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발 김어준-격론의 시대와 IT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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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김어준-격론의 시대와 IT콤플렉스
  • 김선주
  • 승인 2023.04.2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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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나를 타인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정치적인 단어가 하나 있다면 좀 진부하지만, 나는 ‘586세대’다. 이 말은 민주화운동이라고 속칭되는, ‘광기와 저항의 시대’ 한 가운데서 발가벗고 섰던 경험이 있다는 뜻이다. 이 시대 우리 담론의 특징은 긴 시간 과도하게 이어지는 회의(discussion)에 있었다. 가령 대학 캠퍼스를 둘러싼 전투경찰이 지랄탄이라고 부르는 페퍼 포그(다연장 최루탄 발사기)를 앞세우고 교내로 진격해 들어오려는 순간에도 지도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으로 시간을 소모할 정도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논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랜 시절 토론과 참여의 과정을 생략해버린 박정희와 전두환 식의 독재에 대한 저항의 한 방법이었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모두가 참여하고 토론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만끽하려는 운동권 나름대로의 가치관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세례를 받은 나 역시 젊은 시절, 매운 맛을 내는 격론을 즐겼다.

그런데 목사가 되고 보니 이 세계는 토론이 없고 토의만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착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을 뿐더러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목회자들의 직업적 특성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은 되지만 그 큰 이유의 근거는 아무래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세계에서는 어떤 가치와 지향점을 향해 격론을 벌이던, 그 전투적인 세계의 내 모습이 오히려 철없고 진부해보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 집단 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나타나는 경향이다. 군부독재의 시대가 종식되고 정치적 긴장이 완화되면서 격론의 장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IT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진지하게 토론하여 결론에 도달하는 담론의 생성과 유통 과정을 지루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담론보다 날카롭게 대립하는 이분법적인 직관으로 진실이 말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담론이나 화법을 가진 사람을 진부하게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IT콤플렉스라고 명명하고 싶다.

 

천재와 예언자

이러한 경향 가운데 전통적인 담론을 IT 시대의 직관으로 말하는 천재가 등장하였다. 김어준이다. 그의 담론은 전통적이지만 말하기는 디지털 방식이다. 기득권 언론의 카르텔을 깨고 등장한 것은 <딴지일보>지만 그보다는 팟케스트 방송인 <나는 꼼수다>의 파괴력은 경천동지할 정도로 대단했다. <나꼼수>는 기득권 언론이 다가갈 수 없는 영역으로 촉수를 뻗치고 기득권 언론이 말하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내질렀다. 김어준의 천재성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김어준은 애플 기기(iPod)에 담겨있는 스티브 잡스의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레거시 미디어가 지배하던 뉴스와 담론을 ipod을 소유한 개인들이 대체할 수 있음을 꿰뚫어본 것이다. 그의 예측대로 이제 언론도 정치도 ‘개별화된 집단’의 힘에 의해 제어되는 다중(Multitude)의 사회가 되었다. <나꼼수>를 시발점으로 유사한 팟케스트 방송이 줄을 이었고 그 파고는 기성언론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둘째, 김어준은 기성언론의 문법을 파괴했다. 기성 방송의 규율성과 질서를 무시했다. 그는 정제된 언어와 잘 다듬어진 문법 뒤에 작동하고 있는 지배이데올로기를 면전으로 끌어냈다. 그는 어떤 시스템에도 통제받지 않았다. 이것은 다중이 그에게 느끼는 매력의 핵심이다. 그는 사물과 사건의 핵심을 날카롭고 거침없이 찌르고 들어갔다. 그것은 품격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송언어의 기망을 폭로하는 데 적절했다. 오직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가 가진 힘이었다.

진실이 자유를 만날 때 폭발력은 배가된다. 김어준은 그 어느 것의 통제도 받지 않고 진실을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왕궁처럼 시스템과 규모가 갖추어진 방송 시스템이 아니라 퀴퀴한 지하실이나 이불속에서 춘화(春畵)를 보며 키득거리는 사춘기 애들의 수준으로 방송을 저속화시켰다. 이것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던져준 개념, ‘다중(多衆)’의 시대를 우리 사회에 앞당겼다. 촛불집회로 부정한 권력자를 탄핵시킨 다중의 위대한 힘은 김어준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셋째, 김어준은 위선적인 권위와 권력을 조롱한다. 김어준에게 경계는 없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룬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다루든 그 대상은 이분법적으로 나뉜다. 진실과 거짓으로 말이다. 진실에 대해서는 진정성으로 대하지만 위선적인 권위와 권력에 대해서는 조롱을 서슴지 않는다. 김어준은 어떤 정치인을 상대하든 상대방의 위선과 기망하는 제스쳐에 폭소를 금치 않는다.

그는 웃음을 절제하지 않는다. 맘껏 조롱하고 비웃는다. 거짓과 폭력을 대하는 그의 방식이다. 그것은 정교한 논리로 상대방의 위선을 들추어내는 전통적인 담론 방식이 아니다. 단순하고 명쾌한 단말마의 웃음으로 조롱하는 이 태도는 IT 시대의 감각적 특징 중 하나다. 0과 1로 단순하게 표시되는 디지털 기호처럼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상대의 논리에 모순이 드러나고 거짓이 발견될 때, 또는 권위를 내세우고자 하는 오만함이 비칠 때 그는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넷째, 김어준은 히피(Hippie)다. 그의 외모에 나타난 정신은 70년대 반전(反戰)을 외치며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히피의 정신에 뿌리박고 있다. 자유로운 외모처럼 그의 정신도 자유롭고 싶어 한다. 히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의 운동으로 끝난 게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목마름, 인간정신의 지향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김어준은 지난 시대의 유행을 좇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내일로 계승하고 싶어하는 자유주의자다. 오세훈이 김어준을 TBS에서 쫓아낸 것은 오히려 그의 영향력을 더 키워준 꼴이 되고 말았다. 김어준은 언론의 제도권 밖에 있을 때 더 김어준답다.

다섯째, 김어준은 인문학의 풀에서 대어를 낚는 사람이다. 그는 가볍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의 사유 과정과 통찰력은 인문학의 깊은 층위에서 온다. 그는 정치와 경제, 문화, 예술, 군사, 물리학, 전자공학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얕게 다방면을 안다”고 한다. 하지만 깊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에 있다. 그가 지향하는 궁극은 거짓을 해부하고 진실을 말하는 데 있다. 지식은 최종 단계가 아니다. 지식을 제어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발시키는 힘은 편집능력에 있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하나의 주제로 편집하여 진실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듣는 이에게 새로운 감성과 활력을 선물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진실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 그리고 기성의 권위와 문법을 버리고 대중사회로 하강할 때 더 큰 임팩트를 갖는다. 김어준의 뉴스에는 스토리가 있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 하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 감동을 느끼게 된다.

여섯째, 씨발 김어준. 그는 ‘나꼼수’나 ‘다스뵈이다’ 등과 같이 제도권 밖에서 진행하는 개인방송에서 멘트 중간에 ‘씨발’이라는 욕설을 양념처럼 섞어 쓴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따질 필요는 없다. 이것은 대중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초급 수준의 욕설이고, 김어준은 그것을 방송언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 말은 복잡한 논리를 요하는 대목에서 던져지는 감탄사다. 인간의 정신은 복잡한 언어와 문법으로 논리를 직조하는 것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낱말이나 표정, 제스처만으로도 언어 논리를 뛰어넘어 맥락을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왔다. ‘씨발’은 비논리적 논리 언어다.

약자가 강자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는 해학과 풍자다. 해학과 풍자는 피 흘리지 않고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약자들의 무기다. 하지만 이것은 합리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고전문학 작품 안으로 사장(死藏)되고 말았다. 정교한 논리나 문법 없이 약자가 강자에 대항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근대성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좋지 않은 선물이다. 하지만 김어준은 잃어버린, 풍자와 해학을 팟케스트에서, 그리고 유튜브에서 되살려냈다. 그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같다.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할 줄 알기 때문이다.

진실을 향한 열정, 그리고 명쾌하고 직관적인 통찰력과 분석력,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문제 앞에 통쾌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여유로움, 세상 모든 사람이 절망할 때 등짝을 후려치며 “쫄지 마!”라고 외칠 수 있는 용맹스러움, 세상의 그 어떤 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한 태도, 고뇌하는 인간의 따뜻한 심성, 타자를 바라보는 젖은 눈,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묶어 말하면 그것은 ‘김어준’이다.

김어준을 구약성경의 인물상으로 보면 ‘예언자’다. 예언자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는 점술가나 무당이 아니다. 신으로부터 당대의 문제에 대해 진실을 말하도록 메시지를 위탁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시대의 문제들, 악, 권력, 폭력, 거짓, 위협 등과 같은 당대의 사회적인 문제를 통찰하고 고발하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정의)으로 거짓을 폭로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볼 때 김어준은 예언자다.

강준만은 김어준을 정치무당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김어준을 타락시켰고 김어준은 정치를 타락시켰다고 하며 김어준을 음모론자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타락한 정치적 감각으로 보면 강준만이 타락한 3류 정치평론가로 보인다. 강준만의 감각은 거기 있다. 타락한 정치는 음모와 배신의 지형 안에 있다. 부패한 정치를 바라볼 때 정치적 상상력이 없으면 부패한 내부를 볼 수 없다. 그 정치적 상상력을 음모라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과학적 가설들은 다 음모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음모는 학술적인 언어를 동원하여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진실이 문제다. 그런데 진중권이나 강준만 같은 이들은 진실이 아니라 사람을 본다.

그래서 강준만 류의 논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김어준에게 혐오를 난사한다. 음모론자, 털보새끼 같이. 의미나 가치, 진실을 혐오 이미지로 덮어버리려고 한다. 김어준을 음모론자로 몰고가는 자들이나 2천 년 전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비난하며 소송을 걸었던 자들이나 이들의 상상력은 너무 저렴하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예수가 우리 시대에 온다면, 김어준이지 않을까? 진실을 말하는 용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권력 앞에 굴하지 않는 대담함, 기득권자들의 모함에 빠지는 것 들이 예수의 삶에서 나타났던 것들 아닌가.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유튜브 강의 들어보세요.
<한상봉TV-가톨릭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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