격을 가름한다고 선전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이영문 선배나 저나 품격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체구가 작은 이 선배는 바지런 합니다. 오전에는 도농직거래 매장에 주문 들어온 농산물을 배달하고, 오후에는 뭐든지 신나서 합니다. 그때는 한 사람이 오만 가지 일을 한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농사로 잔뼈가 굵었고,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성격처럼 진하게 하고, 그래서 고양시 안에서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 ‘이영문’을 모르면 간첩이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노인요양원을 돕고, 한 사람이라도 연분이 닿으면 지극정성으로 돌봅니다. 유통기한이 간당간당한 농식품이 생기면 그걸 승합차에 싣고 다니며 나눠주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당신 능력이 닿는 데까지 마음을 몰아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겸손합니다. 겸손하고 겸손합니다. 이영문 선배는 조금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방실방실 웃으며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 합니다.

제 생각엔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난한 교회”에 가장 적합한 유형의 신앙인입니다. 깊은 사회적 관심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어려운 말 하나도 쓰지 않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은 사람이지요. 중산층화 된 교회에 비판적이지만 새벽미사를 거르지 않고, 제 기억으론, 한 계절에 한 가지 옷만 입고 다닌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겨우내 낡은 골덴 바지와 곤색 패딩만 입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입고 나오던 양복은 제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똑같은 그 옷이었습니다. 돈도 백도 없는 그이를 본당 사목회장으로 지명하신 본당신부님도 참 대단한 분이지요.

 

남의 일도 내 일처럼 돌보는 사람

교회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르지만 생각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 그들이 주님으로 고백하는 예수님, 그들이 활동하는 교회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본당 사목 방향을 정할 때에 갈등을 불러오곤 합니다. 사목회를 하면서 서로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습니다. 사목회장이지만, 이영문 선배의 생각이 묵살당할 때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정치적-종교적 견해가 달라서 신자들끼리 대립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영문 선배의 생각이 급진적이어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많아도 이영문 선배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이의 시선이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성은 없어도 의도가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이가 생각은 달라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때 본당 신부님은 말합니다. “맨날 나랑도 싸우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성인이지.”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십시오. 마음으로 겸손하고, 말이나 행동에서 겸손하십시오.” 하고 말했던 샤를 드 푸코 영성을 따르는 작은 형제들의 우애회 제3회 회원이기도 한 이영문 선배입니다. 요즘 이영문 선배는 생태농업에 마음이 꽂혀 있습니다. 곧 봄이 오면 새벽미사 다녀와서 오전 배달 일이 끝나기 무섭게 광탄 박달산 텃밭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주엽동 성당 신자들과 공동텃밭도 일구고, 도시농부들의 삶을 보살피는데 지극정성을 다하겠지요. 안 봐도 뻔하고, 보면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남의 일도 내 일처럼 돌보는 사람이 부르는데, 제가 거절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이에게 기대어 잠깐이라도 천국을 맛봅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3년 4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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