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수스]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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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수스]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4.2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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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튀르키예 여행기-10

첫 그리스도인 순교자 스테파노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당했다. <사도행전>은 그 자리에 “사울이라는 젊은이”(7,58)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그 젊은이가 훗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회심한 ‘바울로’라고 한다. 이 바울로 사도의 고향이 타르수스다. 타르수스는 지중해로 흐르는 치드누스 강 양편에 자리잡은 도시로, 기원전 333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치드누스 강에서 목욕하다가 익사할 뻔한 지중해 지역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기원전 64년 로마에 병합되었고, 기원전 57년에 킬리키아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다. 타르수스에는 많은 유다인들이 이민을 와서 정착했으며, 그들 중 하나였던 바울로는 자연스럽게 헬레니즘 문화를 흠뻑 맛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클레오파트라의 성문’ 또는 ‘바울로의 성문’이라 부르는 로마식 성문이 하나 남아있는데, 그것조차도 바울로 시대 이후의 건축물로 나중에 확인되었다. 또한 이 성문 근처에 ‘바울로의 생가 우물’이 있으나, 이 역시 역사적 신빙성은 없다. 정양모 신부는 “타르수스 시청에서 순례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어느 부잣집 우물에다 그런 딱지를 붙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바울로의 생가 우물 (이하 사진=한상봉)
바울로의 생가 우물 (이하 사진=한상봉)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순례자들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물에 손을 담그고 있는 순례자들
클레오파트라 성문. 로마의 달변가였던 키케로가 킬리키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기원전 50년 타르수스에 왔으며, 기원전 41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장군이 타르수스에 와서, 이 도시에 면세 혜택을 베풀었다. 이때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아름다운 비너스 여신으로 분장해 치드누스 강을 타고 올라와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클레오파트라 성문. 로마의 달변가였던 키케로가 킬리키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기원전 50년 타르수스에 왔으며, 기원전 41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장군이 타르수스에 와서, 이 도시에 면세 혜택을 베풀었다. 이때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아름다운 비너스 여신으로 분장해 치드누스 강을 타고 올라와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회심한 바리사이, 바울로

바울로가 “나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벤야민 지파 사람입니다”(로마 11,1)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부모는 물론 자신도 철저한 유다인이었다. 덧붙여 그가 로마 시민권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확실하다. 바울로가 어려서 예루살렘에 유학해 랍비 힐렐의 손자이며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였던 가말리엘 1세에게서 율법을 공부했다고 전해지지만, 정양모 신부는 바울로가 주로 칠십인역 성경을 인용한 사실에 비추어 허구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가 부모로부터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교육을 받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율법을 지키는 바리사이파에 속했다. 바울로는 ‘율법’을 구원의 유일한 방편으로 여겼다.

“그는 율법을 호되게 비판한 예수(마태 5,21-48 참조)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율법과 성전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저주받은 자’(갈라 3,13)이지 절대로 메시아일 수 없다고 바울로는 확신했다. 더구나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가 부활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 사건이지,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과거 사건일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위대한 여행>, 정양모, 생활성서, 1997)

이 때문에 바울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다. 그가 박해한 사람들이 토박이 유다인들이 아니라, 유난히 율법과 성전에 비판적이었던 그리스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음은 중요한 사실이다. 바울로는 그리스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대표격이었던 스테파노를 살해하는데 가담했던 것으로 보이며,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타르수스를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목에서 자신이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6)라고 고백하듯이, 예수를 만나 회심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같은 그리스도인을 예전과 다르게 보게 되었다. 같은 하느님을 모시지만, 적으로 보였던 그리스도인들이 동지로 보이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실상 바울로가 믿던 하느님은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과 같으면서도 다른 분이 아니었을까? 율법의 하느님과 자비의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지만, 때로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처럼, 같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가혹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타종교는 그렇다 치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만 보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더 좁게 보면,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작은 차이에 대해 ‘파문’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 교회의 역사다.

극명한 예로, 가톨릭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여성사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여성사제 문제는 믿을 교리와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교회 직제의 문제다. 얼마든지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조정될 수 있는 교회법 관련 사항이 아닌가?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여성사제 논의를 ‘자동 파문’에 처할 만한 중대 범죄로 다루었다.
 

바울로의 생가 터
바울로의 생가 터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믿지 않는 하느님은 나도 믿지 않는다”

예수는 죄 많고 나약하고 비천한 이들을 돌보셨고, 바리사이파처럼 차별과 배제를 일삼는 사회체제를 거부하셨다.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은 ‘품어 안는 아빠 하느님’이셨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누가 하느님의 자비를 행하고 있는지 여부다. 그의 인품과 언행을 묻지 않고, 공식적인 종교인인 율법학자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이라서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서 제단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요한이 예수에게 “어떤 사람이 선생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마라”고 타일렀다(루카 9,49-50 참조).

후안 아리아스는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성바오로출판사, 1988)에서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들은 사람들의 양심을 변화시키고, 부활의 기쁨을 확산시키며, 보편적 형제애를 발견해내고, 인간의 놀라운 존엄성을 드러내며, 인간이 하느님의 직접적 협조자와 친숙한 벗이 되게 해주는 창조적 자유를 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톨릭교회의 사제나 신자가 아니라 해서 배제할 필요가 없음을 밝힌다. 아울러 진리를 목마르게 찾으며, 매일 빈번하게 일어나는 조그마한 일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들, 그리고 참된 교회가 되도록 자극을 주는 운동이나 단체들을, 이들이 교도권에 따를 생각이 없다고 해서 문제 삼으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비록 무신론자라해도 받아들일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후안 아리아스. 그는 “수많은 무신론자들이 믿지 않는 하느님은 나도 믿지 않는다”고 한 동방교회의 총대주교 막시모스 4세의 말을 인용해 “나는 결코 이러한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며 긴 목록을 제시한다. 그중 몇 가지를 꼽아 보면 이렇다.

- 스스로 공포의 대상이 되는 하느님.
- 자신을 ‘당신’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는 하느님.
- 특정한 교회, 특정 문화, 특정 계층이 독점하도록 하는 하느님.
-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느님.
- 손에 쥔 법조문에 따라 항상 판결을 내리는 심판관 하느님.
- 사람들의 서툰 실수를 보고 미소 짓지 못하는 하느님.
- 지옥에 ‘보내는’ 하느님.
- 시험 때 항상 만점을 요구하시는 하느님.
- 자기 집 문밖에서 굶주리는 이들이 많은데, 집안에서 포식하는 부자들의 흠숭을 받는 하느님.
- 여인의 아름다운 다리를 흘낏 쳐다보는 것, 분심잡념 중에 기도하는 것, 이웃을 비방하는 것, 노동자 봉급을 횡령하는 것,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똑같은 죄로 간주하는 하느님.
- 무질서보다 불의를 더 원하시는 하느님.
- 역사 안에서 고통 받는 인류의 문제에 입 다무시는 하느님.
-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이들의 하느님.
- “만사 순조롭다”고 항상 말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하느님.
- 인간에게 죄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 하느님.
- 교회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느님.
- 사랑보다 순결을 좋아하는 하느님.
-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하느님.
- 인간과 사랑에 빠질 수 없는 하느님.

바울로 사도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리사이로 남기를 멈추고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빛을 만났듯이, 우리 교회도 신앙고백의 다양성 안에서 교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느님께서는 교회법보다 자애롭고, 교도권보다 지혜로우시고, 교회보다 크고, 죄 많은 백성 가운데서 오히려 당신의 일을 시작하신다고 믿는다.

바울로 생가 터 부근의 거리
바울로 생가 터 부근의 거리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유튜브 채널 <한상봉TV-가톨릭일꾼>에서 강의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tv-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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